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조물주가

요한일서 3장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백부장의 하인 사랑과 한계

마태복음 8장에는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는 하인을 위해 예수님에게 나아온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은 종을 독립된 사회 구성원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권한 아래 있는 존재로서 법적으로는 상당 부분 재산에 가까운 지위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이 병들었을 때 그를 한 인격체의 고통보다 노동력과 재산의 손실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중풍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는 하인을 위해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누가는 이 종을 백부장에게 “사랑하는 종”이라고 기록합니다(눅 7:2). 이 백부장이 아픈 하인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 그 하인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랑

그러나 아무리 하인을 사랑하는 백부장이라고 해도 그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위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조물주가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어떠한 사랑’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얼마나 많은 사랑’이라는 정도를 넘어 ‘도대체 어떠한 종류의 사랑인가!’라는 놀라움이 담긴 표현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만일 백부장의 하인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는 불량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위해 예수님에게 나아갔을까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을 때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기이한’ 사랑

다윗은 자기를 완전히 아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기이하다’는 말은 너무 놀랍고 신비하여 인간의 지혜로는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기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그 깊이와 이유를 다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워하시거나 버리셨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우리의 죄와 실패만 바라보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합니다.

마귀의 거짓을 파하는 십자가의 증거

그러나 십자가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의로웠을 때가 아니라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대상인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와 실패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보다, 우리를 위해 채찍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잠 28:26)라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의 행위를 따라 우리를 판단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죄인인 우리에게 먼저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 자신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8)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더욱 깨닫게 되고, 그 사랑을 깨달을수록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더욱 깊어집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는 기쁨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간다고 해도 그 사랑을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 3:18–19)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사랑이면서도 우리의 지식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가지만 아무리 알아가도 그 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기이하여 우리의 지혜로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알아가며 그 사랑 안에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을 이기는 긍휼

예레미야애가 3장 21절에서 23절까지 읽겠습니다.

어느 자그마한 Mall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침부터 한쪽 구석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그는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점심때가 지나도 여전히 그 자리였습니다. 상점 주인들은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음식점 주인이 음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왜 자기를 거지 취급하느냐며 화를 냈고, 주인은 하는 수 없이 음식을 도로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도록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글만 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음식을 그의 옆에 살짝 놓아두고 도망치듯 돌아갔습니다.

그가 자존심 때문에 화를 내도, 사람들은 그가 배고픔으로 당하고 있는 고통을 생각하자 음식을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누가복음 10장에는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채로 버려두고 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도 피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여행 중이던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도와 달라고 소리칠 수도 없었습니다. 거반 죽은 상태라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를 살렸습니다.

예수님이 나인성 가까이 이르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한 과부의 독자 아들이 죽어 사람들이 메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울지 말라” 하시고,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Mall 구석에서 하루 종일 글을 쓰던 사람도, 강도 만난 사람도, 죽은 과부의 아들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어떠함이 긍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긍휼은 심판을 이깁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긍휼

선지자 예레미야는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나라가 망해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멸망의 현장을 두 눈으로 보며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다는 사실을 회상하면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한이 없으시니 자기와 자기 민족이 진멸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반드시 아침 해가 떠오르듯, 하나님이 자기들을 반드시 긍휼히 여기시리라 믿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성실’은 변함없는 신실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기 백성을 반드시 불쌍히 여기시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진노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멸망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귀의 종이 되어 고통당하는 우리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멸망의 길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조차 알지 못하는 우리를 오히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이 두 행악자와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십자가 아래에서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려고 제비를 뽑고 있었습니다. 백성과 관원들은 “남을 구원하였으니 자기도 구원하라”며 비웃었고, 군병들조차 신포도주를 내밀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눅 23:37)고 하면서 희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행위로 보면 저주받아 마땅한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무지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무한한 긍휼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우리도 무지하여 하나님을 불신하고 대적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조물주 앞에서 행한 일을 생각하면, 영원한 멸망을 받고 또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무지를 보셨고,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자 앞에서 짖고 있는 강아지가 있다면 그 사자의 무서움을 모르는 강아지가 안쓰럽고 불쌍해 보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강아지를 사자에게서 떼어놓아 안전한 곳에 두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 긍휼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지함 속에서 영원히 멸망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크고, 우리의 무지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깊으며, 우리가 받아 마땅한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요한복음 9장 1절에서 32절까지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9:1-3)

사람은 저마다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납니다. 어떤 이는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늘 빚과 가난에 시달리는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또 건강하게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병약하게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할 만큼 외모나 신체적 어려움을 안고 태어나는 이도 있습니다.

