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은 말에서 우리는 뱀의 간교함을 볼 수 있다. 뱀은 이 질문을 통해 여자의 시선을 ‘모든 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금하신 한 가지 실과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는 먹도록 허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못하게 하셨는지에 대해 여자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여자가 그 주제를 가지고 뱀과 대화를 나누도록 유도하였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같은 방식이 사용되었다.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6)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으며, 그 말씀을 이용해 예수님까지 유혹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오늘날 우리를 유혹하지 않을 리 없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는 순간, 말씀이 변질되고 말았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말씀이 변질되면, 그 틈을 타 사람을 속이고 유혹한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8-11)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먹으면 죽을 수도 있고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자, 마귀는 그 틈을 타 하와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유도해 갔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사람이 선악을 알지 못하게 하신 이유를,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지 못하도록 부족한 위치에 묶어 두고 그들 위에 군림하려는 불의한 의도로 왜곡시켰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람을 연약하고 부족하게 만들어 놓고 그들 위에 군림하며 섬김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 또 사람이 잘못하면 심판만 하시는 불의한 분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라고 말씀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마귀에게 속임을 받자, 본래는 자기를 죽게 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오히려 탐스럽게 보였던 것처럼, 사람이 마귀에게 속으면 자기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조차 좋게 여기게 된다.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고 말씀한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은 사람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 기쁘고 행복한 삶인 것처럼 착각하며, 다른 사람들 또한 자기와 같은 방식으로 살기를 원한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선과 악을 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항상 헐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 샤워를 하거나 공중 목욕탕에 있을 때는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옷을 입고 있는 장소에서 혼자만 옷을 입지 않았다면 우리는 극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되었을 당시, 세상에는 그들 둘밖에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몸을 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는 사실은, 이전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의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다름’을 보게 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마귀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정죄하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을 떠나게 만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우리를 속이려 한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그러나 바람이 불자 그 잎들은 흔들렸고, 그들의 몸을 충분히 가려 주지 못했다. 그때 하나님의 소리를 들은 그들은 감히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사람은 흠이 없는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 보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사 59:6)라고 말씀한다. 바람이 불면 무화과잎이 흔들려 속살이 드러나듯,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형편을 만나면 사람 안에 숨겨진 악함은 결국 드러나고 만다.
사람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이유는 자신의 악함을 완전히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악함을 온전히 가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뿐이다. 하나님은 장차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것을 아시고,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고 미리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을 모르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리는 없다. 이 질문은 아담의 위치를 묻는 말씀이 아니라, 그가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숨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물음이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아담의 몸의 위치가 아니라 마음의 위치를 물으신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했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이요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피해 숨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0:12)고 말씀한다. 비록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여전히 믿었더라면 하나님을 피해 숨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도록 끊임없이 미혹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를 의지한 채 하나님을 피해 숨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물으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자신의 헐벗었음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동물들이 벗은 채로 살아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문제되지 않던 것이 갑자기 문제가 되어 두려움이 되었다면, 그것은 마귀의 역사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통해 두려움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당신의 피로 씻어 용서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죄로 인해 두려워한다면, 그 두려움은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
마귀가 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뿐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죄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마귀가 주는 두려움에서도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하나님께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헐벗은 상태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마귀는 헐벗은 아담에게 하나님과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고, 그 극심한 부끄러움은 두려움을 낳았다. 그러나 아담이 느낀 두려움의 근원은 단순히 헐벗음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일에 대해 마귀가 선악의 법으로 그를 정죄했기 때문이다.
만일 아담이 마귀의 정죄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더라면, 그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했고, 그 결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는 처지가 되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지 못한 채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헐벗은 몸을 가리는 데에만 몰두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마귀는 오늘날에도 선악의 법으로 하나님처럼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며, 그들을 두려움 속에 가둔다. 많은 사람들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가리려 애쓴다. 그러나 시선이 자기 자신을 가리는 데에 머무는 동안에는, 십자가에서 자기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다.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스스로 가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때에야 비로소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 그때 사람은 죽기까지 자신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하와를 가리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라고 말할 만큼 그녀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아내를 감싸거나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사실대로 직고하는 모습을 보인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1,12).
사람은 때로 자기만 아는 죄는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을 사실대로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정죄받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이렇게 증언하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는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8-20)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한다.
이 고백처럼 우리 속에 죄가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혹을 받지도, 죄를 짓지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뱀이 하와를 꾀지 않았다면 하와가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온전히 이기지 못하듯, 하와 역시 죄의 주체인 뱀을 이기지 못함으로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는 말씀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연약함 위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참된 소망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범인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 범인은 바로 뱀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셨다. 하나님은 뱀에게 배로 다니게 하시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게 하셨다.
