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회개,심판

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범한 죄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어떤 죄에 대해 회개해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 어떤 사람은 양심이나 율법 그리고 세상 법을 어긴 것을 하나님께 범한 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죄들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 다짐이나 각오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죄가 있다. 그 죄를 모르면 올바른 회개를 하지 못하여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선악을 알게 된 인간

창세기 3장에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죄를 범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에덴 동산에 두셨다. 그리고 그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 그의 아내로 주셨다.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담의 아내 하와에게 뱀이 접근하였다. 이 뱀에 대하여 요한 계시록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계 20:1,2)

여기서 말씀하는 옛 뱀은 하와를 유혹했던 뱀을 말한다. 성경은 이 뱀을 마귀요 사탄이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뱀이 여자에게 접근하였다는 것은 마귀가 그에게 접근한 것이다. 마귀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그러자 여자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2,3)고 대답했다. 그때 마귀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고 말했다.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나무를 보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로 보였다. 여자는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었다. 그러자 아담도 그것을 먹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자 뱀의 말대로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에 없었던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들은 단지 선악을 알았을 뿐인데 그들의 눈이 밝아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법을 통해 역사하는 마귀

법은 이전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을 주목하게 하며,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든다. 바닷가에서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큰 고기를 잡았지만, 미련 없이 그것을 바다에 도로 던져 넣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이 훨씬 더 큰 고기를 잡았지만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고기를 자로 재어보고는 다시 바다에 던져 넣었다. 그곳에는 사람이 잡을 수 있는 고기의 크기가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 법을 어기면 많은 벌금을 물어야 하므로 사람들은 법이 정한 크기보다 작은 고기를 잡으면 바다에 도로 넣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법을 모르는 사람이 그곳에서 낚시를 한다면 그는 고기가 잡힐 때마다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 곳의 법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자기가 잡은 고기의 크기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의 벗은 것이 보인 것은 그들이 선악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롬 7:8)는 말씀처럼, 그들이 선악을 알지 못했다면 그들의 헐벗은 것을 악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귀는 법을 통해 사람에게 역사한다. 그래서 성경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고 말씀한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가 알게 된 선악 간의 법으로 그들의 헐벗은 것을 악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하나님이 그들을 형벌하실 것이라고 속였다.  

사실 하나님에게는 아담과 하와의 헐벗은 것이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우리가 동물의 벗은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그것을 악하게 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아담과 하와를 보실 때 그랬다. 만일 하나님이 아담의 벗은 것을 악하게 보셨다면 그를 창조하실 때부터 그 몸을 가렸을 것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기 전에는 그의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은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의 벗은 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하나님은 당신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대답했다. 그때 하나님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의 벗은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그 선악 간의 법으로 자신을 정죄했기 때문에 형벌의 두려움을 갖게 되어 당신을 피하여 숨은 것도 아셨다. 또한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뱀이 있었다는 것을 아셨기에 뱀에게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4,15)고 말씀하셨다.

아담이 자신의 벗은 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다는 것은 마귀의 음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가 마귀의 음성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했던 것이다. 아담이 비록 선악을 알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다면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1서 4:18)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불신함으로 두려워하여 마음에서 하나님을 떠났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떠난 것을 두고 성경은 그가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씀한다. 사람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가 되면 그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죽음에는 분리라는 개념이 있다. 성경에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롬 6:2]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우리가 죄와 분리가 되어 죄와 상관이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롬 7:4]는 말 역시 우리가 율법과 분리가 되어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떠나므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가 되어 하나님과 상관없는 죽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되는 날 반드시 죽을 것을 아셨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아담이 선악을 알게 되자 마귀는 즉시 그에게 역사했다. 마귀는 그가 알고 있는 선악 간의 법으로 그를 속여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떠나게 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를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8:44)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씀한다. 여기서 말하는 한 사람은 아담을 말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에 죄가 없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종이 되므로 인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라는 말씀에서처럼 사람을 말한다. 아담이 마귀를 받아들이자, 죄의 주체인 마귀는 그의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죄들이 나타났다.  

