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가복음 10장 29절부터 37절까지 읽겠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29-37)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 사자의 명을 따라 빌립이 그에게 왔을 때 그는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라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행 8:34)라고 물었습니다. 만일 이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게 되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분은 예수님이 아닌 이사야가 되어 버립니다. 이처럼 성경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다른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율법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 10:27)는 말씀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여기서 말하는 이웃을 자기 주위 사람으로 잘못 해석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참 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은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 35:6-8)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위 사람에게 죄를 범하면 그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이며, 주위 사람을 사랑하거나 돕는다면 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님과 상관된 것들이 아니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라고 물었습니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을 했고,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예수님에게 묻자 예수님은 그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오늘 읽었던 말씀인 강도 만난 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를 보고 그냥 지나쳐 버렸지만, 여행 중이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어셨고, 그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의 이웃은 율법사가 말한 것처럼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이겠습니까. 율법에서 말하는 우리의 이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이웃이 아닌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사람이 그를 살려준 사마리아인을 사랑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사실 같은 것으로서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나의 이웃이 됩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예수님과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행한 것이 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양과 염소를 심판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 무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의인들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 25:37-29)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마땅히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버리고 마귀를 섬김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이유도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할 율법의 진노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로 돌아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고 말씀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율법의 완성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마음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