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되신 예수님

가복음 2장 14절부터 17절까지 읽겠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4-17)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당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도에는 신분 계층이 있는데 그중에 가장 낮은 계급은 천민입니다. 그리고 그 천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은 불가촉천민인데 그들이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보다 낮은 계급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천한 종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우리를 낮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낮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무지와 교만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마음이 자기의 원래 위치에서 떠난 것을 말합니다. 사단 루시퍼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하나님과 비기려고 했습니다. 이 교만으로 인해 루시퍼는 하나님께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루시퍼와 그를 추종한 천사들을 향해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라고 말씀합니다. 사람 역시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라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자기 모습을 아는 자입니다. 우리는 천한 종의 위치로 창조되었는데 이 근본에서 떠나 자신을 높이는 것이 교만입니다.

어떤 거지가 주차장 한구석에 앉아 노트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습니다. 그를 본 주위 사람들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글만 적고 있는 그를 불쌍히 여겨 먹을 것을 갖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를 왜 거지 취급하느냐고 오히려 화를 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거지로 보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거지가 아닌 작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거지처럼 우리도 천한 자인데도 마귀에게 속아 마음이 교만하면 자신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고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비천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잉태한 후에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6-48)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렁이가 다른 지렁이를 보며 자기가 더 낫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가 볼 때 모두가 징그러운 지렁이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에 비하면 우리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천하고 천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자기 모습을 모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속에서 자신들이 세리와 죄인들보다는 낫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교만한 생각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영광스러운 식사 자리에 그들을 앉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과 함께함으로 그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그들과 멀리하여 차별을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당신을 비어 천한 인간의 모양으로 오셨기에 그들과 친구가 되실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천한 우리의 근본을 알게 되면 자신을 남보다 낫게 여기는 높아진 마음이 낮아져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될 때 그들의 친구 되시는 예수님과도 친구가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낮추시어 우리를 향해 종일토록 손을 펴고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같은 천한 자와 친구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예수님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손을 펴고 계실 때 고맙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5,1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종의 형체를 가졌던 우리가 예수님에게 나아가게 되면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인 동시에 신랑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손을 잡으시고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아 7:11-13)라고 말씀하십니다. 천한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이자 신부가 되어 하늘의 놀라운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의 천한 근본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