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마태복음 18장 21절과 22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어릴 때는 친구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자고 있는 친구의 다리에 난 털을 하나씩 뽑는 장난을 하기도 합니다. 처음 한두 번은 장난으로 받아줄 수 있지만, 계속해서 털을 뽑으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화를 내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인내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못했을 때 한두 번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잘못이 반복되면 점점 마음이 상하고, 결국에는 더 이상 용서하기 어려워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왜 하필 일곱 번을 말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용서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횟수를 말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용서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제가 잘못했을 때 언제든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수없이 잘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두 번 잘못했을 때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했을 때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오면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사람의 용서에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속입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속은 사람은 자신이 마귀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속임수가 무서운 이유입니다. 사람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속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일수록 마귀의 궤계에서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룟 유다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죄가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비록 붙잡아 넘겨도 쉽게 풀려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죄를 받으시는 것을 보게 되자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은 삼십을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 돈을 받지 않자 그는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죄의 댓가로 자기 목숨을 끊은 것을 보면 자기가 예수님을 팔았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3장 2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가룟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의 배후에 마귀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것을 알았더라면 자기를 정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정죄에서 벗어나 살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수도 없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이 그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마귀에게 속아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를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영원한 멸망을 받았습니다.    

가룟 유다를 속였던 마귀는 오늘도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형편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때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는 “너는 믿음이 없잖아.”, “너는 또 넘어졌잖아.”, “너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너를 도와주시지 않을 거야.”라고 속삭입니다.

그때 우리가 마귀의 음성을 받아 들이면 하나님이 우리를 더 이상 돕지 않으실 것이란 생각에 빠져 소망을 잃고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렘 18:7-8)

멸망받을 사람이라할지라도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내리기로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돕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밤 사경에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작아 의심한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나 의심하여 물에 빠질 때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그의 주님이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을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도 용서하지 못할 때도 많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관대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잘못한 우리를 그렇게 대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 1절에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했을 때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정죄할 이유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을 통해 끝없는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어떠함을 보고 실망하고 낙심할 때에 우리는 언제나 연약한 우리를 용납하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자랑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4장 7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화분에 오이씨 몇 개를 심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싹이 나고 잎사귀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오이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이 하나가 시들기 시작하더니 잎사귀가 완전히 말라 버렸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줄기의 한 부분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젖혀져 있었습니다. 줄기가 꺾이면서 뿌리에서 올라오는 물과 영양분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가지와 뿌리에 대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8)

가지가 열매를 맺었다고 해서 가지가 스스로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뿌리에서 물과 영양분을 공급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좋은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스스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할 때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의 근원을 살펴보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크게 부자가 아니더라도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 것 역시 우리의 능력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아갈 힘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그래서 바울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큰 권세와 영광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왕궁 지붕을 거닐면서 자신이 이룬 바벨론의 영광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단 4:31-32)

느부갓네살의 말에는 “내가”라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내가 능력으로 건설했고, 내가 권세로 이루었고, 내가 나의 도성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거두어 가셨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았고, 소처럼 풀을 먹었습니다. 그의 몸은 하늘 이슬에 젖었고, 머리털은 독수리 털처럼 자랐으며, 손톱은 새 발톱처럼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곱 때가 지나자 비로소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4-35)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이 가진 능력과 권세조차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가진 권세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사람이 가진 재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사람이 이루는 일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은혜가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3)

포수가 총을 쏘아 새를 잡았을 때 포수는 자신의 사격 실력으로 새를 잡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새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높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 역시 우리의 의로움이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고,(골 1: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하셔서 복음을 깨달아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엡 1:7-9)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신앙이 자라는 것 역시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러므로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자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셨는지를 자랑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후 곧바로 가나안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광야를 걷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원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길을 걷게 하신 것은 그들의 마음을 낮추셔서 끝내는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연약과 능력없음을 알게 하셔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 때 우리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며 의지하게 됩니다.

가지가 뿌리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의 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내 것이 다 네 것

누가복음 15장 25절부터 32절까지 읽겠습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물건의 가치는 그 물건의 값에 따라 좌우됩니다. 사람들이 흔한 돌과 달리 금을 귀중하게 여기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기 때문입니다. 만일 금이 돌만큼 흔하고 값이 돌만큼 싸다면, 우리는 금을 돌같이 여길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값이 많이 나가는 물건일수록 더 귀중히 여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요?

이것을 노예를 사고 팔 때 매겨지는 가격 정도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인데, 하나님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사셨다면 하나님께 우리는 예수님의 가치만큼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에, 예수님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물이 다 우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허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향해, 첫째 아들은 왜 화를 내었을까요?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의 마음에 아버지의 것과 자기의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역시 모든 것이 이미 우리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남보다 덜 가진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불평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신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과의 차이가 오히려 불만의 조건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는 말씀처럼, 참으로 사랑한다면 시기와 질투를 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에 자녀가 잘되는 것을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 기뻐하며 자녀의 영광을 곧 자기의 영광으로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이미 내 것임을 안다면, 영적으로 앞서가는 사람을 부러워만 하는 대신 그 사람의 영광이 곧 나의 것임을 알기에 함께 기뻐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고후 1:14)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신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예수님과 우리 역시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든 영광을 우리도 함께 누리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예수님이 아버지께 드린 기도에도 이 사실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22)

고린도전서 12장 2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각의 지체입니다.

