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제 10 장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노아의 아들들은 홍수 이후에 자녀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손들은 홍수 이전의 세상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직 그 시대를 직접 겪었던 노아와 방주에 함께 탔던 가족들의 증언을 통해서만 홍수 전의 세계를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하늘나라를 직접 보고 경험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에 대해 스스로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하늘나라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하늘나라를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요 3:11)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아시며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신 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고 말씀한다. 지금 우리는 제한된 이해 속에 있지만, 그 날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노아는 자신의 헐벗은 모습을 보지 않고 옷을 가져다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던 야벳에게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창 9:27)라고 축복하였다.

‘야벳’이라는 이름은 ‘넓히다, 확장시키다, 번성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노아가 하나님께 구한 대로, 야벳의 후손들은 온 세계로 퍼져 나가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확장과 번성 속에서도 참된 만족은 없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셈의 장막에 거할 때에야 비로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육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우리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없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그 갈증을 채울 수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영원한 생수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야벳의 자손들이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이루며 여러 나라를 이루었지만 그 뿌리가 야벳에게 있듯, 사람의 삶 또한 그 영적 근원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각기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떠난 단절 상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결과 영원하지 않은 것에 가치를 두며 멸망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저마다의 개성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품어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나아간다.

결국 인생의 성패는 외형이 아니라 소속에 있다.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가 삶의 방향과 마지막 목적지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었을 때, 이를 보고 형제들에게 고한 함으로 인해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 이는 함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자손들까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우리 역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저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필요와 갈망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저주 아래 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가 저주 아래 있음을 알게 한다. 또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세대에게는 양심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깨닫게 하셨다.

간음 중에 잡혀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요 8:11)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철저히 심판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음은 자신이 저주 아래 있음을 깨닫는 자에게 들려온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성경은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라고 말씀한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께 받은 것을 마치 자기 것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왕위에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게 된 것도, 그가 교만하여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니므롯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 역시 교만에서 나온 생각이다.

성경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한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니므롯은 도시들과 나라들을 세운 인물이다. 그의 나라 가운데 하나가 바벨이었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이 다른 이들이 이루기 어려운 일을 이루게 되면 마음이 높아지기 쉽다. 그러나 한 번 높아진 마음은 스스로 낮추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며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고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 40:11)

이 말씀은 사람이 스스로 교만을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8:12)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사람이 많은 일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마음이 높아져 하나님을 잃어버린다면 그 모든 수고가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9)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 그 땅에는 많은 가나안 족속들이 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그들을 심판하실 만큼 죄악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들을 멸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돌이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있었으니, 곧 기브온 사람들과 라합이다.

가나안 땅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고 끝까지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다가 멸망을 당하였다. 반면 기브온 사람들과 라합은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다.

비록 그들도 저주 아래 있던 가나안의 자손이었지만,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때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저주하신 목적이 단순한 멸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악에서 떠나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말씀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경계를 정하셨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나안 사람들조차도 그분이 정하신 경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성경은 바다조차 하나님의 정하신 경계 아래 있음을 말씀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렘 5:22)

이처럼 하나님은 자연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한계를 정하신다. 어떤 사람도 그분이 정하신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를 넘어 죄를 행할 수는 없다.

또한 성경은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시 139:5)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그분이 정하신 경계 속에 살아간다. 그러므로 우리의 악함도 무한히 치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제한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설명하시며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종들이 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보고 주인에게 그것을 뽑을지 묻자, 주인은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 이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함께 뽑힐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였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아버지 노아에게 축복을 받은 셈의 자손과 저주를 받은 함의 자손이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식들도 이 세상 가운데 함께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는 것은 자기 백성을 위하심이며, 동시에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추수의 때가 이르면 의인과 죄인의 운명은 분명히 갈라지게 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0-13).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야곱과 에서는 모두 이삭의 아들이었지만 서로 다른 민족을 이루었다. 형 에서는 에돔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동생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성경은 육신적인 에서와 영적인 야곱을 통해 인류의 두 부류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에벨의 두 아들, 벨렉과 욕단 역시 이와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벨렉의 계보는 아브라함으로 이어지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까지 이어지는 믿음의 계보를 이룬다. 반면 욕단의 계보는 하나님과의 약속과는 상관없는, 세상적인 흐름을 이루게 된다.

야곱과 에서가 함께할 수 없었던 것처럼, 벨렉과 욕단 역시 나뉘었다. 이는 의인과 죄인이 함께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고후 6: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