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제 5 장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아담의 계보는 가인의 계보와 분명히 구별된다. 가인의 계보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족보라면, 아담의 계보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들의 족보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범죄하게 한 배후의 존재로 뱀을 지명하여 저주하셨다. 그리고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는 타락 직후에 주어진 구속의 약속이며, 사탄의 권세가 결국 한 인물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계보를 이어 가신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아담의 계보를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심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며, 마귀를 멸하고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견고히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족보는 단순한 혈통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보존되고 성취되어 가는지를 증언하는 신앙의 기록이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말씀하셨다.

이 복은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도 철회되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지속되어 인류는 실제로 땅에 충만하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이 인간의 상태나 행위에 의해 좌우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히 6:14)고 약속하실 때,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신실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성품에 근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는 한,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개될 수 없다.

성경은 또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고 증언한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며, 그분에게서 나온 약속 역시 변하지 않는다.

아담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족보를 살펴보면, 그 안에는 악을 행한 사람들과 실패한 인물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람들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당신이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보장은 우리의 행위나 결단이 아니라,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하나님은 아담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한 분이시기에, 범죄하기 전의 아담 또한 죄가 없는 거룩한 존재였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죄가 그의 안에 들어왔고, 그 결과 그는 부패한 본성을 지니게 되었다.

성경이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한 것은, 죄와 부패한 본성이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 아래 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범죄하기 전의 아담이 거룩했던 것처럼 우리를 다시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 안에서 참된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거룩함을 위한 것이며, 성경은 이에 대하여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고 증언한다.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이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처럼,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 또한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하나님은 아벨이 죽은 후에 아담에게 셋을 허락하셨다. ‘셋’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이 다른 씨를 세워 주셨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의 계보를 이어 갈 자가 필요하였고, 그 일을 위해 셋을 세우셨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친히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모세를 세우셔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아브라함의 자손을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게 하셨다. 약속은 하나님이 하시고, 그 성취 또한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의 유산을 값없이 기업으로 받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약속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며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품은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 가운데 산다.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아담의 족보에는 “낳고, 죽었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는 범죄한 인간의 결국이 사망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낳았다”는 표현만 있을 뿐, “죽었다”는 말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 안에는 사망이 역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사역을 보아도,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은 있으나 살아 있는 자를 죽이신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8:44)인 마귀와 분명히 대조되는 분이시다.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3)라고 노래했는데,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생명이 되실 뿐 아니라, 죽어 있던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하나님은 사람의 이름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에노스는 게난을 낳고, 게난은 마할랄렐을 낳았는데, 에노스라는 이름은 ‘연약한 인간’, 게난은 ‘얻다, 소유하다’, 마할랄렐은 ‘하나님을 찬양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연약한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것을 받아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라는 말씀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찬송이 되게 하시기 위해,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지으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정죄의 이유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연약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감사의 조건임을 안다.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하나님을 찬양하다’라는 뜻을 가진 마할랄렐은 ‘내려오다’라는 뜻을 가진 야렛을 낳았다.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내려옴을 보여준다. 성경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고 말씀한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사 57:20)는 말씀처럼, 악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도 의를 배우지 않으며 언제나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하는 말을 한다. 그 결과 악인은 자기 악에 걸리며 죄의 줄에 매여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사울은 창을 들었으나 다윗은 수금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창을 든 사울에게는 악령이 임했지만, 수금을 든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5,6)라고 노래하였다.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사도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오직 자기 배를 위하여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

에녹이라는 이름에는 “헌신된 자, 봉헌된 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 헌신된 삶으로 이끄신다. 이것은 인간의 결단이나 의지의 결과라기보다, 하나님께 속한 생명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열매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베드로는 자기를 위하여 고기를 잡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인도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욕망을 따라 살던 사람을 부르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신다. 성경에는 이러한 변화의 증인들이 참으로 많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헌신된 삶으로 인도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친히 채우신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던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성경은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장차 행하실 일을 선지자들에게 미리 보이시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사람들이 다가올 일을 준비하게 하시며,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 하나님을 참으로 믿게 하시기 위함이다.

므두셀라의 이름에는 “그가 죽으면 그것이 임한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므두셀라를 통해 그가 죽는 날 세상에 심판이 임할 것을 미리 알리셨다. 실제로 므두셀라가 죽은 후,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큰 홍수가 일어나 노아의 가족 여덟 명 외에는 모든 사람이 물로 멸망당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는데, 이는 성경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 가장 긴 수명이다. 그의 긴 생애는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인간들을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고 인내하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의 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인내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으며, 정하신 때가 이르면 심판은 반드시 임한다.

성경은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하나님은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해 수없이 말씀하셨다. 미련한 자는 그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과 생각을 따라 살아가지만,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움으로 자신을 살피며,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시는 유일한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성경에는 장차 이루어질 일들이 그림자와 예표로 기록된 내용이 많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입히신 가죽옷,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 그리고 기생 라합이 창문에 매어 두었던 붉은 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이다.

아담의 계보를 보면 모든 인물에 대해 “자녀를 낳고 죽었다”는 기록으로 마무리되지만, 오직 에녹에게만은 죽었다는 표현이 없다. 그는 자녀들을 낳은 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이는 장차 있을 놀라운 사건을 미리 보여 주는 하나의 표적이다.

성경은 에녹과 같이 사람이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장면을 이렇게 증언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홀연히 변화된 몸으로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질수록 그 날이 가까움을 아는 사람은, 혼인을 앞둔 처녀가 자신을 정결하게 하듯, 이 세상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거룩함 가운데 거한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라멕이라는 이름에는 ‘강한 자, 힘센 자’라는 의미가 있는가 하면, ‘낮아짐’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 속한 라멕은 교만한 ‘강한 자’로, 셋의 계보에 나오는 라멕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는 ‘낮아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특히 므두셀라가 죽은 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심판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한다. 성경은 이러한 자들을 두고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므두셀라가 죽은 후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앞으로는 불로써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강퍅한 마음으로 멸망을 향해 나아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 회개하며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한다.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하나님은 라멕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낮추고 겸비하는 자를 위하여, ‘위로’와 ‘안식’이라는 이름의 뜻을 지닌 노아를 허락하신다. 이 사실을 아는 다윗은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라고 노래하였다.

또한 성경은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분 안에서 모든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하신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악함과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기에, 룻이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랐던 것처럼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떠나지 않고 따른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당신의 보호하심 아래 두시고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하나님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노아에게 자식들을 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 이후가 아니라, 심판 이전에 노아에게 아들들을 주셨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마귀를 멸하실 구원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심판이 임하기 전에 노아에게 세 아들과 그 며느리들을 주셨고, 약속을 가진 그 가족이 심판을 통과하게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장차 있을 심판을 앞두고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그 뒤에 생긴 율법이 그 복음을 폐하지 못했던 것처럼, 심판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을 이기고 넘어가신 분이다.

이것이 우리가 심판을 피하기 위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