제 14 장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연합과 세상에서의 연합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세상의 연합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기에, 그 이익이 깨지는 순간 언제든지 서로 원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연합은 사랑을 기초로 한다. 그래서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기꺼이 감당한다.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말씀한다. 우리가 마귀의 종이 되어 악을 행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자격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제물로 세우셨고, 예수님 또한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그로 인해 우리 역시 자신을 드리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그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툼과 전쟁은 여러 이유를 내세우지만, 그 근본에는 서로 사랑하지 않음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세상의 왕들은 서로 싸우기 위해 역청 구덩이가 많은 싯딤 골짜기에 모였다. 사람이 역청 구덩이에 빠지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싯딤 골짜기는 후에 염해가 되었으며, 염해는 오늘날 사해, 곧 “죽음의 바다”로 불린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어 갔다.
이러한 왕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마귀의 일을 보게 된다. 마귀 역시 사람들을 죄악의 구덩이에 빠뜨려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반대로 우리의 반석이 되어 주신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 40:1,2)
다윗이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시 62:2)이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 외에는 안전한 피난처가 없으며 사람은 하나님 밖에서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참된 안전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다.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왕들이 그를 배반한 것은 그의 지배 아래 있는 삶이 고되고 괴로웠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혹독한 노역으로 인해 그곳을 떠나고자 했던 것과 같다. 만일 그들이 애굽에서 만족과 안락을 누리고 있었다면,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고통을 싫어하고 평안과 행복을 갈망한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만나신 사마리아 여인도 남자에게서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면 남편을 여섯 번이나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어떤 사람으로도 채워지지 않았기에, 결국 참된 구원자를 갈망하게 되었다.
우리 또한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래에서 만족하고 있었다면 결코 그에게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을 안식과 참된 평안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더하며, 끝내는 영원한 멸망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사람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원자를 찾게 된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지친 인생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8-30)
“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은 자신들을 섬기다가 배반한 왕들을 칼로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과 전혀 다른 길을 가셨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무리가 예수님께 손을 대어 잡으려 하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의 귀를 떨어뜨렸다. 그때 예수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억지로 굴복시켜 자신을 섬기게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는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유는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섬기셨기 때문이다.
바람이 세게 불면 사람은 옷이 벗겨지지 않도록 더욱 굳게 붙잡지만, 따뜻한 햇볕이 비추면 스스로 옷을 벗는다. 이처럼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수록 억지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된다.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빠져들기는 쉬워도 한번 빠지면 벗어나기 어려운 곳이 역청 구덩이이다. 이것은 사람이 죄악에 빠지는 것은 쉬우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 준다.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통해 자유와 만족을 얻으려 하지만, 결국에는 그 욕망 자체에 붙들리게 된다. 처음에는 즐거움과 위로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마음과 삶을 지배하게 되고 마침내는 그것의 종이 되고 만다.
도박이나 마약, 술과 같은 것들도 그러하다. 처음에는 사람에게 기쁨과 해방감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번 중독되면 오히려 그것에 매여 평생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라고 말씀한다.
많은 사람들은 육체의 소욕과 직접 싸워 그것을 억누르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오히려 더 깊이 매이는 경우도 많다.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길은 끊임없이 그것만 바라보며 씨름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성령을 따라 행하는 데 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될 때, 어느 순간 이전에 자신을 지배하던 육체의 소욕들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사람들은 재물을 사랑한다. 그래서 재물을 모으고 그것을 오래도록 간직하려 한다. 그러나 영원히 함께할 것처럼 보이던 재물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일도 많다.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 그리고 롯의 재물도 전쟁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재물은 아무리 많아도 결국 사라진다. 돈과 재물, 명예와 권력 같은 땅의 보물은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헛된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행한 모든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하늘의 보물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육신의 양식을 위해 평생 수고하지만, 정작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힘쓰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이 땅의 썩어질 것보다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일한다. 하나님 안에서 행한 믿음과 사랑과 순종은 결코 없어지지 않으며, 영원한 하늘의 보물로 남게 된다.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말씀한다. 사자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경계가 느슨해진 동물을 주된 표적으로 삼는다. 이처럼 영적으로도 믿음의 교제에서 멀어지고 홀로 떨어진 사람은 마귀의 공격 대상이 되기 쉽다.