아담이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을 때 모든 사람도 함께 죽었다. 성경은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롬 5:14)라고 말씀한다.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과 같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도 않았고,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을 떠난 적도 없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할 때 우리도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먹을 때 그의 안에 있던 우리도 함께 먹었고, 아담이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을 떠날 때 우리도 그와 함께 하나님을 떠나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죄

하나님을 불신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눈과 귀를 막고 마귀를 향해서는 마음을 열었다. 마귀는 그런 인간 속에 자기의 모든 악한 것들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1서 2:16)고 말씀한다. 마귀는 사람 속에 온갖 정욕을 일으키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을 정죄하여 형벌을 두려워하게 만들어서 더욱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

또한 마귀는 사람으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하나님을 멸시하고 외면하게 만든다. 마귀보다 지혜롭지 못한 인간은 항상 마귀에게 미혹되어 마귀를 쫓아 악을 행한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마귀의 종이 되어 항상 악을 행하는 우리를 보시고 진노하셨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마귀에게 속해 마귀가 주는 정욕을 따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죄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죄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너희 조상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렘 16:11)고 말하라 하셨다. 그래서 예레미야 2장 19절에는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한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짝하여 간음을 행한다면 분노하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버리고 마귀를 음란하게 섬기는 것을 보고 진노하셨다. 그 분노가 얼마나 큰지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나 1:6)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한 것은 바로 마귀다.   


마귀의 정체

마귀는 타락한 천사 루시퍼다. 하나님은 그를 창조하실 때 지혜가 충족하며 아름답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를 높혀 천사장 중의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마귀는 자신의 뛰어남으로 인해 교만하여졌고, 영화로움으로 자신의 지혜를 더럽혔다. 그는 하나님과 비기려는 마음을 가짐으로 인해 그를 추종하는 천사들과 함께 땅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음부에 떨어지기로 작정 되었는데 성경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2-15)

또한 마귀의 마지막에 대해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고 말씀한다. 이것이 마귀의 정체이며 결국이다. 마귀는 자신을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도록 작정한 하나님에 대하여 분한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함께 지옥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께 보복하려고 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결코 자신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교만하기에 사람을 향한 그의 잔인한 뜻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고전 6:16)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마귀와 짝함으로 그와 한 육체가 되었다. 그로 인해 우리도 마귀와 함께 영원한 불못에 들어갈 운명이 되었다. 그럴지라도 마귀에게 속은 사람은 자신의 결국을 깨닫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두 기생이 솔로몬 왕 앞에서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할 때 솔로몬이 칼로 아이를 반으로 나누어 두 여인에게 각각 나누어 주라고 말하였지만, 그 아이는 자기가 반으로 나뉘어져 죽게 될 운명에 놓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솔로몬의 칼이 진짜 엄마의 마음을 불붙게 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영원한 멸망 아래 놓이게 되자 하나님의 마음은 불붙는 것 같이 뜨거웠다. 가짜 엄마는 아이가 반으로 나뉘어져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진짜 엄마는 절대 아이를 죽게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마귀와 함께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 보고만 계실 수 없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욜 2:18)는 말씀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당신의 분노를 돌이키게 했다. 그래서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고 말씀한다.   


예수님을 준비하신 하나님

자식이 죽을죄를 지었을 때 부모는 그에게 죽일 듯이 화를 내어도 죽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비록 우리에게 진노하셨지만, 우리가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 허락하실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해 내셔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저주받아야 하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 대신 예수님에게 저주를 내리심으로 우리를 용서하기로 작정하셨다.

