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편

다윗은 사람들에게 모욕과 비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 앞에서 증명하려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나아갔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다윗은 자신의 옳고 그름에 대한 최종 판단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겼다. 그리고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기억했다.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라는 고백에는 좁고 막힌 곳에서 하나님께서 넓은 공간을 열어 주셨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다윗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길을 열어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다시 그분의 긍휼을 구했다.

다윗의 대적자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

다윗을 대적하던 사람들은 그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었고, 헛된 것(허사)을 좋아하며 거짓(궤휼)을 추구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도 이들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 하여 낸 신이라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꾼다.(롬 1:23)

또한 그들은 돈과 명예, 권력과 향락 같은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함으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판다.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뱀의 거짓을 따랐던 것처럼 진리보다 거짓을 더 사랑한다.

그 결과 로마서 1장 28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경건한 자를 택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셨지만 멸망을 당하기까지 버리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다윗을 택하여 그들의 왕으로 세우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모든 사람의 구원자로 세우셨다.

여기서 ‘경건한 자’는 히브리어 ‘하시드’(חָסִיד)로,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구별하신 다윗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왕으로 세워진 다윗은 장차 하나님께서 세우실 참된 왕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다윗은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라고 경고한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기를 함부로 대적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죄에서 돌이키라고 말한다.

이 경고는 그리스도 앞에서 더욱 엄중하다. 하나님이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자로 세우신 예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자기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다윗은 격한 감정대로 행동하지 말고 밤에 침상에 누워 자기 마음을 살피며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말한다.

의의 제사를 드려라

다윗은 자신을 대적하던 사람들에게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합당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의의 제사’는 단순히 제사의 형식을 갖추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올바른 제사를 말한다.

사무엘도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의 형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을 대적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분을 의뢰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줄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두고 다윗은 하나님에게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라고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우리 마음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해 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가 평안히 눕고 자는 것도 자기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인생들이 세상이 주는 좋은 것만을 좇지 말고, 모든 참된 기쁨과 평안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고 말한다.

시편 3편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는 악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를 범했다. 그 후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려 했다. 이스라엘의 민심이 압살롬에게로 돌아서자 다윗은 왕궁을 떠나 정처 없는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많은 사람이 다윗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다윗이 겪은 고난에는 분명 자신의 죄에 따른 징계라는 측면이 있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죄를 책망받았고, 그 죄의 결과로 가정과 나라 안에 큰 고통이 닥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장차 오셔서 고난받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예표이기도 하다.

다윗은 자기 죄 때문에 고난을 당했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분을 향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처럼 조롱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물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예수님을 모욕했고,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까지 욕을 했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3)

이 말은 사람들이 다윗을 향해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하던 말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마귀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똑같이 속삭인다.

“너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은 너를 버리셨다.”

“이제 너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마귀가 우리에게서 빼앗으려는 것은 단순한 평안이나 기쁨이 아니다. 그가 노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소망 그 자체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겨 예루살렘을 떠날 때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감람산 길을 올라갔다. 한 나라의 왕이었던 다윗이 이제는 왕궁에서 쫓겨나 머리조차 들 수 없는 수치와 낮아짐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라고 고백한다. 눈앞의 상황만 바라보았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고백이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5–16)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언약까지 폐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 지금은 머리를 가리고 울며 도망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다시 자신의 머리를 들어 주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다윗은 많은 고난을 지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권을 회복하였다.

이 사건에서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는 놀라운 예표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이 울며 감람산 길을 올라갔던 것처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감람산의 겟세마네에서 깊은 고뇌 가운데 기도하셨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성경은 예수님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고 말씀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보다 훨씬 더 깊은 낮아짐을 당하셨다.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을 받았지만,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당하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까지 내려가셨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대로 낮은 곳에 두지 않으셨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지극히 높이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머리를 드신 것이다.

빌립보서 2장 8–9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머리만 드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머리도 들어 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으실 때 하나님은 예수님과 연합한 우리도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셨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그러므로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라는 다윗의 고백은 우리에게도 귀한 고백이 된다. 죄로 인해 머리를 들 수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고 일으키셨다.

다윗이 천만인이 자기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시 3:4)

성산은 하나님의 임재와 왕권이 나타나는 거룩한 시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언약궤를 두심으로 자신의 임재와 통치를 나타내셨다. 시온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다윗의 왕권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예표였다.

다윗은 큰 죄를 범한 죄인이었지만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가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 32:1–2, 롬 4:7–8)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의 부르짖음을 성산에서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다윗이 죄인이었음에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장차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성산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응답은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다는 은혜의 확증이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누워 자고 다시 깨어난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을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어제도 일어났고 오늘도 일어났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도 당연히 눈을 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일 다시 눈을 뜨는 것 역시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붙들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에 우리는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뜰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은 큰 죄를 범했기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이신다 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더욱이 그의 앞에는 자신을 죽이려는 수많은 원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다시 눈을 떴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붙들고 계신다는 은혜의 증거였다.

어젯밤 자신을 붙들어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자신을 붙들어 주실 것을 믿었기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성경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씀한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전 3:2–3)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잠잠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실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일어나시자 노아 시대의 세상은 물로 덮였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소리는 사라졌다. 소돔과 고모라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과 유황으로 멸망하였다.

다윗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구원이 여호와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께 간구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다고 고백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을 당했을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부르짖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는 자신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을 배반하고 압살롬을 따른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했다.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우리는 다윗의 기도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본다. 예수님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용서와 은혜를 구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을 내려 달라고 기도했던 다윗의 기도 속에 미리 비치고 있었다.

