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위하여

사야 43장 21절부터 25절까지 읽겠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와하였으며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 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예물로 인하여 너를 수고롭게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인하여 너를 괴롭게 아니하였거늘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1-25)


부모는 자식을 낳으면 자신의 생명보다도 그를 더 사랑합니다. 자식이 하는 모든 것이 귀엽고 똥오줌을 싸도 전혀 더럽지가 않습니다. 한밤중에도 배가 고파 우는 아이를 위해 쏟아지는 잠을 이겨가며 기쁨으로 젖을 먹이며, 자식이 아프면 그보다 더 마음 아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자식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까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한 자식이 커서 자신만을 생각하고 부모를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면 부모의 마음은 서운함을 넘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 고통은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압살롬이 왕이 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피난을 갔습니다. 비록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환난을 겪지만 자기 아들에게 쫓겨 도망가는 신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어쩔 수 없이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을 때 그는 압살롬의 생명을 염려하여 전쟁에 나아가는 백성을 이끄는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삼하 18:5)라고 명령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를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켰지만 자식을 향한 다윗의 사랑은 변함이 없어서 그가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참으로 숭고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육신의 부모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때에 따라 자식을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절대 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마귀의 종이 되어 그를 음란하게 섬기는 우리를 보시고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골 1:2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원수 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배반하고 떠난 우리에게 진노하셨지만 마귀에게 속하여 고통을 당하는 우리를 보시고 심히 괴로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이 너무 커서 당신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할 중재자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와 다투어 집을 나간 자식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자식을 근심한 아버지가 누군가가 자기와 아들 사이를 중재하여 자식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해 줄 중재자가 있기를 바라셨지만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당신이 친히 당신과 우리의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사 59:16)라고 말씀합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처럼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완고한 우리에게 지셨던 것입니다. 병든 자식보다 병든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픈 것처럼 자신을 멸망으로 끌고 가고 있는 마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리를 보시고는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고통하셨습니다. 사람의 발에 가시가 박히면 고통스러워서 그것을 손으로 빼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과 우리 사이를 중재할 자로서 예수님을 세우셨습니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중재자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에 보면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 4:6)라고 말씀합니다. 중재자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만족케 하셔야 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우리 대신 받으심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셨고, 또한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우리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완벽하게 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1서 2:1,2)라고 말씀하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대언하시는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은 절대 깨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도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일을 하십니다. 자식이 행복할 때 부모도 행복한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행복할 때 행복해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많은 계명으로 짐을 지우는 불의한 분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시 68:19)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친히 담당하시는 분입니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온 땅이 빛으로 감싸져 있듯이 우리는 온통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져 있습니다. 구름이 해를 가리면 그 빛이 가리어져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고집을 버리면 말씀을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