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린도 전서 3장 6절과 7절을 읽겠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전 3:6,7)


요한 계시록 14장에 보면 어린 양과 함께 시온산에 선 십 사만 사천이 나옵니다. 그들에 대해서 성경은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4,5)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십 사만 사천처럼 누구든지 어린 양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번은 목자가 양 떼를 이끌고 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목자 옆에는 큰 양들이 따라가고 그 뒤를 그들보다 더 작은 양들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어린 양들은 무리의 뒤쪽에서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중에 두 마리의 어린 양이 길가에 고여있는 물을 보고는 무리에서 이탈하여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양들이 목자를 따라가고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이 그 물을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목자가 뒤로 돌아보았고, 무리를 따르지 않는 두 마리의 어린 양을 보면서 그들에게 다가가 쥐고 있는 지팡이로 그들의 엉덩이를 살짝 쳤습니다. 그러자 두 마리의 양은 깜짝 놀라 급히 양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무리와 함께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길가의 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목자 곁을 묵묵히 따라가는 큰 양들도 어릴 때는 자기들이 보기에 좋은 것을 따라 행하다가 목자의 지팡이에 자주 얻어맞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를 인도하는 목자가 자기들이 보기에 좋은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언제나 인도하는 것을 자주 경험하면서 목자에 대한 신뢰가 쌓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자기들이 가장 복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기 길을 고집하는 어린 양들과는 달리 목자가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양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영적으로 어릴수록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보다는 자기의 지혜와 방법을 따라 사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형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좋은 길을 택하여 걷다가 가시에 찔려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마음을 따라 걷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고퉁스러운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따라 걷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 얼마나 안전하며 복된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며 영적으로 장성한 자로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 14:1-4)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영적으로 어리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셔서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요한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한 인물로 추정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떠날 때 함께 동행하는 은혜를 입었지만, 도중에 전도 여행을 포기하고 혼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연약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마가를 2차 전도 여행에 데려가지 않을 정도로 그를 불편하게 여겼지만, 하나님은 연약한 마가를 자라게 하셔서 바울에게 유익한 자가 되게 하셨고, 바울과 함께 로마에서 감옥에 갇히는 고난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내 아들 마가”(벧전 5:13)라고 할 정도로 마가를 복음의 귀한 일군으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 역시 그렇게 자라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서기를 좋아했고, 예수님에게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히시자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겁많은 사람이었고,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갔던 믿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큰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귀한 일군이 되어 복음의 많은 일들을 감당한 말씀들이 참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마침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를 당할 정도로 하나님께 순종한 하나님의 사도였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어린아이가 점점 자라게 되면 그의 어릴 때 행동을 유치하게 생각하며 부끄러워하듯이 우리도 영적으로 자라가면 영적으로 어릴 때 했던 말이나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영적으로 자란 만큼 말이나 행동하게 됩니다. 한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하나님이 정말 계시느냐고 물었을 때 할아버지는 나에게는 하나님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을 했는데 그 할아버지의 말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어릴 때는 막연하게만 생각되던 하나님이 영적으로 자라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뚜렷하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복음의 많은 일들을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우리의 연약하고 육신적인 모습이 나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 한 우리는 반드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지금의 모습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자란 우리를 보시며 기뻐하십니다. 미디안 사람을 두려워하여 포도즙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기드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가 “큰 용사여”(사 6:12)라고 그에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지금의 연약한 그를 보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후에 그가 나팔과 횃불만 가지고 미디안을 쳐부수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을 보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아브라함 즉, 열국의 아비라는 이름을 주실 때도 자식이 없는 현재의 아브람을 보지 않으시고, 장차 많은 자식을 가지게 될 그를 보시고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도 현재의 연약한 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으로 영적으로 장성하게 될 나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실망할 것이 없는 것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라고 성경은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는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