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회개

‘죄를 짓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두 단어가 있다. 하나는 ‘하타(חָטָא, ḥāṭāʾ)’​이고, 다른 하나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 hamartia)’​이다. ‘하타’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단어이며, ‘하마르티아’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단어이다. 두 단어 모두 본래 ‘목표를 빗나가다’, ‘과녁을 맞히지 못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기준과 목적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만일 죄를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 상태’라고 한다면, 과녁에 무엇을 놓느냐에 따라 죄의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다양한 관점에서 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과녁에 하나님의 율법을 놓아 보자. 율법을 어기는 것은 과녁을 빗나가는 것이므로 죄가 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여기서 말하는 ‘불법’은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에는 과녁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 보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하셨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죄가 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9)

또한 과녁에 하나님의 말씀을 놓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 역시 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롬 14:23)

이처럼 성경은 죄를 여러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회개란 빗나간 화살이 다시 과녁을 정확히 향하도록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죄는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한 형벌이다. 그러므로 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 반복해서 회개하는 것은 십자가의 완전한 속죄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이 일평생에 반드시 한 번은 회개해야 하는 죄가 있으니,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던 데서 돌이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사람이 이 회개를 하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된다.

또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이후에도 회개해야 할 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을 어긴 죄와는 구별되는 문제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말씀을 떠나 자기 생각과 육체를 따라 살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돌이켜야 한다.

정리하면, 율법을 어긴 죄로 인해 여전히 정죄하며 계속 회개한다면, 이는 오히려 십자가에서 율법을 어긴 모든 죄의 저주를 우리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짓는 셈이 된다. 사람이 죽어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 죄는 바로 이 죄,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이다.

그래서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그 죄,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에게 회개가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어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회개해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이나 육체를 따라 행하면 구원이 취소되거나 영원한 멸망에 이르지는 않지만, 고통이 따르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믿음과 행함

사람의 행동은 마음의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마치 운전자에 따라 자동차가 달리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같은 자동차라도 성격이 차분한 사람이 운전하면 안정적으로 달리지만, 성격이 급한 사람이 운전하면 난폭하게 달린다. 그래서 자동차가 달리는 모습을 보면 운전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처음 사람에게는 죄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정결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으로 죄를 범하게 되었고, 그 결과 마음이 더러워져 온갖 악을 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하나님을 떠나 마귀에게 속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악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새 마음을 주셔야 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며 새 마음과 성령을 주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삭개오는 이러한 변화의 좋은 예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리로서 죄악된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그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8-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구원을 선언하신 것은 단순히 그가 선하게 살아 보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삶 속에 새 마음이 역사하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시므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새가 새처럼 살려고 애쓰지 않아도 새답게 살고, 돼지가 돼지처럼 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지답게 사는 것과 같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랑한다. 솔로몬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을 재판할 때 아이를 둘로 나누라고 명한 것도 진짜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라도 아이를 살리려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동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믿음 역시 행함을 통해 알 수 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는 말씀처럼 믿음과 행함은 서로 연결되어 함께 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 그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히 11:18)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기 때문이다.

기생 라합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온 두 이스라엘 정탐꾼을 지붕 위 삼대 사이에 숨겨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그들을 성 밖으로 피신시켰다. 그녀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전쟁의 결과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에게 이 땅을 주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탐꾼들에게 이렇게 고백하였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9-11)

이처럼 마음은 감출 수 있어도 결국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믿음은 반드시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 7:16-17)

사도 바울도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고 권면하였다. 사람은 마음에 믿는 대로 살아가며, 그 믿음은 반드시 삶의 열매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알고 싶다면 자신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행함은 그 사람의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한 문장만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은 세상에 없다. 이 말씀에는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지니신 창조주 하나님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가운데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일부분만 살펴보아도 그 장엄함과 섬세함에 압도되어 정신을 잃을 정도인데, 하물며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는 얼마나 더 크고 놀랍겠는가.

이처럼 지극히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없는 존재와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입을 가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다윗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3-4)라고 고백하였다. 이보다 더 합당하고 정당한 고백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 놀라운 세계를 펼쳐 놓으신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을 경외하며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 본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 곧 우리의 주인이시라 부르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땅의 처음 모습은 어두움이었다. 그래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였다. 그러나 바로 그 상태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무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곧 빛이 있었고, 어두움은 즉시 물러갔다. 그로 인해 땅은 더 이상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지 않고, 빛 가운데서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

땅은 우리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 마음도 본래 어두움의 권세 아래 있었다. 그래서 혼돈과 공허 가운데 살아가며, 어두움 속에서 고통하고 신음했지만 그 권세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마침내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자 어두움은 물러가고,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빛으로 환하게 밝아져 기쁨과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낮과 밤은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자연적인 낮과 밤과는 다르다. 이때는 아직 하나님이 해와 달을 만드시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5)고 말씀하며, 예수님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곧 빛이시요, 낮이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두움은 빛이 없는 상태, 곧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를 말하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가리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도 바울에게 하신 말씀에 이것이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행 26:17-18)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낮과 밤을 비유로 삼으사,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 가운데 행할 것을 권면하셨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 11:9-10)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람과 짐승을 지으시기 전에, 그들이 살아갈 하늘을 먼저 만드셨다. 이는 마치 아이를 잉태한 여인이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과 같다.

