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한 문장만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은 세상에 없다. 이 말씀에는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지니신 창조주 하나님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가운데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일부분만 살펴보아도 그 장엄함과 섬세함에 압도되어 정신을 잃을 정도인데, 하물며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는 얼마나 더 크고 놀랍겠는가.

이처럼 지극히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없는 존재와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입을 가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다윗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3-4)라고 고백하였다. 이보다 더 합당하고 정당한 고백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 놀라운 세계를 펼쳐 놓으신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을 경외하며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 본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 곧 우리의 주인이시라 부르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땅의 처음 모습은 어두움이었다. 그래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였다. 그러나 바로 그 상태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무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곧 빛이 있었고, 어두움은 즉시 물러갔다. 그로 인해 땅은 더 이상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지 않고, 빛 가운데서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

땅은 우리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 마음도 본래 어두움의 권세 아래 있었다. 그래서 혼돈과 공허 가운데 살아가며, 어두움 속에서 고통하고 신음했지만 그 권세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마침내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자 어두움은 물러가고,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빛으로 환하게 밝아져 기쁨과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나는 착하게 살았단 말이예요

한 사람이 자신이 모시던 상사의 범죄로 인해 검사실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죄목이 자신에게도 적용되자 그는 크게 억울해했다. 자기는 상사가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인데 상사의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나는 착하게 살았단 말이에요!”라고 흐느끼며 호소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사람은 누구의 음성에 순종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종이 된다. 아무리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음성에 순종했다면 그는 결국 마귀에게 속한 자이며, 마귀가 받는 심판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느냐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소속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 5:19)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만 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다. 반면 세상의 권세 잡은 자인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그의 음성에 순종한다. 순종은 그 사람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증거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에 사람이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성실하고 충성되게 살았는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보신다.

우리 역시 본래는 마귀의 권세 아래 속해 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었다. 성경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3)

구원은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것만이 아니다. 소속이 바뀌는 것이다. 흑암의 권세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지고, 마귀의 소유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스탑엔고 시스템

자동차가 신호등 앞에서 정차하면 자동으로 시동이 꺼지고, 출발할 때 다시 시동이 켜지는 기능을 ‘스탑앤고(Stop & Go)’ 또는 ‘ISG(Idle Stop & Go)’ 시스템이라고 한다. 이 기능은 불필요한 공회전을 줄여 연료를 절약하고, 배기가스를 감소시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기능이 없는 자동차만 운전해 온 사람은 신호등 앞에 멈춰 있던 옆 차에서 시동이 켜지는 소리를 들으면, 운전자가 직접 시동을 건 것이라고 생각하지 자동차가 스스로 시동을 다시 걸었다고는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스탑앤고’ 기능이 있는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게 되면, 주변에도 같은 기능을 가진 차량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놀라게 된다. 그동안 그런 자동차들이 곁에 있었지만, 자신이 그 기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영적인 세계도 이와 같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를 지을 때마다 정죄와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게 되면 죄에서 해방된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 안에서 감사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편 34:8)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과 아직 맛보지 못한 사람은 살아가는 마음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리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 가운데 살아간다. 그 세계는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한 번 맛보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은혜의 세계이다.

성격 테스트

많은 사람이 함께 성격 테스트를 해 보면,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생각이 놀라울 만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어떤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고 여기지만, 결과를 보면 예상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기준이 다른 사람에게도 반드시 옳은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의 판단 기준은 경험과 환경,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며,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조차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인간의 기준은 변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옳음을 내려놓고, 항상 옳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기준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스스로를 높이던 사람들을 향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 10:12))라고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헤아리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는 말씀처럼 자신의 죄성과 부패함을 보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서 더 이상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없고, 입을 가릴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렇게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본 사람이 구원자가 필요함을 깨닫고, 마침내 그분을 찾고 만나게 된다.

절름발이 강아지

한 강아지가 태어날 때부터 다리 하나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그래서 그 강아지는 늘 절뚝이며 걷고 뛰어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강아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강아지를 불쌍히 여겨 집으로 데려와 키우게 되었다. 그는 강아지가 절뚝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다리의 장애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때는 우리가 경건하고 의로웠을 때가 아니라, 아직 죄인이었을 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있을 때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악함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꾸거나 끊을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다시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미운 오리 새끼

미운 오리 새끼가 다른 오리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은 단지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싫어하는 것 또한 서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미운 오리 새끼가 사실은 아름다운 백조였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지만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므로 고난과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에게 성경은 이렇게 위로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이

수용소 안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수용소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수용소 밖의 세상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자신이 보고 경험한 세계가 전부인 줄 안다. 그러나 어느 날 수용소 밖에서 온 사람이 바깥세상을 이야기해 준다면, 비로소 자신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도 이와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자신이 경험한 삶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먼저 구원받은 사람이 복음을 전해 줄 때, 그제야 복음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3–15)

무료 라면

한 아프리카 자원봉사자가 자신이 봉사하던 마을 사람들에게 라면의 맛을 소개해 주고 싶었다. 그는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주겠다”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더 이상 올 사람이 없자 그는 큰 솥에 라면을 한꺼번에 끓였다. 그리고 그곳에 온 모든 사람에게 라면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하시며 천국을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한 임금에 비유하셨다. 임금은 혼인 잔치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한 뒤 사람들을 초청했다.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저마다 핑계를 대며 오지 않았다. 그러자 임금은 종들에게 “네거리 길에 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명했다. 종들이 길로 나가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마침내 혼인 잔치에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자원봉사자가 준비한 라면을 맛볼 수 있었던 사람은 그의 초청에 응한 사람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임금이 베푼 혼인 잔치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도 임금의 초청에 응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천국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에게나 천국의 초청을 베푸신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9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인 잔치 비유를 마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