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아담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분을 떠났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고백한 그의 말을 보면, 그의 내면에 분명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불신으로 가득하던 그의 마음이 감사로 바뀐 것이다. 그 변화의 배경에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땅을 일구며 하나님 없이는 자신 역시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 경험이 있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에게 환난의 떡을 먹게 하셨던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땅을 힘겹게 갈게 하신 것도 그에게 고통을 주시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근본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얻게 하시려는 특별한 은혜였다.
하나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복으로 갚으시는 선하신 분이다.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악함에 매이지 않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가게 된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하였다. 그런데 태중에서 두 아들이 서로 다투자, 리브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여호와께 묻는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뉘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리브가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민족을 상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인과 아벨 역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대표한다. 성경은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요일 3:12)라고 말하는데,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가인은 하나님을 떠난 악한 자들의 무리를 대표한다. 반면 아벨은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사는 자들을 대표한다.
가인과 아벨은 동일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함께 자랐지만, 그들이 선택한 길은 달랐고 그들의 결말 또한 달랐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겉으로는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인의 길’을 걷고 있든지, 아니면 ‘아벨의 길’을 걷고 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37-42)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여기서 가인과 그의 제물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은 것을 상징하며, 아벨과 그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예표이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신 것은, 흙으로 된 우리 육체의 행위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마귀의 종이 된 인간에게서는 스스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가인은 자기의 노력과 열심으로 얻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반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아벨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은 그와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 성경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히 11:4).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은 영과 육을 분명하게 구별하신다. 하나님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만을 받으신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에 우리가 죄를 이기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안에 거하는 죄는 언제나 우리보다 강하여 우리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이겨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성경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이길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죄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죄에 끌려다니며 악을 행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8-31)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이 분하여 한 것을 보면 그의 안에는 그 분노를 다스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을 보면, 그는 분명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가인은 그 말씀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죄를 이기려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했다. 만일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을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의지했고, 결국 의로운 동생을 죽이는 죄에 이르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죽음을 허락하신 것은, 가인이 끝까지 죄를 이길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죄 없으신 당신의 독생자마저 악한 자들의 손에 넘겨 죽게 하심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근본적인 악함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사람은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임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참된 화목에 이를 수 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사람은 악을 행할 때 보는 이가 없으면, 자신이 지은 죄를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주목하여 보시며, 책들에 다 기록해 두신다.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이 심판받는 광경을 미리 보았던 요한은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라고 증언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계 6:9–10).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의 피에 대한 공의를 호소하는 것처럼 자기 죄를 숨기려 했던 가인에게 하나님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감찰하고 계시며,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 듣고 계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마음속 죄만 가려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의 책들에 기록된 우리의 모든 죄까지도 완전히 가려 주셨기 때문이다. 이 은혜를 경험한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농부가 땅에 씨를 뿌렸음에도 싹이 돋지 않는다면, 땅을 경작하고 씨를 뿌리며 물을 준 농부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농부에게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아무리 기도하고 애써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그것만큼 절망적이고 저주처럼 느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분명 저주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씀은 가인에게 베푸신 은혜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가인이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닫고,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사람이 죄를 짓고 두려워하는 것은 대개 죄 그 자체보다도, 그 죄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올 형벌이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자신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악한가를 슬퍼하기보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겁다”고 고백하였다. 이는 죄의 본질보다 죄의 결과를 더 두려워하는,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범죄한 아담에게 장차 오실 구원자, 곧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셨다. 만일 가인이 모든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르실 그리스도를 믿었더라면, 그는 자기 죄로 인한 형벌의 무게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그 말씀을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자신의 구원자로 믿지 않았다. 만일 그가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판 죄로 인해 스스로 목매어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인과 가룟 유다는 공통적으로 자신이 지은 죄의 값을 스스로 책임지려 했고, 그 결과 멸망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죄값을 우리가 아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치르셨음을 분명히 증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자기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의인이다. 구원의 갈림길은 죄의 크기에 있지 않고, 그 죄를 누가 담당하느냐에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가인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었다. 그는 동생 아벨을 죽인 죄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과 분리되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근본적인 죄에 대해서는 깊이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인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던 그에게 표를 주셔서, 그를 만나는 누구에게서도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선인에게만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 아니다. 악인과 불의한 자에게도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고 회개하여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닫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라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보는 제자들의 눈이 복된 것처럼, 원수에게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보고 바라볼 수 있는 눈 또한 참으로 복되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을 높이려 한다. 가인은 성을 쌓고, 그 성의 이름을 자신의 아들 이름인 에녹이라 하였고, 홍수 이후 타락한 사람들은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건설하여 탑 꼭대기에 자기 이름을 새기려 했다.
반면,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높인다. 야곱은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 하란으로 가던 중 한 곳에 이르러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셨다. 깨어난 야곱은 그곳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하였다. 모세도 아말렉과 싸워 승리한 후 재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라 하였다.
육신적인 사람의 눈에는 자기가 크게 보이지만, 영적인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크게 보인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눈은 하나님을 향해 가려져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볼 눈이 없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라는 말씀처럼 그들의 생각과 판단,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들은 오직 자기 필요를 위해 일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 온 마음을 쏟는다.
사람에게는 영육간에 필요한 것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을 시인하며 감사한다. 그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
소경은 스스로 눈을 뜰 수 없다. 그러므로 소경은 소경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눈을 뜨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보는 자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성경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고 말씀한다. 성령은 우리를 이 말씀이 삶 속에서 실제로 성취되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므로 참된 선을 행할 수 없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라멕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는 자기의 상처로 사람을 죽였고, 자기의 상함으로 소년을 죽였다.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스스로를 위하여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칠십칠 배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얼마나 쉽게 폭력과 교만의 자리로 올라가는지를 드러낸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이처럼 판이하게 다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증언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19-24)
성령의 인도는 단순한 감정이나 도덕적 결심이 아니라,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 능력 안에서만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되돌려주지 않으며, 도리어 복을 빌 수 있다. 이것이 성령 안에 있는 자의 삶이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는 길이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주었다. 셋은 자신의 아들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는데, 에노스는 “연약한 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가인의 후손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가인의 계보처럼 자기 힘과 능력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와 세상의 힘에 따라 행하다가 결국 멸망을 당하였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도 지혜로우므로 재앙을 내릴 것이다”(사 31:1–2)
반면, 아벨이나 에노스처럼 자신의 허무함과 연약함을 아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시고 친히 돕는 자가 되어 모든 환난에서 건지며, 그들을 보호하는 산성이 되어 주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