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365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창 1:2-4)

은 흑암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땅은 스스로 그 흑암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의 명하심으로 빛이 있게 되자 그 어두움은 사라졌다.

우리도 때때로 문제에 갇힐 때가 있다. 그러지만 우리에게는 그 문제에서 스스로 벗어날 능력이 없다. 그런데 성경은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19,20)라고 말씀한다. 어두움에 싸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그 문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거라사인의 지방에 무덤 사이에 거하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고,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 5:8)고 말씀하시자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고 그는 온전하게 되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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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 20:9-12)

일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침 일찍 같은 시간에 들어와서 하루 종일 일을 했더라면 일을 마치고 주인이 한 데나리온씩 그들의 삯을 줄 때 주인을 원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들과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주인을 원망했다. 만일 제십일시에 들어온 자가 없었더라면 주인이 주는 한 데나리온을 은혜로 생각하지 않고 수고의 대가로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롬 4:4)라는 말씀처럼 많은 사람은 자신의 열심으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롬 9:31,32)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롬 4:5)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롬 4:5)로 여기신다. 결국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 것도, 우리가 그 사실을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도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위에 우리의 행위를 섞어 버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라고 말씀한다. 우리 보기에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하게 보이는 행위라 할지라도 지극히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거해야 한다.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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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눅 23:39-41)

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 중 한 강도는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다른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이것이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강도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낙원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은혜를 입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고 말씀한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그들은 영원한 멸망을 받기로 작정 되어 있다.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들 역시 간담이 녹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했지만 항복하지 않고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다가 멸망했다.

귀신들이나 여리고 사람들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대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대적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며 순종한다.

십자가의 두 강도 중 구원받지 못한 한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도 깨닫지 못했다. 반면에 구원받은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는 그의 말이 이를 잘 증명한다. 자기들은 자신들이 행한 악으로 인해 사형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예수님은 잘못한 것이 없이 자기들의 죄를 위해 죽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공경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중에 존경하는 것을 말한다. 당신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 외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는 있어도 경외할 수는 없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당신의 약속을 보이신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하신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만 보이기에 그 약속은 밝혀진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