자신이 부족한 조건 속에서 태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태어날 것인지는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과 인생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그렇다면 남들보다 부족한 조건에서 태어난 사람은 억울한 것일까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놀랍게도 어려움과 부족함이 많은 이들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그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처지를 깊이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셨고, 그는 그 일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며 심문할 때도,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 9:30-33)

만약 그가 맹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을 깊이 알고 믿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문제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에 즉각 응답하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 성경의 말씀처럼 우리의 입술에는 찬양의 열매가 가득 맺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시 126:2)

다윗 역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으나 즉각적인 응답을 받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시편 40편 1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던지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을 때,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 40:2-3)

선지자 사무엘을 낳은 한나 역시 그러했습니다. 오랜 세월 자녀가 없어 눈물로 기도했던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사무엘을 얻은 뒤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삼상 2:1-2)

이처럼 기다림이 있었기에 진정한 감사가 있고, 눈물이 있었기에 깊은 찬양이 있습니다. 이러할진대 어떻게 하나님의 응답이 더딘 것이 불행의 조건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종종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류에게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며,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더 행복했을 텐데”라고 아쉬워합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가 불행으로만 끝나지 않은 것은, 그로 인해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요 11:4)

이로 보건대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일들을 통해 당신이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은, 그 일로 인해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입술에 찬양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자

누가복음 19장 10절을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양과 목자가 함께 있을 때에는 양이 목자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양은 목자를 찾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건강한 자는 의사를 찾지 않지만 병든 자는 의사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떠난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에는 아버지를 찾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먼 나라로 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허랑방탕하게 다 허비한 후에 주려 죽게 되자 그제야 아버지가 있는 집을 생각하며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양이 목자를 찾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찾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다니셨습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자는 구원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만나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 중에는 구원자를 절실히 찾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도 그랬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자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예수님께서 만난 것은 단순히 여섯 번째 남자와 함께 살고 있던 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 여인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보지 않으시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 여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는 말씀처럼 그 여인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베데스다라 하는 못에서 예수님이 만나신 38년 된 병자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8)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못의 물이 움직일 때마다 자기 힘으로 그 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그의 마음에는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절망이 찾아왔고, 결국은 자신을 도와줄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그의 중심을 보셨던 것입니다.

