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을 히브리어의 의미를 살려 표현하면 “복되도다, 그 사람은!”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감탄과 선언에 가깝다.
히브리어 ‘바라크’는 ‘축복하다, 복을 주다’라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인 반면, 여기에서 사용된 ‘아쉬레이’는 어떤 사람이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상태에 있음을 선언하는 표현이다. 시편 1편은 바로 이 ‘아쉬레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우리는 본래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았던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삶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인 것은 단순히 세상에서 좋은 것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1:3)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 나무가 끊임없이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시냇가에 심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심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툴’인데, 누군가에 의해 그곳에 심겨진 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나무가 스스로 시냇가로 간 것이 아니라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에 심겨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심겨졌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영적인 기갈 가운데 있던 우리를 하나님은 은혜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공급받는다. 그러므로 어려움과 시련이 찾아와도 우리의 영혼이 완전히 메마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된다.
시편 92편 12절부터 14절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1:4-5)
의인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된다면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에 비유된다. 의인의 마음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지만 악인에게는 그 뿌리가 없다. 그래서 바람이 불 때 그를 붙잡아 줄 말씀이 없기에 바람이 부는 대로 날려 다닐 수밖에 없다.
곡식을 타작한 다음 키질을 하거나 공중으로 던지면 무거운 알곡은 아래로 떨어지지만 가벼운 겨는 바람에 날아간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타작마당의 모습을 비유로 들어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자기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지금 이 세상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키질할 때 바람이 불면 알곡과 겨가 분리되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에는 의인과 악인이 영원히 분리된다. 지금은 악인이 형통하고 견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들의 마지막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아삽은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다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그들의 종말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시 73:1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