롯이 끝까지 아브람과 함께 있었다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에게 사로잡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브람에게는 그와 동맹한 자들이 있었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들도 있었다.
함께하는 공동체 안에는 보호와 도움과 회복의 은혜가 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주셨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세워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하나님은 각 지체에게 은혜를 나누어 주셔서 서로 배우고 공급받게 하셨다. 또한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 가운데 계시며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성도가 교회에 속하여 함께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큰 보호와 은혜 안에 거하는 일이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받을 분깃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을 때, 아버지가 늘 그 아들의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처럼, 아브람 역시 자신을 떠나간 롯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아브람은 롯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길리고 훈련된 자들을 거느리고 쫓아갔다. 그리고 롯과 그에게 속한 사람들, 또 빼앗긴 모든 재물을 다시 찾아왔다. 롯은 아브람을 떠났지만, 아브람은 롯을 잊지 않았다.
성경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라고 말씀한다.
육신의 부모는 때로 자신의 욕망과 연약함 때문에 자식을 버리거나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얼마나 멀리 떠나 있든지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기억하시며, 변함없는 사랑으로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 사랑이 결국 우리를 다시 구원의 자리로 이끄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아브람은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네 왕이 자기 조카 롯을 사로잡아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쳐서 롯과 모든 빼앗긴 재물을 되찾아 왔다. 소돔 왕은 재물과 양식을 빼앗겼던 자였기에, 그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영접하였다.
그러나 소돔 왕은 아브람은 영접했지만, 아브람의 하나님은 영접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그 성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가 멀리 서서 예수님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하였다. 예수님이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 17:14)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가는 도중에 깨끗함을 받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눅 17:17,18)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감사의 말을 한다. 그러나 그 감사가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로 이어지지 않으면 결국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고 말씀한다. 사람이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히브리서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1-3)
이 말씀처럼 멜기세덱이 부모도, 족보도, 시작과 끝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았다는 것은 그가 신성을 지닌 존재, 즉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아론의 자손들이 대제사장이 되었다. 이는 대제사장의 아버지가 곧 대제사장임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계통)’를 따른 대제사장이라면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역시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님이 스스로 ‘속죄 제물’인 동시에 대제사장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신 동시에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라고 미리 말씀하셨으며, 히브리서에서도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20)고 증거한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당신의 피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도말하시고 영원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대언하고 계신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三位一體)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세 위격(성부·성자·성령)으로 존재하신다는 신비다. 성부는 하나님 아버지, 성자는 예수 그리스도, 성령은 하나님의 영을 뜻한다. 이 세 위격은 각각 독립된 주체이시면서도 오직 한 분인 하나님이시다. 즉, ‘본질은 하나이나 위격은 셋’이라는 의미이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 삼위일체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멜기세덱이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말한 장면을 보면, 얼핏 멜기세덱이 하나님과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이시면서 동시에 그 제사를 집행하는 ‘대제사장’이신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 역시 하늘에 계신 통치자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의 역사 속에 대제사장(멜기세덱)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보면, 이 축복은 결국 하나님이 친히 아브람을 축복하신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로마서 4장 23절과 24절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이 말씀처럼, 당시 멜기세덱이 믿음의 조상 아브람을 축복한 것은 단지 아브람 한 사람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오늘날의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의 백성들과 오늘날 우리를 향해 지금도 변함없이 이렇게 복을 선포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 6:24-26)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아브람은 소돔 왕이 훗날 “내가 아브람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는 자신이 자신 된 것이 누구의 도움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굳게 붙들었다.
사도 바울도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헛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서 지금의 형편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거나, 스스로 몸을 잘 관리했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퇴색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는 자신을 높임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한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받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거나 그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지극히 작은 생각 하나조차도 경계해야 한다.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섬기는 마음을 주시고, 시간과 힘을 주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셔야만 가능하다.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위해 수고한 자들에게 상을 베푸신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 15:10)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8)라고 말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아브람이 자기와 동행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분깃을 인정해 주었던 것처럼, 사도 바울도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베푸실 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세상의 보상이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 좋은 부활과 영원한 상급을 소망하며 자신의 삶을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드린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