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성경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쫓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육신의 정욕을 일으켜 그것을 따라 행하도록 유혹한다. 실제로 사람의 수가 땅 위에서 번성하기 시작할 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대로 아내를 삼았던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약 4:17)라는 말씀처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말했는데 그는 자신의 계획과 욕망을 날마다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단순히 인간의 몸을 가리키기보다는, 죄로 인해 부패한 인간의 내적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기에, 그러한 타락한 인간과는 함께하실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말씀하셨다.
“거기 죄인 전혀 없으니 거룩한 자 뿐이라 주님 주신 면류관 쓰고 거룩한 길 다니리”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천국은 오직 거룩한 자만이 거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다.
성경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바로 우리의 죄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장벽을 제거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담을 허무셨는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3,14)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 형제였지만, 그들이 추구한 바는 전혀 달랐다. 에서는 들사람이었고 능숙한 사냥꾼이었는데, 이는 힘과 생존 능력을 갖춘 세상의 강한 자, 곧 네피림과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당장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눈앞의 아름다움을 좇다가 영적 정체성을 버린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반면 야곱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여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자 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잇는 통로로서 장자의 명분을 귀히 여겼고, 그것을 얻기를 간절히 원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하시도록 환도뼈가 어긋날 때까지 하나님과 씨름하며 매달렸다.
영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축복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적인 권력과 부와 명예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육신적인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한 분만을 얻기를 사모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1,12)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직전,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전혀 없었고, 그들의 내면은 악으로 충만하여 그 악을 따라 살아갔다. “그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단순히 죄가 많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선을 넘어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말세에도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 나타난다고 성경은 경고한다. 그들은 영적인 문둥병자와 같아서 죄를 지어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반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범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에베소서 4장 19절은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말씀하는데 노아 홍수 직전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했다.
고장 난 물건은 고칠 수 있으면 고쳐 쓰지만, 전혀 수리할 수 없으면 버릴 수밖에 없다. 그 당시 사람들의 악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서 너무도 멀리 벗어나 있었다.
사람이 죄를 감각하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죄를 지어도 아프지 않고, 두려움이 없으며, 돌이킬 마음조차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저주이다. 반대로, 죄를 짓고 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은 양심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이 여전히 열려 있다는 신호이다. 그런 사람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회개에 이를 수 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보시고 한탄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단순히 자신의 일방적인 뜻에 따라 인도하셨다면, 인간의 선택 때문에 한탄하시거나 심판하실 근거가 전혀 없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한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억지로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강제로 인도하셨다면, 인간의 행위에 근거해 근심하거나 한탄하실 이유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한탄하셨다는 사실은 인간의 행위가 실제로 악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서 자유의지는 행사한다는 것은 어떤 유익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올바른 길을 선택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셔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으로 소경인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보여 주신 사랑을 통해 인간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이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는 믿지 않는 죄로 인해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물로 멸망한 것도 같은 원리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마귀의 유혹에 따라 육신의 욕심을 좇으며 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마귀는 사람보다 지혜롭고 강하기 때문에, 마귀에게 사로잡힌 인간은 스스로 그 유혹을 이길 수 없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항상 악을 행했던 것도 그들 안에 마귀를 이길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흐름에 끌려다니며 죄 가운데 살 수밖에 없었다.
능력 없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은혜이다. 노아가 육신을 좇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특별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본질적으로 더 나은 존재인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연약하고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를 입게 된다. 성경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세상의 힘에 무력한 자로 남지 않는다.
노아 역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기에 얼마든지 악을 행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라는 말씀처럼, 노아는 믿음으로 얻은 능력으로 세상을 이겼던 것이다.
또한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5)라고 말씀한다. 결국 세상을 이기는 힘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와 능력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완전한 자는 없다.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성경은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1,2)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노아 역시 홍수가 끝난 후 방주에서 나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것을 보면 그가 행위로는 완전한 자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노아를 의인이라고 말씀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는 말씀처럼 노아 역시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구약 성경에는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아브라함에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고, 그가 그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던 것처럼 노아 역시 의롭게 된 것을 보면 그에게도 복음이 전해졌고, 그가 복음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인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거룩하게 하신 사실을 믿는 사람을 말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영원히 온전(완전)”하게 하셨다.(히 10:14)
성경은 노아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말씀하면서 노아가 하나님을 믿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씀을 통해 그가 세상에 속하여 타락한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거스려 하나님께 순종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는 항상 세상을 쫓아감으로 멸망을 당할 사람들과 분명히 구별되었다.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방주에 들어가기 전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세한 기록이 없다. 더구나 그들의 아내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방주 안에 들어가 물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노아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상에는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이름도 삶도 알지 못하는 많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말할 수 없는 큰 복을 받은 것은 예수님께 속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과 마귀에게 속한 사람, 두 부류밖에 없다. 사람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은 그들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성경은 “악한 일에 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라고 말씀한다. 악한 자들은 죄를 지어도 당장 심판이 임하지 않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하나님께서 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은 교만하여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것에 끝이 있듯이, 악을 행하는 일도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에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실 뿐이다. 그러나 죄가 더 이상 회개할 수 없을 만큼 가득 차게 되면, 마침내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그러했고, 가나안 족속들의 멸망도 그러했다.