뱀이 흙을 먹는다는 말씀은,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육체를 대상으로 삼아 살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마귀는 사람 속에 육신의 정욕을 일으켜 인간을 유혹한다.
그래서 성경은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10-12)고 말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말씀을 믿는 믿음을 주셔서 마귀의 유혹을 이기게 하신다.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고 증거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의미한다. 뱀과 여자가 서로 원수가 된 것처럼, 예수님 또한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마귀와 원수가 되셨다.
마귀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통해 원수 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사건으로 인해 마귀는 예수님에 의해 머리가 상하게 되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자신이 승리한 듯 보였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때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 역시 생명을 얻어 예수님과 함께 살아나게 되었다. 그 결과 사망은 더 이상 예수님과 그 안에 있는 우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사람을 죽이는 독을 지닌 뱀의 머리는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짓밟힌 것이다. 성경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라고 증언한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큰 악을 행함으로써 여호와의 원수들에게 크게 비방할 거리를 주었다. 그 죄의 결과로 다윗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이 하와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은 여자가 많은 수고와 고통 가운데서 자녀를 낳게 하셨다. 이 고통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보여 주시는 깊은 표징이기도 하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산모의 해산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지만, 특히 어머니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녀를 낳았기에 그 사랑이 더욱 깊고 특별하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의 말할 수 없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자녀로 얻으셨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깊고 각별하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은 저주를 받았다. 땅이 저주를 받자, 원래 없던 상대를 찌르는 가시를 가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왔다.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육신 또한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결과 인간의 육신에서는 악한 것들이 나오게 되었고, 사도 바울 역시 이를 깨닫고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라고 고백하였다.
저주받은 육체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기에, 우리가 행한 것으로는 우리 자신을 가릴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받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말 1:8)라고 책망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도록 길을 여셨다. 이에 성경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라고 증언한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인간이 평생 얼굴에 땀을 흘리며 쌓아 올린 수고와 노력의 최종 결과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이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죽음으로 귀결되기에,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한다.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사람이 죽음 앞에 설 때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평생 짊어지고 살아온 수고와 슬픔뿐이다. 인간의 노력은 생명을 낳지 못하고, 그 끝은 허무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오직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달랐다. 그분도 육체를 입고 이 땅에서 수고하셨으나, 그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바라보며 이렇게 증언한다.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행 2:31).
비록 예수님도 인간과 같이 육체를 입으셨지만, 그분의 수고와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인간의 수고가 죽음으로 끝난다면, 그리스도의 수고는 죽은 자를 살리고, 믿는 자로 하여금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게 한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떠남으로써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그의 아내를 ‘생명’이라는 뜻을 가진 ‘하와’라 부른 이유는, 장차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미리 보고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말씀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었고, 그 믿음 안에서 그는 죽어 있는 아내가 아니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될 아내를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었고, 그 결과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롬 4:16)이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하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영생을 얻고 살아나는 모든 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벗은 몸을 부끄러움으로 느끼게 된 이상, 그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몸을 가리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의 몸을 온전하게 가릴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의 몸을 완전하게 가릴 수 있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 가죽옷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생명의 죽음이 필요했는데, 이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예표였다.
우리 또한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죄로 인해 생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다른 어떤 방법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는 길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죄와 부끄러움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되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한 가죽옷도, 우리의 죄를 위한 예수님도, 모두 우리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이다. 한겨울 매서운 바람 속에서 갈 곳 없이 떨고 있는 아이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덮어 주는 마음씨 착한 어른처럼, 예수님은 죄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품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한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하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가 아니라, 선악의 판단 아래서 스스로를 정죄하며 영원히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이유다. 죄는 사람을 생명에서 분리시키고, 끝없는 정죄와 고통 속에 가두어 버린다.
아담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가 그런 영원한 고통 속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단순한 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베푸신 은혜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참된 영생을 얻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영생은 죄 가운데 있는 상태에서 주어질 수 없다. 먼저 죄를 씻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셔야 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 그 생명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정죄와 두려움 속에 살지 않고, 참된 영생을 누리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고,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셨다. 그러나 땅은 스스로 아무것도 낼 수 없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아담이 자신의 능력이나 수고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자임을 알게 하셨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는 말씀처럼,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아담은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크며 절대적인지를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은혜 없이도 자기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안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도, 스스로를 의롭게 할 만한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기뻐하게 된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이는 죄 있는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모습은 성전의 지성소를 휘장으로 가려 두신 것과 같다. 지성소를 휘장으로 막으신 이유는 죄 있는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죄를 지닌 채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성경은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7,38)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다.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기에, 더 이상 휘장이 지성소를 가릴 이유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하늘 성소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히 10:20)을 우리 앞에 열어 놓으셨다. 그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계 2:7)를 먹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