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제 12 장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성경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사 51:2)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고향 갈대아 우르에 그대로 두신 채로도 얼마든지 축복하실 수 있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뿐 아니라 친척과 아버지의 집까지 떠나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남아 있으면 온전히 하나님을 의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을 끊으신다.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시 105:16)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붙잡고 있는 근거를 흔드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신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은 결국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렘 2:13)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빼앗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내려 먹이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의지의 대상을 제거하신 후 오히려 하나님의 것으로 풍족하게 채우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으로,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와 같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셨다. 아브람이 그 복을 누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바로의 군대로 인해 홍해 앞에 갇혔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 14:16)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이 되었다.

성경은 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잡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모든 믿는 자의 표본이 되었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복음을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기에 그는 ‘복의 근원’이 되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8,9).

그러나 아브라함은 행위로 보았을 때 결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아내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며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입었다.

이와 같이 우리 또한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없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받은 동일한 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 그의 행위가 온전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 아브라함을 옳다 여기고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반대로 그의 행위만을 보고 그의 믿음을 업신여기며 정죄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과 롯은 함께 길을 떠났지만, 그 출발의 기준은 달랐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은 삼촌 아브람을 따라갔다. 이 차이는 결국 두 사람의 전혀 다른 결말로 이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기에, 말씀을 따르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말씀을 이루실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반면, 상황에 따라 변하는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없기에 결국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된다.

아브람과 롯의 소유가 많아져 더 이상 함께 거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의 중심은 분명히 드러났다. 아브람은 롯에게 “우리는 한 친족이라 서로 다투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했다.

그때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다. 그 땅이 물이 넉넉하고 비옥해 보이자, 그는 요단 온 지역을 택하여 동쪽으로 옮겨갔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믿었기에 어디에 있든지 복을 받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롯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의지했기에, 눈에 보기에 좋은 곳을 선택했다.

결국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았다. 반면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속에서 겨우 구원을 얻어 떠나야 했고, 이후 그의 가정에서는 암몬과 모압이 태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비극적인 결과가 이어졌다.

성경은 말씀한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16:20)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익숙한 곳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반면,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으나 도중에 하란에 머물다 생을 마감했다.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아버지 데라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쫓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고말씀한다. 하나님의 뜻은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기의 열심과 의지로 천국에 가려다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쫓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따랐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아브라함이 누렸던 복을 우리도 함께 누리게 된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람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선포된 순간, 비록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 거주하고 있었을지라도 그 땅의 실질적인 주인은 더 이상 그들이 아니라 아브람의 자손들이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누구에게 주시든지, 그 순간 그것은 그에게 속하게 된다. 가나안 사람들이 여전히 그 땅에서 주인처럼 살아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이상 그 땅의 소유권은 이미 아브람의 자손들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이와 같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가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제 그는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할 수 없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로 옮기셨기 때문이다.

마귀는 여전히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를 지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선포하신 약속 위에 서 있는 존재이다. 비록 아직 모든 것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소속과 주권은 이미 분명히 결정되어 있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브람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과 ‘폐허, 무너짐’을 뜻하는 아이 사이에 장막을 쳤다. 이 모습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서 있는 우리의 영적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아브람이 그 사이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불렀듯이, 우리 역시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시선은 보이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는 말씀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우리는 영원한 본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기에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간다. 외국인과 나그네는 돌아갈 곳이 있기에 잠시 머무는 곳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이 땅에 마음을 두지 않기에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람이 거하는 땅에 기근이 임하자 그는 애굽으로 내려갔다. 이 장면은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으러 왔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 대왕이 베들레헴과 그 지경의 사내아이들을 죽이려 하자,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아브람은 기근이라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간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헤롯의 칼날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요셉 가족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두 사건은 같은 ‘애굽으로 내려감’이라 할지라도 그 성격은 분명히 다르다. 아브람의 경우는 환경을 따라 선택한 이동의 모습이라면, 요셉의 가족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보호와 인도의 길이었다.