삭개오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 하여 보고 싶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간 사실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리장인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무릅쓰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간절히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던 것은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자기 마음의 갈급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친히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과 악함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어떤 사람은 질병이나 자기 힘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찾음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이 그러했고, 귀신 들린 딸 때문에 고통받던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러했고, 앞을 보지 못했던 거지 바디매오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9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간절히 구하지 않고 사람의 영광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모하고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65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사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잃어버린 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은 사람은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다릅니다.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바로 그런 자에게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예수님은 나의 주시라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다면, 복음을 위해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참으로 즐겁고 행복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이 말씀을 보면,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때때로 자신에게 영생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 사함의 복음을 깨닫고 그것을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마귀가 얼마나 간교하게 사람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마귀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속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1장 7절부터 9절까지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우리의 지혜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죄 사함의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내가 잘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알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는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사람들은 흔히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어야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성경은 우리가 “그 아들 안에서” 죄 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죄 사함의 복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죄가 없어졌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로마서 9장 15절과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에는 예수님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같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의원이 필요 없는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의원이 필요한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무지하면서도 교만까지 하여 하나님의 긍휼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예수님 안으로 옮겨져 예수님 안에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는 말씀처럼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을 읽겠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한 젊은 여성이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그곳에서 한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그 남자가 싫었지만 뱃속의 아이를 위해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결혼을 거부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자의 아버지는 아이를 유산시킬 것을 강권했고, 결국 그 여자는 아버지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아이를 유산시키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여자는 자신이 뱃속의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그 남자를 다시 보는 것이 너무나 싫어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멀리 떠나도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갈 때마다 울면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여전히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혹시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우면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여, 돈을 버는 대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마음속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가 지칠 대로 지쳐 있을 때, 아는 사람의 권유로 한 성경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그 순간 그 여자는 예수님께서 지신 ‘세상 죄’ 속에 자신의 죄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자는 마침내 자신을 잔혹하리만큼 괴롭히던 죄책감과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자기의 노력으로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돕는 선한 일로도 자유를 얻지 못했고, 눈물로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자유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자유를 얻었습니다. 시편 107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107:18–20)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보내어 사람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십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라면 고넬료는 누구보다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으로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말씀을 듣기 위해 자신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43)라는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의 선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유산시키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죄 사함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고, 고넬료의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말씀에는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는 것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 말씀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시며 주무실 때였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부딪혀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말씀하시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죽어 무덤에 있던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시자 죽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자 그 소녀가 곧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믿으면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여 죄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를 얽매고 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합니다. 시편 33장 9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서 1장 17절을 읽겠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토끼가 죽으면 사냥하던 개도 삶아 먹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한신이 남긴 말입니다. 중국 한나라 초기, 한신(韓信)이라는 명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방(훗날 한고조)을 도와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그런데 천하가 평정되자 유방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여긴 한신을 결국 숙청합니다. 한신은 숙청을 당한 뒤 모함을 받아 처형당했는데, 그때 남긴 말이 바로 ‘토사구팽’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왕의 사랑을 받던 사람이 어느 순간 왕의 변심으로 버림받는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람이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 안에서 안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동차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개발되고 변화되어 왔습니다. 자동차가 계속 개발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만일 완전한 자동차가 만들어졌다면 더 이상 새로운 자동차를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완전한 차가 없기에 앞으로도 계속 개발되고 변화될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결코 변개되지 않습니다. 시편 119편 8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날에 울며 사정하면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두려워하며 떨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 불신자들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움직이면 그림자의 위치와 모양도 달라집니다. 해의 위치가 달라져도 그림자는 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는 말씀은, 하나님은 사람처럼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말씀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시편 34편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하나님은 의인을 향한 당신의 눈과 귀를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항상 우리를 주목하시며 우리를 향한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부르짖음에 언제나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34편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고난”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한 번의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변하실 수 없는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모든 고난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여기서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 믿을 만하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다 거짓되어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결같이 신실하신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과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많은 사람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였으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악된 우리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죄에 대한 죄값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마태복음 18장 21절과 22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어릴 때는 친구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자고 있는 친구의 다리에 난 털을 하나씩 뽑는 장난을 하기도 합니다. 처음 한두 번은 장난으로 받아줄 수 있지만, 계속해서 털을 뽑으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화를 내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인내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못했을 때 한두 번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잘못이 반복되면 점점 마음이 상하고, 결국에는 더 이상 용서하기 어려워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왜 하필 일곱 번을 말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용서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횟수를 말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용서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제가 잘못했을 때 언제든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수없이 잘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두 번 잘못했을 때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했을 때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오면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사람의 용서에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속입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속은 사람은 자신이 마귀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속임수가 무서운 이유입니다. 사람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속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일수록 마귀의 궤계에서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룟 유다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죄가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비록 붙잡아 넘겨도 쉽게 풀려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죄를 받으시는 것을 보게 되자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은 삼십을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 돈을 받지 않자 그는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죄의 댓가로 자기 목숨을 끊은 것을 보면 자기가 예수님을 팔았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3장 2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가룟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의 배후에 마귀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것을 알았더라면 자기를 정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정죄에서 벗어나 살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수도 없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이 그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마귀에게 속아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를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영원한 멸망을 받았습니다.    