성경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할 것을 아시고 창세 전에 이미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여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하셨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높은 보좌에 앉아 우리를 지켜보며 잘잘못을 따라 심판만 하는 분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신 분이다. 사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기에 예수님의 고통은 곧 하나님의 고통이며, 예수님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이나 다름이 없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알게 하셔야 했다. 사람이 죽을병에 걸렸어도 그것을 모르면 아무리 좋은 약을 줄지라도 그 약을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마귀와 함께 영원한 멸망을 받을 운명에 놓여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면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주실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와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사망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셔야 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사실 우리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간음이 보편화되어 있는 곳에서는 간음을 죄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양심은 환경에 따라 무뎌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경은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롬 5:13)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양심이 무뎌져 자신이 죄인 됨을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을 주셨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우리 마음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그래서 율법으로 우리 마음을 비추어 보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알게 된다. 사람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엡 5:12)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율법은 다른 사람에게는 있으나 자기에게는 없을 것 같은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죄들까지도 적나라하게 들추어낸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 27:19)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에 범람하고 있는 모든 죄악이 우리 속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죄없이 창조된 인간 속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죄의 주체인 마귀가 사람 속에 악한 것들을 넣었기 때문이다. 마귀는 사람 속에 육체의 정욕을 일으켜 그것을 좇아가도록 미혹한다. 마귀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같이 육체와 마음의 정욕을 따라 행한다.

사도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도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했다. 율법은 선한 것이기에 그는 율법을 좋아하고 지키려 했지만, 오히려 율법을 어기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과 자기로 악을 행하게 하는 죄가 자기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8-20)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 있는 죄가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기를 이겨 항상 악을 행하게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1-23)라고 그는 말했다.

주인의 손에 잡힌 강아지가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가는 것은 주인이 강아지보다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처럼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 있는 죄가 자기보다 힘이 강해서 언제나 자기로 죄를 짓게 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나 죄에 정복당하는 자신을 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했다. 죄는 육신을 통해 온갖 정욕을 일으키기 때문에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다.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자신을 보면서 자기를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줄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저주 아래 있는 자

사실 율법은 무섭기가 한이 없다. 율법은 우리가 한 개의 계명만 어겨도 율법 전체를 어겼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10,11)고 말한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가 하나의 계명만 어겨도 우리에게 저주를 요구한다. 성경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고 말씀한다. 결국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우리는 저주 아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악을 행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말씀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9-19)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 7:12,13)고 성경은 말씀한다.

율법은 선하다. 그렇다고 율법이 우리에게 선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마귀에게 정복당한 우리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가 선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통해 항상 악한 우리를 보게 한다. 그리고 율법은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여 우리가 저주 아래 있음을 알게 한다. 율법을 통해 자기 힘으로는 절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마음에는 사망이 온다. 그런 사람은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 줄 구원자를 찾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갈 3:24)의 역활을 한다.


진노 속에 숨겨진 사랑

아버지가 잘못을 범한 아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아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올바른 길을 걷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우리가 당신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마귀에게서 벗어나 당신에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진노 속에 아버지의 사랑이 숨겨져 있듯이 하나님의 진노 속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숨겨져 있다.

만일 하나님이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만 우리에게 주셨다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율법과 함께 예수님도 주셨다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살리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고 말씀한다.


율법의 속죄 제사

예수님이 우리 죄를 해결하러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특히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율법에는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용서받는 속죄 제사가 있는데 그 속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속죄 제사를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 죄를 씻어 정결케 하셨는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먼저 율법에 기록된 속죄 제사를 숙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율법에는 죄를 지은 사람에 따라 그 드리는 속죄 제사가 다르다. 그러나 우리 같은 평민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속죄 제사와 이스라엘 사람이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한 번에 용서받는 속죄 제사만 알아도 예수님이 우리 죄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먼저 우리 같은 평민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죄를 씻는 속죄 제사는 다음과 같이 드려졌다. 이스라엘 사람이 죄를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자신이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성막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사람은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자신이 지은 죄를 염소에게 넘겼다. 그러고는 죄를 건네받은 염소를 죽이고 그릇에 염소의 피를 받았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릇에 받은 염소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단 밑에 쏟았다. 그 후에 제사장은 염소의 가죽을 벗기고 기름을 취하여 번제단에서 불살랐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죄를 지은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깨끗하게 되었다. [레위기 4장 참조]