하나님은 기근을 통해 믿음을 시험하기도 하시고,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하시며,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마음을 끊어 내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신다. 또한 기근과 같은 어려움을 통해, 아기 예수를 보호하신 것처럼 우리를 더 안전한 자리로 인도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려움을 허락하시든지,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람과 함께하셨던 것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사실이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아람 왕이 선지자 엘리사를 잡으려고 군대를 보내 성을 에워쌌을 때, 그의 사환 게하시는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했다. 그러자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고 말하며 그의 눈을 열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여시자,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반면 아브람은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리따운 아내 사래로 인해 애굽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두려워했다. 이처럼 우리도 두려운 상황을 만날 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 자신의 한계 안에서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성경은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시 34:7)라고 말씀한다. 수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둘러 보호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주위에도 여호와의 천사가 둘러 진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참으로 해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람은 아내 사래가 애굽의 바로에게 끌려가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누이라고 말해 달라고 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어떻게든 지키려 한다.

야곱도 형 에서의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가로챈 일로 인해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 하자 하란에 있는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하였다. 그리고 20년 후 다시 벧엘로 돌아오는 길에 에서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형이 여전히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가족들을 앞세우고도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한 채,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축복을 받기 전까지 그는 두려움 속에서 얍복강을 건너지 못했다.

다윗 역시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그를 피해 이스라엘 경내를 떠나 도망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모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처럼 사람은 죽음 앞에서 연약할 수밖에 없다. 우리 역시 생명의 위협 앞에 서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생명이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 주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바로의 손에서, 야곱을 에서의 손에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지키신 것처럼 우리의 생명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신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사래가 사랑하는 남편 아브람을 두고 바로의 궁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참으로 슬프고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서 애굽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권세를, 바로는 그 중심에 있는 사단, 마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 점에서 사래가 바로의 궁으로 끌려 들어가는 모습은, 마치 성도가 마귀의 속임에 빠져 그 권세 아래 놓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사래가 바로의 궁에 들어갔다고 해서 아브람과의 부부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성도가 연약함 가운데 잠시 미혹되어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한 번 예수 그리스도와 맺어진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마귀의 역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분명하게 경고한다. 마귀는 잔인하며, 사람을 속여 결국 고통과 파멸로 끌고 가려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며, 마귀의 간계를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1-13)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아브람이 바로에게서 받은 재물은 아내 사래를 바로에게 넘겨준 대가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재물이 아브람에게 무슨 기쁨이 되었겠는가. 그는 오히려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마귀가 주는 부귀영화를 얻는다 해도 마음에 참된 만족이 없는 것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권세 아래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사래를 다시 되찾게 될 때에 비로소 사래와 함게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 안에서 참된 즐거움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역시 때때로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할 때가 있다. 육신의 정욕은 처음에는 달콤하게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우리 마음을 찌르고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게 될 때, 우리 안에는 하늘의 평강이 회복된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천하만국을 보여 주며 자기에게 절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눅 4:8)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기쁨과 영광은 세상이 주는 부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과 함께 겸손히 동행하는데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다윗이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그는 그 뒤를 따라가 그것을 치고 새끼를 그 입에서 건져 내었다. 어린 양이 스스로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다윗이 대신 싸워 구해 냄으로써 그 양은 사자의 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어린 양 같은 사래도 자기 힘으로는 사자 같은 바로의 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래는 그의 손아귀에서 놓임을 받게 되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6-8)

사냥꾼의 올무에 걸린 새는 올무가 끊어지지 않는 한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다. 이처럼 사람도 마귀의 올무에 걸리면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올무를 끊으시는 분이다. 우리가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마귀의 올무를 끊으셨기 때문이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숨기기도 하고,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하기도 한다. 아브람 역시 두려움 때문에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하였고, 그 결과 사래는 원치 않는 바로의 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이 연약할지라도 당신의 언약을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래를 바로의 손에서 이끌어 내셨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자 바로는 결국 사래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이는 후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할 때,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바로가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하나님은 하와를 유혹한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대로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 그 결과 마귀는 자기 권세 아래 붙들고 있던 자들을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게 되었다.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은 결국 그곳에서 떠나게 되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사람에게 잠시 안식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두려움과 근심과 고통을 안겨 준다. 아브람 역시 애굽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고, 그로 인해 큰 수치와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이는 세상이 결코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말씀한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금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결국 그것이 그의 영혼을 찌르고 괴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말씀하신다. 거룩은 단지 외적인 경건함만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여 자주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을 의지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던 것처럼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어 거룩한 길을 걷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