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이 다 네 것

세기 45장 16절에서 20절까지 읽겠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 신복이 기뻐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비와 너희 가속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 땅 아름다운 것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비를 데려오라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하라”(창 45:16-20)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셔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그 광야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들은 한 달 치 식량을 가지고 애굽에서 나왔는데 한 달 후에는 그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들의 식량이 떨어졌을 때 그들은 그들의 배고픔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물도 없는 그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거나 그것이 자라기를 기다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낮의 강렬한 햇살과 밤의 매서운 추위를 그들은 어떻게 피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광야에서 그들이 얼마나 무능력한 자인 것을 마음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살아가면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능력 없는 자신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들과 함께 분화구가 있는 높은 산의 정상에 올라갔습니다. 그가 분화구에 내려가 고여 있는 물에 손을 씻고 있을 때 친구들이 날이 저물기 전에 산에서 내려가자고 그에게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그는 곧 따라내려 갈 테니 먼저 내려가라고 손짓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은 그를 혼자 두고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는 손을 다 씻은 후에 산에서 내려가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참 헤매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무서워졌고,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체온이 떨어져 땅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점점 의식을 잃어가고 있을 때 마침 멀리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자 살려 달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몸이 얼어 도저히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음만 내고 있었는데 마침 한 산악인이 그 소리를 듣고 그를 찾아내어 구조했습니다. 그는 구조를 받은 후에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많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엄청난 폭설이 내려 도로가 순식간에 눈으로 쌓여 차가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해 눈에 갇혀 차에서 얼어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런 죽음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무능력함과 비참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을 두고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욥 4:19)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이 이처럼 연약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한 철이나 귀한 보석으로 만들지 않고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창조하심은 사람이 자신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칠 년의 풍년 뒤에 칠 년의 흉년이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 요셉은 가나안에 있는 가족들을 자기에게로 오게 하였습니다. 만일 가족들이 곡식이 풍성한 애굽으로 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극심한 흉년 속에서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요셉이 있는 애굽에 오자 요셉과 함께 애굽의 풍성함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은 능력 없는 우리가 우리로 살지 않고 당신에게로 와서 당신의 것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혜가 없을지라도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어 주시고,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을지라도 예수님이 우리의 능력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능력 없는 자로 만드셔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하여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를 보면 큰아들이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라고 불평하자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1,32)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된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이 다 우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모든 것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마귀 루시퍼에게 많은 능력을 주셨는데 그는 자기에게 입혀진 능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하나님과 비기려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연약하게 만들지 않고 마귀처럼 많은 능력을 주셨다면 우리 역시 마귀처럼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풍성한 것으로 살지 않고 우리의 능력 안에서만 살려고 했을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은 어리석어서 자기 능력 없음을 문제 삼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은혜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보고 제자들이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 9:2)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소경으로 나게 하신 것은 당신의 능력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하셔서 그 사람으로 능력의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하나님의 것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왕은 모든 것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기 것이 아닌 왕이 준비한 것을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능력 없는 우리가 당신 안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시 4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