몸의 한 부분이 잘되었다고 해서 다른 부분이 그것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손이 일을 잘한다고 발이 질투하지 않고, 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귀가 불평하지 않습니다. 몸의 한 부분이 건강해지면 몸 전체가 함께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생기는 원망과 시기와 분쟁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사실 첫째 아들은 동생이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을 아버지와 함께 기뻐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그의 기쁨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스스로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 무지와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분쟁과 시기와 분냄 속에서 헛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영적으로 어린 자들은 자기 일을 생각하지만, 영적으로 장성한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우리는 계속 영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누가복음 8장 49절에서 56절까지 읽겠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한번은 환자가 의사를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의사는 그 사실을 모르는 환자에게 병과 전혀 상관없는 행동을 시켰습니다.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시키고, 벌을 서듯 손을 들게도 했습니다. 그런데 환자는 놀랍게도 의사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실험이 끝난 뒤 환자에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왜 의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아주 간단하게 “의사이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의 말은 쉽게 받아들입니다. 반대로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말은,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하나뿐인 딸이 죽어가자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집에 와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시는 도중에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찾아와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야이로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오시면 딸이 살아날 수 있다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순간, 그 소망을 붙들 이유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 사람들은 이미 죽은 아이를 두고 울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비웃음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습니다. 아이가 정말 잠들어 있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울며 통곡했을 리 없습니다. 자는 것과 죽은 것을 분간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검은 것을 혼자 희다고 우기는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그의 눈이나 정신을 의심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그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이로는 달랐습니다. 야이로 역시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여 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계속 자기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무엇이 야이로와 그 사람들을 갈라놓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신뢰의 차이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알고 있는 현실을 더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자신이 보고 알고 있는 현실보다 예수님을 더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붙들고 계속 걸어갔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나의 죄를 다 씻어셨기 때문에 나는 거룩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우리를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특히 우리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너를 아는데 거룩하다고? 지나가는 아이들도 웃을 일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비웃는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 역시 신뢰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셨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그들은 자기가 보고 아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믿음의 원리를 잘 보여 주는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로마서 4장 19절에서 21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몸은 백 세로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었고, 사라의 태 역시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야이로가 마주했던 현실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야이로 앞에 “딸의 죽음”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던 것처럼, 아브라함 앞에도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눈앞의 현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는 보이는  현실보다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더 신뢰했습니다.

자식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었던 사라 역시도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후손을 얻게 되었는데 히브리서 11장 11절,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만 믿은 것이 아니라 그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는데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놓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신뢰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는 그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3-25)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 몸의 현실을 알고도 그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더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신 것이 분명하기에 예수님은 야이로에게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라디아서 1장 6절부터 8절까지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세상에는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른 복음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잘못된 복음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반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이 참된 복음인지 다른 복음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복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골동품 가게에 취직했습니다. 그런데 출근한 첫날부터 주인은 다른 일은 시키지 않고 골동품 하나를 주면서 그것을 깨끗하게 닦으라고 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청년은 매일 같은 골동품을 닦는 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그 청년에게 손님을 맡겼습니다. 청년은 처음에는 당황했습니다. 자신에게는 골동품의 진위를 판별할 만한 지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년은 손님이 가져온 물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매일 닦았던 골동품이 진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진품을 날마다 닦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품의 특징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님이 가져온 물건이 자신이 매일 보았던 진품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일리는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사들이 X-ray 필름을 보고 이상 유무를 쉽게 판별하는 것도 정상 조직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상 조직과 다르게 보이면 이상이 있는 것이니까요.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복음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공부하는 것보다,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복음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경고한 다른 복음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도 더해야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공로에 인간의 행위를 더한 것입니다.

한 학생이 자신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선생님,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예수님만 믿으면 뭔가 부족하지 않을까? 그래도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이 얼핏 듣기에는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복음입니다. 물론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합당하게 행하며 선한 일에 힘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선한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그렇다고 그 열매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를 두고 논쟁을 벌였는데, 할례와 같은 종교적 행위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사람이 영생을 얻는 근거가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고, 그를 믿는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든 사건을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서 살아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해서 살아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더한다면, 복음은 더 이상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다른 것을 더하는 순간, 복음은 변질되어 다른 복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레위기 19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이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우리의 행위를 섞지 말라는 영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인간의 공로를 더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의를 더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을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낫게 하신 것도, 죄악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하신 것도, 모두 우리를 사랑하셔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