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3장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백부장의 하인 사랑과 한계
마태복음 8장에는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는 하인을 위해 예수님에게 나아온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은 종을 독립된 사회 구성원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권한 아래 있는 존재로서 법적으로는 상당 부분 재산에 가까운 지위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이 병들었을 때 그를 한 인격체의 고통보다 노동력과 재산의 손실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중풍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는 하인을 위해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누가는 이 종을 백부장에게 “사랑하는 종”이라고 기록합니다(눅 7:2). 이 백부장이 아픈 하인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 그 하인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랑
그러나 아무리 하인을 사랑하는 백부장이라고 해도 그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위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조물주가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어떠한 사랑’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얼마나 많은 사랑’이라는 정도를 넘어 ‘도대체 어떠한 종류의 사랑인가!’라는 놀라움이 담긴 표현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만일 백부장의 하인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는 불량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위해 예수님에게 나아갔을까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을 때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기이한’ 사랑
다윗은 자기를 완전히 아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기이하다’는 말은 너무 놀랍고 신비하여 인간의 지혜로는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기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그 깊이와 이유를 다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워하시거나 버리셨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우리의 죄와 실패만 바라보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합니다.
마귀의 거짓을 파하는 십자가의 증거
그러나 십자가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의로웠을 때가 아니라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대상인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와 실패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보다, 우리를 위해 채찍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잠 28:26)라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의 행위를 따라 우리를 판단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죄인인 우리에게 먼저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 자신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8)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더욱 깨닫게 되고, 그 사랑을 깨달을수록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더욱 깊어집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는 기쁨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간다고 해도 그 사랑을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 3:18–19)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사랑이면서도 우리의 지식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가지만 아무리 알아가도 그 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기이하여 우리의 지혜로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알아가며 그 사랑 안에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