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말라

사야서 43장 1절을 읽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선악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에게 마귀는 그들의 헐벗은 모습을 보게 한 것처럼 지금도 마귀는 여전히 우리로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때때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악한 모습이 자기에게서 나타날 때 우리는 우리에 대한 큰 실망과 함께 과연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귀에게 속아 자신의 구원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야곱에게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언니와 동생 사이였습니다.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왔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언니 레아를 시기하며 경쟁했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 30:1)라고 말을 하자 야곱이 성을 내며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 30:2)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라헬은 자기 여종 빌하를 야곱의 첩으로 주어 자식을 낳게 하여 그의 이름을 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창 30:6)라는 의미를 가진 단의 이름을 보면 라헬이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라헬을 두고 성경은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룻 4:11)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 그리고 그들의 여종인 실바와 빌하를 통해서 12명의 아들을 낳게 하셨는데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에 질투 많은 라헬도 사용해 주셨습니다.

자식들이 서로 다투고 싸우면 부모는 그것을 걱정은 하지만 그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육에 이끌리어 서로 시기하며 질투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습니다. 요셉도 그의 형들이 서로 다투기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을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충성된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자기의 아내로 취했습니다. 우리가 악하다고 하지만 이런 악을 행하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큰 악을 행하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당했지만, 그로인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오자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가자 남은 유대인들과 바나바도 베드로의 외식에 유혹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베드로를 책망하였지만, 하나님은 베드로를 외면치 않고 여전히 복음의 일에 귀하게 사용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악을 행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때때로 우리는 마귀에게 속아 악을 행하고는 자기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을까 걱정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서워 말라 하시며 당신의 약속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던 므비보셋을 사람들이 다윗에게 데려왔을 때 다윗이 그에게 처음 한 말은 “무서워 말라”(삼하 9:7)였습니다. 므비보셋은 자기 할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또한 다윗은 소경과 절뚝이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두발이 절뚝이인 그는 다윗 앞에서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그런 므비보셋에게 다윗은 자기 아버지 요나단과의 약속을 언급하면서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삼하 9:7)라는 말로 위로했습니다.

하나님은 물로써 사람들을 심판하신 후에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써 사람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으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창 9:11-16)

죄를 지은 사람이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면 물로써 심판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다가 구름 속의 무지개를 보면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악을 행한 우리가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빠질 때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여 우리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성경에는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시 139: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바다가 그 한계를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행위의 한계를 정하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악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넘어서 죄를 짓지는 못합니다. 그 말은 우리의 어떤 악함도 하나님의 허락하심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 안에서 우리가 죄를 마음껏 지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을 죄를 이미 다 아시고 구원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악함이 우리의 구원을 취소시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악을 행함으로 마귀의 정죄 속에 빠졌을 때 이 말씀 또한 우리가 마귀에게서 벗어나게 하는 큰 힘이 됩니다.

자식이 어릴 때는 고집도 세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하려고 떼를 씁니다. 그런다고 해서 부모가 아이를 싫어 버리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철이 들어가면서 변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같은 마음으로 그들을 가르치며 기다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