날이 이르러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그 두려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악을 행한 자들이 지옥의 판결을 받을 때, 그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겠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경은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 4:18)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한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나무로 만든 방주에 역청을 바르면 물이 스며들 수 없다. 역청은 방주를 덮어 홍수의 물이 그 안으로 침범하지 못하게 한다. 심판의 물결이 쏟아져도 방주 안에 있는 생명은 안전하다. 이 역청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표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이 그 집을 넘어가게 하였다. 또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실 때 기생 라합의 집 창에 달린 붉은 줄은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멸망 가운데서 보존하였다. 어린 양의 피와 붉은 줄은 모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징이며, 그분의 피가 죄의 심판에서 사람들을 보호하심을 보여 준다.
방주에 역청을 안팎으로 바르게 하신 것은 의미가 깊다. 이는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죄뿐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숨은 죄까지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임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구원은 외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내면의 죄까지도 완전히 가리시는 은혜이다.
또한 “그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사 40:2)는 말씀처럼, 죄에 대한 형벌은 충분히 치러졌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고, 더 이상 남은 정죄는 없다.
역청이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지켰던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멸망에서 온전히 지키신다. 우리의 안전은 방주의 나무에 있지 않고, 그 위를 덮은 역청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덮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에 있다.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하나님은 방주의 크기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고, 노아는 그 말씀하신 규모 그대로 방주를 만들었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크기와 다른 배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대로 임의로 만든 것임이 분명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도 성경을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예언하셨다. 메시야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야 하며, 베들레헴에서 나셔야 하고, 많은 사람들의 병과 연약함을 고치셔야 한다. 또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고난을 당하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셔야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그러므로 이 예언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경이 증거하는 참된 메시야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예언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다. 이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속하셨다는 선포인 동시에 자신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을 완성하셨다는 승리의 선언이었다.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을 친히 성취하심으로 능력으로 자신이 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의 예언 성취에 근거한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믿음이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구원의 반석 위에 서는 일이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아무리 훌륭한 방주라 할지라도 들어갈 문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을 보호할 수 없는 무익한 구조물에 불과하다. 그와 같이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들어갈 문이 없다면, 예수님 역시 우리와 상관없는 분이 되고 만다. 그러나 방주에 문이 있었듯이, 방주의 참 형상이신 예수님께도 문이 있다.
속죄 제물인 동시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히 방주가 되실 뿐 아니라, 그 방주로 들어가는 문도 되신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요 10:9)라고 말씀하셨다.
방주의 문이 열려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문도 지금은 열려 있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오신 동물들이 모두 들어간 후 하나님께서 그 문을 닫으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문 역시 영원히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 문을 닫으실 때가 온다. 그때에는 들어가고자 해도 들어갈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방주에 문을 두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심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자비로우신 분이시기에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생명을 얻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도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을 닫지 않으신 이유이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아브라함에게는 여종 하갈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 아들 이스마엘과, 사라에게서 약속을 따라 난 아들 이삭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30)고 말씀한다. 오직 이삭처럼 약속을 따라 난 자만이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 있다.
노아가 당시 세상 사람들과 달리 물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도 그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주의 견고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약속이 그를 살렸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모든 사람을 향해 주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믿는 자에게만 효력이 있다.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약속을 받은 자의 안전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거한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으며, 그 약속을 붙드는 자는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 육체를 따라 난 것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영원한 기업을 얻는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은 결국 하나님 자신이다. 만일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생물을 각기 암수 한 쌍씩 모아 그 생명을 보존해야 했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은 단 한 마리의 동물조차 완전히 다스릴 수 없는 한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동물들을 그 종류대로 노아에게 나아오게 하셨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다.
이 원리는 죄의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 스스로 해결하도록 맡기셨다면, 죄 아래 있는 우리는 결코 영원한 멸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기에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거룩함을 입게 되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의 열매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다.
이 은혜는 부모가 어린아이의 더러움을 씻어 주는 모습과도 같다. 아이는 자신의 더러움을 온전히 알지도 못하고, 스스로 깨끗해질 능력도 없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부모의 손길로 인해 아이는 깨끗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에서 깨끗함을 얻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분명한 증거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지 죄를 씻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를 정결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붙드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친히 채우시는 신실한 아버지이시다.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은 동시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겠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온 모든 동물의 먹을 양식을 스스로 준비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아마 자기 가족을 위한 양식을 준비하는 것조차 벅찼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하셨다면, 그 명령 속에는 이미 이루실 능력과 공급의 약속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준비해 나온 양식은 한 달 남짓에 불과했다. 그 음식이 다했을 때, 광야에서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 12:14)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하늘의 만나를 예비해 두셨다. 그들의 생존은 그들의 준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에 달려 있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완고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며, 그분의 전능하심과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이루어 드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경험하는 삶이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마귀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많은 생각을 심어 놓는다. 노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상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일이었기에, 세상 사람들이 품는 의심과 조롱, 현실적인 계산과 두려움이 그의 마음에도 일어났을 것이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울때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 17:8,9)고 외쳤다. 그의 말처럼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마련이다. 이는 단지 전쟁의 원리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로마서 6장 16절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게 져서 순종하게 되면 생각의 종이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따르기 쉬운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우리의 생각과 길보다 훨씬 높고 크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기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하게 된다.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옳게 보일지라도, 그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할 수 있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처럼 믿음의 사람은 자기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생각보다 더 신뢰할 때 하나님의 명을 온전히 준행할 수 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