여기서 제사장이 염소의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른 것은 번제단 뿔에 사람이 지은 죄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두 군데 기록이 된다. 성경은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렘 17:1)이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제사장은 번제단 뿔에 기록된 죄를 염소의 피로 덮어 보이지 않게 하였다. 그런데 우리 마음 판에 기록된 죄는 염소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가려진다.     


대속죄일

매년 7월 10일이 되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씻는 속죄 제사를 드렸다. 이 속죄 제사는 평민이 직접 염소에게 안수하여 자기 죄를 넘기는 속죄 제사와는 달랐다. 이날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각자가 염소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표가 되어 죄를 넘겼다.

이날에는 먼저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여 넘기고, 그 수송아지를 죽여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 동편과 앞에 일곱 번 피를 뿌려 일 년 동안 지은 죄에서 자신을 먼저 정결케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대제사장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죄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두 마리의 염소 중 한 마리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넘겼다. 그러고는 죄를 담당한 염소를 대제사장이 죽여 그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다시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앞에 그 피를 뿌렸다.

지성소에서 나온 대제사장은 남아 있는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번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단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의 부정에서 번제단을 속죄하여 성결케 했다. 그런 후에 대제사장은 남아있는 다른 한 마리의 염소 즉, 아사셀(내어놓음)을 위한 염소의 머리에 두 손으로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에게 넘겼다. 그러면 그 염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지었던 죄를 지고 미리 정한 사람의 손에 이끌려 성막에서 나와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에 버려졌다. [레위기 16장 참조]

그 후에 대제사장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죽었던 수송아지와 염소의 가죽과 고기와 똥은 성막 밖에서 불살랐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제사장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 년 동안 지었던 모든 죄에서 용서받고 정결케 되었다.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의 죄를 지고 가는 아사셀 염소는 우리 죄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아사셀 염소가 광야에 버려지기 위해 사람의 손에 이끌려 성막 밖으로 나오면 성막 밖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지고 가는 그 염소를 보았는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의 그림자다.  


세상 죄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이스라엘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해 양이나 염소가 피를 흘려 죽었던 것은 율법에는 피로써 거의 모든 것이 깨끗하게 되며 피흘림이 없으면 죄의 용서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이나 염소의 피는 지었던 죄만 씻을 수 있었지, 앞으로 지을 죄까지는 씻을 능력이 없었다. 만일 염소의 피가 사람이 지은 죄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단번에 씻을 수 있었다면 속죄 제사를 한 번 드리고는 더 이상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히 10:2)라고 말씀한다.

또한 성경은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 10:1)고 말씀한다. 양이나 염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짐승의 피로는 사람의 모든 죄를 한 번에 완전히 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단번에 씻어 영원히 깨끗게 할 제물을 준비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예수님에게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시키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말했다. 7월 10일 대속죄일 때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사람이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염소에게 넘겼듯이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우리 모든 죄를 넘기셨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우리 문제를 담당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문제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우리 문제를 담당해 준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 인해 우리 죄의 문제는 더 이상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로 넘어갔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예수님보다 육 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인데 그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속죄 제물이며 세상 죄를 지셨다고 증언했다.  

우리가 예수님이 지신 세상 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이라는 말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세상은 사람이 있어야 존재한다. 그래서 세상은 아담이 창조되면서 시작되었고, 장차 이 지구상의 마지막 한 인간이 죽으면 끝이 난다. 그래서 세상 죄라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사람의 죄를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종이 되어 마음과 육체를 따라 지은 모든 죄를 예수님이 지셨던 것이다.


