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제 9 장



하나님이 노아와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에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은 언제나 유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도록 예정하셨다. 변개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아무도 바꿀 수 없기에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은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보장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약속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홍수 심판 이후 하나님은 모든 동물을 사람의 손에 맡기셨고, 그 결과 동물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되었다.

처음 하나님께서 짐승을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풀을 먹으며 살았다. 사자 역시 풀을 먹었고, 짐승들은 서로를 해하지 않았으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평화로웠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가 깨어지고 동물들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인간의 범죄 이후의 일이다. 이로써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 변화가 인간의 죄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 또한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죄를 범한 이후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고, 그 결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성경은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사 11:6-7)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처럼, 짐승들이 다시 화목하게 되고 더 이상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회복은 예수님 안에서 가능해진다. 인간 역시 범죄 이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졌던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다시 회복하시는 분이다.


“모든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생명 되는 피째 먹지 것이니라.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모든 산 동물을 먹을 것으로 허락하셨다. 그러나 피째 먹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생명 되는 피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피에 주목하도록 하셨다. 이는 장차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신 것이다.

성경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라고 말씀한다.

이처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며, 그 피가 죄를 속하므로 인간의 죄는 생명으로 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라고 증거한다.

그러나 율법에 따라 속죄 제물로 드려진 동물의 피는 장차 지을 죄까지 온전히 씻을 능력이 없었기에, 사람을 완전하고 영원하게 거룩하게 하지 못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이미 지은 죄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 정결하게 할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히 9:12)를 이루셨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다는 것은 곧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면, 그 생명을 반드시 요구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그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셨는데 만일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도 예수님을 거부하면 예수님의 피흘림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일 3:15)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을 멸시하는 자는 손에 피가 가득한  살인자에 해당한다.  

비록 직접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그 생명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며, 그 결과는 성경이 말하는 ‘둘째 사망’, 곧 영원한 멸망이다.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모든 생물 너희와 함께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노아와 그의 가족 외에 모든 사람이 홍수로 멸망을 당한 것은 그들의 악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물로써 다시는 그들을 멸하지 않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아의 후손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을 따르는 영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홍수로 멸망을 당한 사람들 못지않게 악을 행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이 물로 멸망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죄가 많기 때문에 지옥에 갈까 두려워하지만, 사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사람은 그 약속 안에서 안식하게 된다.

또한 아브라함은 백 세가 되어 자신의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과 같음을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 약속을 믿었기에 자식이 없음으로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불행한 것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의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을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 언약의 증거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다. 혹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잊는다 할지라도, 하늘에 나타난 무지개를 볼 때마다 그 언약을 다시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약속과 그 증거가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안전과 확신이 된다.

유다에게는 엘과 오난과 셀라, 세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엘과 오난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함으로 죽고 셀라만 남게 되었다. 엘의 아내였던 다말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계보 안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유다는 셀라를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 이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동침하게 된다.

그때 다말은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창 38:16)라고 물었고, 유다는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고 약속했다. 다말은 그 약속의 담보로 유다의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요구했고, 유다는 그것들을 주었다. 이 담보물은 유다의 약속에 대한 보증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는 언약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확실한 증거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러므로 마귀가 우리를 정죄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게 된다. 그 약속으로 인해 우리는 마귀의 정죄에서 벗어나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된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때로 그 약속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절대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시기에, 우리가 죄로 인해 심판을 두려워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구름 속의 무지개를 바라보시듯,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우리를 대하시며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다. 구름은 심판을 상징하지만, 그 속에 있는 무지개는 언약과 은혜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심판의 구름이 몰려올 때마다 하나님은 언약의 무지개를 보이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안위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기에, 결코 폐하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기만 하면, 그 약속이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여 우리를 평강 가운데로 인도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땅에 퍼지니라

노아와 그의 아들들의 새로운 삶의 시작은 아담의 시작과는 다르다. 아담은 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으나 결국 타락하였고, 노아의 아들들은 이미 죄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도 처음에는 죄 가운데서 시작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또한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물의 심판 이후,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리라”(눅 1:74,75)는 말씀이 우리에게 성취되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은 노아조차도 인간의 연약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 아버지를 대하는 세 아들의 태도는 서로 달랐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지 않으려 얼굴을 돌리고 옷으로 그의 하체를 덮어 주었지만,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에 나가 형제들에게 알렸다.

함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아버지와 자신은 다르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성경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고 말씀한다.

또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하려 돌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행위로 완전한 자는 아무도 없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기에 성경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고 권면한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경외하지 않는 자의 결국은 참으로 다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함은 그 결과로 그의 후손인 가나안까지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는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 셈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은혜를 입었고, 야벳은 창대하게 되어 셈의 장막에 거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악한 일에 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악을 행하는 데 담대하다”(전 8:11)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 마음을 따라 악을 행하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위선을 행하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던 이유도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보며 근신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주목하시고, 그들과 친밀히 교제하시며 그의 언약을 나타내신다.

또한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신다”(시 34:7)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토록 함께한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만일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과 함께 물로 멸망을 당했다면, 그에게 주어진 삼백오십 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그의 날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다. 그가 살아난 이후에 누렸던 모든 시간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 시간이었다.

우리 역시 아담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지 않으셨다면,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시간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당연한 일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