가룟 유다를 속였던 마귀는 오늘도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형편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때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는 “너는 믿음이 없잖아.”, “너는 또 넘어졌잖아.”, “너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너를 도와주시지 않을 거야.”라고 속삭입니다.

그때 우리가 마귀의 음성을 받아 들이면 하나님이 우리를 더 이상 돕지 않으실 것이란 생각에 빠져 소망을 잃고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렘 18:7-8)

멸망받을 사람이라할지라도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내리기로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돕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밤 사경에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작아 의심한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나 의심하여 물에 빠질 때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그의 주님이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을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도 용서하지 못할 때도 많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관대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잘못한 우리를 그렇게 대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 1절에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했을 때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정죄할 이유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을 통해 끝없는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어떠함을 보고 실망하고 낙심할 때에 우리는 언제나 연약한 우리를 용납하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자랑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4장 7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화분에 오이씨 몇 개를 심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싹이 나고 잎사귀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오이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이 하나가 시들기 시작하더니 잎사귀가 완전히 말라 버렸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줄기의 한 부분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젖혀져 있었습니다. 줄기가 꺾이면서 뿌리에서 올라오는 물과 영양분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가지와 뿌리에 대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8)

가지가 열매를 맺었다고 해서 가지가 스스로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뿌리에서 물과 영양분을 공급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좋은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스스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할 때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의 근원을 살펴보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크게 부자가 아니더라도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 것 역시 우리의 능력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아갈 힘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그래서 바울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큰 권세와 영광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왕궁 지붕을 거닐면서 자신이 이룬 바벨론의 영광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단 4:31-32)

느부갓네살의 말에는 “내가”라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내가 능력으로 건설했고, 내가 권세로 이루었고, 내가 나의 도성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거두어 가셨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았고, 소처럼 풀을 먹었습니다. 그의 몸은 하늘 이슬에 젖었고, 머리털은 독수리 털처럼 자랐으며, 손톱은 새 발톱처럼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곱 때가 지나자 비로소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4-35)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이 가진 능력과 권세조차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가진 권세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사람이 가진 재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사람이 이루는 일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은혜가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3)

포수가 총을 쏘아 새를 잡았을 때 포수는 자신의 사격 실력으로 새를 잡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새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높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 역시 우리의 의로움이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고,(골 1: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하셔서 복음을 깨달아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엡 1:7-9)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신앙이 자라는 것 역시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러므로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자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셨는지를 자랑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후 곧바로 가나안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광야를 걷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원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길을 걷게 하신 것은 그들의 마음을 낮추셔서 끝내는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연약과 능력없음을 알게 하셔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 때 우리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며 의지하게 됩니다.

가지가 뿌리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의 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내 것이 다 네 것

누가복음 15장 25절부터 32절까지 읽겠습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물건의 가치는 그 물건의 값에 따라 좌우됩니다. 사람들이 흔한 돌과 달리 금을 귀중하게 여기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기 때문입니다. 만일 금이 돌만큼 흔하고 값도 돌만큼 싸다면, 우리는 금을 돌처럼 여길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값이 많이 나가는 물건일수록 더 귀하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요?

이것을 노예를 사고 팔 때 매겨지는 가격 정도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의 전부인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값어치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만큼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허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을 본 첫째 아들은 화를 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아버지의 것이 다 자기 것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버지의 것과 자기 것을 구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모든 것이 우리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우리보다 더 가진 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을 위해 더 신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 불만은 더욱 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신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예수님과 우리 역시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리시는 모든 것을 우리도 함께 누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가 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 되면 함께 기뻐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것을 자식에게 주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고 말씀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식이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고전 3:22)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자기보다 영적으로 앞서가는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자기 것임을 알기에 그와 함께 기뻐하며 그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고후 1:14)이라고 말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것이 다 자기 것이며, 동생의 영광조차 자기의 영광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것을 알았더라면 살아 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푼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무지와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분쟁과 시기 속에서 헛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무지를 이용해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