다 이루었다

죄를 씻기 위해서는 피가 흘려져야 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죗값인 사망을 치르기 위해서 우리 죄를 지고 채찍을 맞으며 갈보리 산으로 끌려가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을 미리 보고 성경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결국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마지막 말씀을 큰 소리로 외치고는 운명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용서받아 흠이 없고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뜻을 다 이루셨다.


율법도 죄도 형벌도 다 없애신 예수님

율법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말한다. 율법은 사람에게 죄가 전혀 없는 거룩함을 요구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신 6:25)고 말씀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거룩하게 되어 의롭게 될 자는 아무도 없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율법은 거룩하지 못한 자에게는 저주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죄악된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받으신 저주로 인해 우리의 죄는 용서를 받아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었다. 성경은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인 거룩함과 저주를 친히 다 이루셨다. 그로 인해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로 율법을 폐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4,15)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정죄하던 율법도 폐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도 용서하시고, 형벌도 우리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과 죄와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사실 율법과 죄와 형벌 중 하나만 해결되어도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과 죄와 형벌 모두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셨다. 그로 인해 우리에게는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을 방해할 어떤 장애물도 없다.

예수님으로 인해 마귀는 우리를 속일 모든 근거를 잃어버렸다. 단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는 하나님이 아담의 헐벗은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으시는데도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아담을 속였던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는데도 그 본질을 숨기고 마치 하나님이 우리 죄를 문제 삼으시는 것처럼 속이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약속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마귀와 짝하여 지었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그러고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는 약속을 하셨다. 사실 성경은 약속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이 소제목만 보더라도 성경은 약속의 책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구약‘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하나님이 하신 첫 번째 약속이다. 이 약속은 사람의 행위에 기반한 것인데 사람이 모든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하나님은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히 8:9)고 말씀하셨다.

결국 첫 번째 약속으로는 죄악된 인간이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로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흠이 없는 새로운 약속 즉, 두 번째 약속을 하셔야 했다. 그래서 두 번째 약속은 우리의 행위에 기반하지 않은 예수님의 공로로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곧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당신의 피를 가지고 이 땅에 있는 성소가 아닌 하늘 성소에 가서 그 피를 뿌려 ‘영원한 속죄’(히 9:12)를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는 새로운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셔서 죄를 깨닫게 하여 우리가 사망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던 이유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새로운 약속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고 말씀한다.


생명의 성령의 법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은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셨다. 성경은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5-18)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은 약속인 동시에 법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성령이 증언하신 이 새로운 약속은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법이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시기 때문에 이 새로운 약속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성경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고 말씀한다.

전쟁 중에 탈영병은 사형을 시킨다는 법이 있는 나라에서는 전쟁 중에 도망한 사람은 사형의 두려움 속에서 떨어야 한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탈영병을 사면해 주는 법이 생기면 그 사람은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된다. 이처럼 법은 법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 우리를 정죄하여 우리를 사망 아래 놓이게 했던 ‘죄와 사망의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 제재를 받아 무력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되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사망 아래 놓이게 되자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영원 전부터 예수님 안에 있었고, 영원까지 예수님 안에 있는 법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 안에 들어온 우리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만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원히 정죄함이 없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고 법에 있다. 사람이 어떤 법 아래에 있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달라진다. ‘죄와 사망의 법’ 아래서는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지만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는 생명을 얻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리는 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고 말씀한다.


조건 없는 사랑과 은혜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의롭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심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을 아시기에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해 놓으셨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고 말씀한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얻은 의로움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 얻는 의로움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해 놓으신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성경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Justification)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Righteousness)로 여기시나니”(롬 4:5)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인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의인이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4-7)고 말씀한다.

