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시, 영장으로 관악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1–2)
정의가 없는 세상에서는 재판이 굽게 됨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 높은 자라고 낫게 봐 주거나 낮은 자라고 무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의로운 법을 따라 판단하신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심사’는 마음속의 생각과 묵상,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마음의 탄식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겉으로 드러난 말만 들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깊은 곳까지 헤아려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다.
다윗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과 사정을 숨김없이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까지 아신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옳음을 인정받으려고 하기보다 공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살펴 달라고 간구했다.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다윗은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려 드렸다. 아침은 저녁과 달리 해가 떠 오르는 시간이다. 이것을 빛되신 예수님과 연관지어 보면 아침에 드리는 기도는 더욱 소망스럽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다윗은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라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아차페(וַאֲצַפֶּה, va’atzappeh)’로서 ‘바라보다, 지켜보다, 기다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기도에 역사하실지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시 5:4–6)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모든 것을 허용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고린도전서 13장 6절에서는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와 불의를 용납하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분이기에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악이 주와 함께 유할 수 없으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설 수 없다. 성경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렘 2:19)라고 말씀한다. 인간의 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귀에 대하여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짓과 살인이 서로 무관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거짓을 따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며 마침내 생명을 해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거짓을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하게 된다. 요한일서 2장 22절은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거짓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악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피 흘리는 자와 속이는 자를 미워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참으로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악을 미워하시는 것이다.
오직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시 5:7–8)
앞에서 다윗은 악이 하나님과 함께 유할 수 없으며 오만한 자가 하나님의 목전에 설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죄악된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을까?
다윗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라고 말한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였다.
여기서 ‘인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 ḥesed)이다. 이 말에는 사랑, 자비, 신실하심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있기 때문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의지하여 나아갔다.
다윗은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죄 사함의 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하나님은 다윗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므로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한다”는 말씀과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간다”는 말씀 사이에는 복음의 놀라운 진리가 담겨 있다. 죄인은 자기의 의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다윗은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길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운 인도를 구했다. 왜냐하면 자기도 얼마든지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누구든지 자기의 생각과 욕망을 따라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은 자기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당연한 기도이다.
저희를 쫓아 내소서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 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5:9-10)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면서 이 말씀을 인용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롬 3:13)
그렇다면 이 말씀은 행악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윗의 원수들에게서 보이는 죄의 모습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하는 죄의 본성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 내소서”라고 기도한다. 다윗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그들이 “주를 배역함” 때문이었다.
여기서 배역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권위에 맞서고 그분의 통치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결국 모든 사람의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본래 정죄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쫓겨나야 할 존재이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5:11-12)
모든 사람은 죄 아래 있으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죄의 본성이 있다. 그렇다면 멸망받아 마땅한 죄인이 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기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데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위험을 피해 단순히 숨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자기에게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아 그분의 자비와 보호를 의지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죄악된 사람에게 이 말씀은 가뭄에 단비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우리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님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다.
주에게 피하는 모든 자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주께 피하는 자는 결코 쫓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고 주를 즐거워한다. 이는 주께서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길
시편 5편은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악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배역한 죄인은 본래 그 앞에서 쫓겨나 마땅하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를 의지하여 그분께 피하는 자에게는 살 길이 열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를 내어 쫓지 않으시고 오히려 방패와 같이 은혜로 호위하신다. 우리에게 그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