모세가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한 말씀에는,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 1:33)

또한 성경은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 12:14)라고 말씀하며, 예수님도 이렇게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하나님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십 년 동안 앞서 행하시며 도우셔서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행하시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 이로써 과거에도, 현재에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물이 땅을 덮고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은 땅에 아무 일도 행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땅에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땅을 덮고 있던 물을 걷어 내셔야 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생각들을 걷어 내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마귀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생각을 심어 놓았다. 우리 마음이 어두웠던 것은 우리를 힘들게 했던 여러 형편들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마귀가 심어 놓은 그 생각들이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라고 말씀한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좋은 땅이란,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드는 생각들이 제거된 깨끗한 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복음이 온전히 심겨지고 임하게 하시기 위해, 먼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물이 걷힌 땅에는 아직 어떤 생명도 없었다. 오직 메마르고 황량한 땅뿐이었다. 그러나 그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은 땅으로 하여금 풀과 각종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내게 하였고, 삭막했던 땅은 아름다움과 풍성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 35:1-2)

땅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자 메마른 땅에서 생명이 솟아났고, 황량한 곳은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되었다. 하나님은 그 변화를 통해 자신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내셨다.

우리의 마음도 본래 죄로 인해 생명이 없고 소망이 없는 메마른 광야와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마음에 말씀을 보내 주셨다. 그 말씀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 결과 메마른 심령에는 생명의 샘이 흐르고, 절망 가운데 있던 영혼은 소망을 얻으며, 하나님이 이루신 아름다운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찬양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메마름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시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며, 죽은 자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나는 착하게 살았단 말이예요

한 사람이 자신이 모시던 상사의 범죄로 인해 검사실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죄목이 자신에게도 적용되자 그는 크게 억울해했다. 자기는 상사가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인데 상사의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나는 착하게 살았단 말이에요!”라고 흐느끼며 호소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사람은 누구의 음성에 순종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종이 된다. 아무리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음성에 순종했다면 그는 결국 마귀에게 속한 자이며, 마귀가 받는 심판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느냐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소속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 5:19)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만 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다. 반면 세상의 권세 잡은 자인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그의 음성에 순종한다. 순종은 그 사람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증거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에 사람이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성실하고 충성되게 살았는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보신다.

우리 역시 본래는 마귀의 권세 아래 속해 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었다. 성경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3)

구원은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것만이 아니다. 소속이 바뀌는 것이다. 흑암의 권세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지고, 마귀의 소유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스탑엔고 시스템

자동차가 신호등 앞에서 정차하면 자동으로 시동이 꺼지고, 출발할 때 다시 시동이 켜지는 기능을 ‘스탑앤고(Stop & Go)’ 또는 ‘ISG(Idle Stop & Go)’ 시스템이라고 한다. 이 기능은 불필요한 공회전을 줄여 연료를 절약하고, 배기가스를 감소시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기능이 없는 자동차만 운전해 온 사람은 신호등 앞에 멈춰 있던 옆 차에서 시동이 켜지는 소리를 들으면, 운전자가 직접 시동을 건 것이라고 생각하지 자동차가 스스로 시동을 다시 걸었다고는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스탑앤고’ 기능이 있는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게 되면, 주변에도 같은 기능을 가진 차량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놀라게 된다. 그동안 그런 자동차들이 곁에 있었지만, 자신이 그 기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영적인 세계도 이와 같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를 지을 때마다 정죄와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게 되면 죄에서 해방된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 안에서 감사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편 34:8)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과 아직 맛보지 못한 사람은 살아가는 마음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리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 가운데 살아간다. 그 세계는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한 번 맛보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은혜의 세계이다.

성격 테스트

많은 사람이 함께 성격 테스트를 해 보면,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생각이 놀라울 만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어떤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고 여기지만, 결과를 보면 예상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기준이 다른 사람에게도 반드시 옳은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의 판단 기준은 경험과 환경,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며,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조차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인간의 기준은 변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옳음을 내려놓고, 항상 옳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기준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스스로를 높이던 사람들을 향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 10:12))라고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헤아리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는 말씀처럼 자신의 죄성과 부패함을 보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서 더 이상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없고, 입을 가릴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렇게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본 사람이 구원자가 필요함을 깨닫고, 마침내 그분을 찾고 만나게 된다.

절름발이 강아지

한 강아지가 태어날 때부터 다리 하나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그래서 그 강아지는 늘 절뚝이며 걷고 뛰어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강아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강아지를 불쌍히 여겨 집으로 데려와 키우게 되었다. 그는 강아지가 절뚝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다리의 장애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때는 우리가 경건하고 의로웠을 때가 아니라, 아직 죄인이었을 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있을 때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악함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꾸거나 끊을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다시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미운 오리 새끼

미운 오리 새끼가 다른 오리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은 단지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싫어하는 것 또한 서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미운 오리 새끼가 사실은 아름다운 백조였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지만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므로 고난과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에게 성경은 이렇게 위로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