성경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고 말씀한다. 만일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고 말씀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떠나 마귀와 짝하고 있을 때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모에게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조건 없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에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회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떠났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셔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서도 우리 죄를 씻을 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굳이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택하신 것은 그만큼 우리의 구원이 값진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성경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율법의 속죄 제사를 통해 그들의 죄를 씻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하신 것은 날마다 짓는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참된 회개란 날마다 짓는 죄에 대해서 용서를 빌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 다짐이나 각오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예수님이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을 믿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예수님의 양편에서 두 강도도 함께 죽어갔다. 그런데 처음에는 두 강도 모두 예수님을 비방했다. 그런데 한 강도가 죽음 직전에 회개했다. 그러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아무리 죽을죄를 지은 악한 자라도 예수님을 영접만 하면 구원을 받아 천국을 유업으로 받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 그래서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말씀한다.

  
심판받을 죄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두어 사람이 예수께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2-5)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죄를 많이 지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 심판받을 죄다. 불신자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지극히 큰 사랑을 보이셨는데도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마귀의 종이 되어 산 것으로 인해 심판을 받아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6-29)  

여전히 마귀에게 속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는 자다. 성경은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고 말씀한다. 이 죄는 짐짓 죄에 해당하며 이 죄에 대한 속죄 제사는 없다. 그래서 성경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고 말씀한다.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

요한 계시록에는 하나님이 마지막 날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말씀이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1-15)

지옥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부분에서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도 지옥에 대해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8,49)고 말씀하셨다. 지옥은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곳이기에 그 무섭기가 한이 없다. 심판 날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비웃고 믿지 않았던 자들이 심판 날에 오직 맹렬히 타는 진노만을 가지신 하나님을 보면서 두려워 떨며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심판날의 판결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 앞에 생명책이 있는데 그 생명책에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판가름 난다. 생명책에 기록이 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가 되어 불못에 떨어지는 둘째 사망을 당하게 된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 보지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는 하나님을 보면서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살갗이 터지며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모진 채찍을 맞으면서 십자가로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며 죽으셨는데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에 대하여 절대 용서하지 않고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듯 진노 역시 영원하기에 지옥은 영원한 곳이다. 성경은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8,19)고 말씀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이 땅에서 이미 지옥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마지막 날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날 심판 때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는데도 이날은 사람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신다. 왜냐하면 죄인이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한 말이나 행위는 그가 마귀에게 속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고 말씀한다.

소가 돼지처럼, 돼지가 소처럼 살 수 없는 것처럼 의인은 의인답게, 죄인은 죄인답게 살기 마련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요 8:41)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가 주는 마음을 따라 악을 행하며 살다가 심판을 받는다. 성경은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고 경고한다.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고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신 하나님이라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당신에게 나아오는 자를 거절하실 리가 없다.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담을 헐어버리시고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7,38)고 말씀한다. 거룩한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지성소에는 죄가 있는 사람이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 휘장이 막고 있었다. 그래서 대속죄일 때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던 대제사장도 죽임을 면하기 위해 먼저 자기의 죄를 씻고 들어갔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완벽하게 씻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휘장이 지성소를 가리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성소의 휘장을 찢어버리셨다.

우리 앞에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고 말씀한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고 말씀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는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지 모른다. 아직은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 열려 있다. 그러나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눅 13:25-27)고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고 계실 때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본래 마귀의 자녀였는데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었기에 성경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말씀한다.

우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는데 이제는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분에게로 돌아와 그분이 기르시고 돌보시는 양이 되었다.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7-29)고 말씀하셨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고 노래했다. 목자는 모든 위험에서 그의 양들을 지키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며 그들을 위해 일한다. 그러므로 양들은 목자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안식하게 된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기에 하나님의 사랑 역시 영원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깨닫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고 누리는 정도가 다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만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용서라는 것은 피해를 본 사람이 피해를 준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간음을 행했다면 아내는 남편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남편을 용서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마귀와 짝함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로 인해 고통을 당한 피해자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신 것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경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말씀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행위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얻은 생명은 영원한 것이기에 ‘영생’이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다는 사실[히 6:18]과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요17:17]라는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절대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고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