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제 11 장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말과 언어가 다르면 서로의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을 조율하여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품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같은 언어와 말을 사용하면 마음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연합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 중심으로, 마귀의 역사에 따라 이루어질 때 사람은 교만해지고 결국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노아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떠나 바벨탑을 쌓은 것도 바로 이러한 모습이다.

반대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연합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이러한 연합에 대해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사람들은 풍요롭고 부족함이 없는 삶을 원한다. 노아의 후손들 역시 물이 풍부한 비옥한 시날 평지를 만나자 그곳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 부족함이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되면,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을 잊거나 멸시하기 쉽다.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고 그 꼭대기에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한 일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이 지나치게 자만하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때로는 원하지 않는 형편을 허락하신다. 이는 우리를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시려는 사랑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교만하여 당신을 잊은 이스라엘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시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상황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그분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하려는 데 그 뜻이 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죽은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대상 10:13,14)

노아의 자손들 또한 사울과 같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기들의 계획을 따라 성읍과 탑을 건설하였다. 이때 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돌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들의 수고로 만든 벽돌을 사용하였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하며, 자기가 보기에 옳은 대로 행한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권면한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사람들이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 한 모습을 보면,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 세상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도 자기와 비슷할 것이라 여기며, 자기가 듣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도 듣지 못하고, 자기가 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도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하나님을 자기의 한계 안에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 10:12)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라고 권면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지극히 작은 존재를 깨닫고 자연히 겸손하게 된다. 그러나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크고 뛰어난 존재인 줄로 착각하여, 결국 교만한 마음으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6,7)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성경은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침상에서 은밀히 하는 말까지 들으시며,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마음의 중심까지도 다 아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읍과 탑을 쌓는 것을 보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쌓게 만든 그들의 교만한 마음까지 살피셨다. 그래서 친히 내려오셔서 그들의 길을 막으셨다.

하나님께서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면, 사람은 결국 스스로 파멸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던 유다 백성에게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1)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목자가 양을 인도하듯 바른 길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로 미치리로다”(시 100:5)라고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양심의 소리를 계속 무시하면 점점 무뎌지고, 마침내는 양심에 화인을 맞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죄의 유혹에 반복해서 끌려가다 보면 사람의 마음은 점점 강퍅해진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히 3:12,13)

또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엡 4:17,18)

하나님께서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삶을 경계하시는 이유는, 그러한 삶이 결국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하기 때문이다. 노아 시대에도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악하여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강퍅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물로 심판하셨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성읍과 탑을 쌓던 사람들을 막으신 것은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더욱 강퍅해져 결국 멸망에 이르는 것을 막으시려는 은혜의 개입이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같은 언어와 같은 말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놀라운 일을 보았다면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교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왔어야 했다.

그러나 신약에 이르러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오순절 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자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각기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각 나라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이들이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각각 자기의 언어로 듣고 크게 놀라며 소동이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제자들이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고 사도들의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다윗이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라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목적은 단순히 놀라움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돌이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데 있다.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하나님께서 성읍과 탑을 건설하던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온 지면에 흩으신 후, 성경은 곧바로 셈의 족보를 이어서 기록한다. 이는 세상이 아무리 흩어지고 혼란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믿음의 계보는 결코 끊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선지자 엘리야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광야로 도망하며 깊은 낙심에 빠졌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만이 홀로 남아 신앙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입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믿음을 지키는 남은 자들을 보존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셈의 족보가 이어졌듯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남겨 두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엘리야처럼 ‘나만 남았다’고 느낄 때에도,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믿음을 지키는 이들이 존재한다.

성경은 이러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성경은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다른 신들, 곧 우상을 섬겼다고 말씀한다. 데라 아래에서 태어난 아브람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환경과 영향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인간적인 조건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영향 아래 있는 세상 속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세상의 가치관과 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게 된 것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선물을 받은 사람이 그 선물을 준 이에게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시 95:1-2)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모압에 거하던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후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두 며느리의 선택이 갈린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지만, 오르바는 모압에 남았다. 이후 성경은 룻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하지만, 오르바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갈대아 우르라는 우상 숭배의 땅에서도 두 사람의 길은 나뉜다. 하란은 그곳에서 생을 마쳤고 그의 삶은 짧게 언급될 뿐이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땅을 떠났고 그의 삶은 성경 전반에 걸쳐 자세히 기록된다.

이 차이는 단순한 기록의 분량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방향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 1:6)는 말씀처럼 악인의 길은 한때 형통해 보일 수 있으나 결국 사라지고,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아시고 함께하시며 끝까지 책임지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권면한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잠언 23:17,18)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여자가 어떤 남자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방향과 운명이 크게 달라진다. 사래는 아브라함과 결혼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었지만, 밀가는 나홀과 함께 하란에 머물게 되었다.

또한 모압 여인 룻은 남편 말론이 죽은 후 보아스와 재혼하여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은혜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신부로 부름받아 그분과 한 몸이 되는 은혜를 입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기업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5,6)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된 것은 우리의 공로나 자격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연합은 우리의 연약함이나 환경으로 끊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에 영원한 감사와 평안을 누리게 된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성경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에 대하여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로 시작한다. 이는 단순한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시기 전에 사래의 불임을 언급하신 것은, 앞으로 태어날 이삭이 인간적인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주어지는 생명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창조의 역사가 흑암 속에서 시작되었듯, 우리 역시 죄로 말미암아 사망 아래 놓인 존재로 출발한다. 사래가 스스로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생명을 주셨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되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듯, 우리의 철저한 무능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온전히 나타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고 말씀한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데라는 그의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하란에 이르러 그곳에 정착하였고, 결국 그곳에서 죽었다. 데라는 자기 보기에 좋은 곳을 만나자 그곳에 머물러 버린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육신이 편안히 안식할 수 있는 형편을 만나면, 하나님의 뜻을 뒤로한 채 그 형편에 안주하기를 바란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중에도 애굽에 있을 때 값없이 먹던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기억하며 그리워했던 것을 보면, 사람이 얼마나 육신의 만족을 우선시하는지를 알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고 말씀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계획대로 살도록 그대로 두신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육신의 안일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육신의 안일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