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제 13 장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아브람은 애굽에서 나올 때 가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단지 재물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에서도 더욱 부요해졌을 것이다.

아브람은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 전까지는 아내를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죽음의 두려움 앞에 서자,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바로의 궁으로 보내는 모습을 통해, 그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비굴한 존재인지를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비록 자신은 연약하고 비굴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지키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도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18-20)

우리 역시 때때로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악함과 이기심을 발견하고 당황할 때가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도우셨고, 시편 기자의 기도에 귀 기울이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와 인자를 베푸신다.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은 가나안에 처음 들어왔을 때 벧엘과 아이 사이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애굽에서의 실패와 고난을 겪은 뒤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동일하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처음 하나님을 부를 때와, 애굽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을 경험한 후 다시 하나님을 부를 때의 마음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사람의 마음이 고난 받기 전과 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난은 당시에는 괴롭고 견디기 힘들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 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배우게 된다. 또한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던 마음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길도 배우게 된다.

고난이 유익한 이유는 우리 영혼을 낮추고 연단하여 더욱 겸손하고 강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두 번째로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 때에는, 처음과는 다른 깊은 감사와 은혜의 마음이 그의 심령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을 것이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롯의 아버지 하란은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가진 것 없던 롯에게 아브람은 의지할 만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는 아브람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함께 머물렀고, 이후 가나안 땅에도 함께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소유가 많아지자 결국 아브람과 함께 거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역시 마음의 소유가 많아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만큼 무익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물은 빈 그릇에 담을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비워진 마음에 임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라고 말씀한다. 은과 금이 풀무불 속에서 불순물이 제거되어 순결하게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의 헛되고 불필요한 것들을 ‘고난의 풀무불’(사 48:10)로 태우시며 우리를 정결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성경은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라고 말씀한다.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던 것도 결국 각자의 욕심 때문이었다. 욕심과 욕심이 만나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구원받은 우리 안에도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함께 있어 늘 서로 싸운다. 그래서 성경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라고 말씀한다.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함께 거할 수 없었던 것처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또한 서로 함께할 수 없다. 결국 사람은 어느 한쪽을 따라 행하게 된다.

아브람에게 복된 장래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육체를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 안에서 복된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자기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각자의 소유 때문에 다투는 모습을 보며 마음에 큰 고통을 느꼈다. 그는 재물보다 화평을 더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다투지 않고 화목하기를 원하여, 조카 롯에게 좋은 것을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하였다.

성경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화평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은 아브람에게 합당하게 적용될 수 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

성경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를 내어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담을 허무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아브람이 롯을 사랑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마땅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라고 말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고 말했을 때, 롯은 요단 온 지역을 택하였다. 그가 보기에 그 땅은 물이 풍부하고 아름다우며 풍요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아름다움 뒤에 감추어진 죄악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겉으로는 에덴동산처럼 좋아 보였지만, 그 중심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롯과 달리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보신다. 특히 사람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진 것까지도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 그러므로 거짓은 언제나 추하고 두려운 모습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름답고 선하며 친절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고 경고하셨다.

롯처럼 지혜와 분별이 부족한 우리가 자신의 눈과 판단만을 의지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사람의 눈은 겉모습은 볼 수 있지만 그 속까지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고 말씀한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에 머물렀지만, 롯은 자기 보기에 좋은 곳을 따라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국은 너무나 달랐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주를 지은 노아와, 설마 홍수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노아를 비웃던 사람들의 결국이 달랐던 것과 같다.

사람이 자기 판단을 따라 행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기보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할 때 참된 복과 안전을 누릴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평안을 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계획과 욕심을 따라 행하려 할 때에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결국 우리에게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가 자기 고집대로 위험한 길로 가려 할 때, 부모가 그 손을 붙들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아이는 당장 자신이 원하는 길이 좋아 보일 수 있지만, 부모는 그 끝에 있는 위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를 아시기에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고 말씀한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아브람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롯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르는 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에게도 두 부류의 사람을 상징하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자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반면 이삭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창 21:10)고 말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일로 인해 매우 근심하였지만, 하나님은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창 21:12)고 말씀하셨다. 이는 육체로 난 자가 약속으로 난 자와 함께 기업을 얻을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자기의 육체와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 오직 인간의 노력이나 혈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0-13)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사도 바울은 육적으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참된 자손은 혈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7)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믿는 모든 자의 조상”(롬 4:11)으로 세우셨다. 이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늘나라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게 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통해,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얼마나 넓고 은혜롭게 여셨는지를 알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따라 구원하셨다면 구원을 얻을 육체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어떤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하셨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아무도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처럼 견고한 집을 짓고 살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지 거두어 옮길 수 있는 장막에 거하며 순례자의 삶을 살았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9,10)

아브람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보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장차 없어질 것들을 위해 마음과 시간과 힘을 쏟는다. 그들은 눈앞의 유익과 보이는 것에 붙들려 살아간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며, 영원한 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