시편 2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대적했다. 그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는 더러움이 감추어지지만, “참 빛”(요 1:9)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죄와 불의가 드러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

그러나 죄가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은 결코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처럼 자신의 죄가 드러난 사람은 오히려 그분의 은혜를 입어 죄의 정죄와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얽매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의 속박에서 풀어 참된 생명과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분이다.

그럼에도 죄를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자신을 옭아매는 결박자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라고 말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그랬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다. 죄를 인정하고 빛으로 나아오기를 거절했고, 오히려 자신들이 누리던 지위를 지키려고 예수님을 대적하여 제거하려 했다.

하나님은 지극히 크고 높으신 분이시기에 사람이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한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며 그분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도모가 허사임을 아시기에 그들을 비웃으신다. 인간들이 아무리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반역이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것조차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지 못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를 제거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로 높이셨다. 인간의 대적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 된 것이다.

“하늘에 계신 이”라는 말씀도 중요하다. 인간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이것은 단순히 장소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초월성을 보여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대적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거나 변경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에 의해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고, 오직 자신의 기쁘신 뜻과 계획을 따라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셨고,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또한 바울은 로마서 1장 4절에서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날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메시아 왕이심이 권능으로 드러나고 선포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을 그의 유업으로 주시고, 그의 통치가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 민족만의 왕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에게 통치와 심판의 권세를 주셨다. 철장 앞에서 질그릇이 견딜 수 없듯이, 아무리 강한 세상의 권세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끝까지 대적하여 이길 수는 없다.

따라서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며, 끝까지 자신의 통치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왕이시다.

‘그런즉’으로 시작하는 이 말씀은 앞선 말씀들의 결론이다. 잠언 1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과 그가 세우신 왕을 대적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어리석음에서 돌이켜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교훈을 받을 것을 권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셨기에 더 이상 그분을 대적하지 말고 돌이켜 그 왕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멀리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높으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경외하며 섬기는 가운데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말씀하신다. 왕에게 입맞추는 것은 왕에 대한 존경과 충성과 복종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복종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예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인간이 거부할 수는 있어도 그 왕의 권세를 무너뜨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반역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약속이 주어진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여기서 “복이 있도다”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에 사용된 것과 같은 ‘아쉬레이’((Ashrei)이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시편 2편은 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사람이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시편 1편과 2편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대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신의 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을 누리게 된다.

시편 1편

시편 1편은 히브리어로 ‘아쉬레 하이쉬'(Ashrei Ha-Ish), 곧 “복되도다, 그 사람이여!”라는 탄성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은 어떤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인지를 설명한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는 복 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으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당신 안에 있는 우리를 복 있는 사람의 자리로 인도하실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하셔서, 그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다. 그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 이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나무가 끊임없이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시냇가에 심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이 있다. 바로 ‘심은’이라는 말이다. ‘심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샤툴'(Shatul)로, ‘심겨진’ 또는 ‘옮겨 심겨진’이라는 뜻이다. 씨앗이 우연히 떨어져 저절로 자란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와 손길로 정성스럽게 옮겨 심겨졌다는 의미다.

골로새서 1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예수님 안으로 옮겨 심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메마른 땅에 있던 나무를 물이 풍성한 시냇가로 옮겨 심은 것과 같다.

예수님 안에는 말씀이 풍성하기에 우리 영혼을 적시기에 충분하다. 어려움과 시련이 찾아와도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날마다 말씀으로 우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시편 92편 12-14절도 같은 그림을 보여준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이것이 바로 참된 형통이다.

의인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된다면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에 비유된다. 의인의 마음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지만 악인에게는 그 뿌리가 없다. 그래서 바람이 불 때 그를 붙잡아 줄 말씀이 없기에 바람이 부는 대로 날려 다닐 수밖에 없다.

곡식을 타작한 다음 키질을 하거나 공중으로 던지면 무거운 알곡은 아래로 떨어지지만 가벼운 겨는 바람에 날아간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타작마당의 모습을 비유로 들어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지금 이 세상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키질할 때 바람이 불면 알곡과 겨가 분리되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에는 의인과 악인이 영원히 분리된다. 지금은 악인이 형통하고 견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들의 마지막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아삽은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다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그들의 종말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시 73:17-19)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가지만, 하나님 앞에는 결국 두 길만 있을 뿐이다. 하나는 의인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악인들의 길이다.

하나님은 의인들의 길을 인정하신다. 여기서 ‘인정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다'(Yada)로, 본래 ‘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길을 아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 길에 대해 정보를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형편과 마음, 연약함까지 속속들이 아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는 말에는 의인들의 길을 아시고, 살피시며, 돌보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의인들이 걷는 길은 때로 좁고 협착하여 걷기 힘들고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해야 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이 꼭 필요한 길이다. 반면에 악인들의 길은 많은 사람이 찾는 쉽고 편한 넓은 길이다. 자기중심적인 길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자기 보기에 옳은 대로 행한다.

그러나 두 길의 결국은 너무나 다르다. 의인들의 길은 생명으로 이어지고, 악인들의 길은 멸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의인들의 길에는 비록 지금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장래와 소망이 있지만, 악인들의 길에는 잠시 누리는 기쁨이 있을지라도 소망이 없다.

창세기 1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한 문장만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은 세상에 없다. 이 말씀에는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지니신 창조주 하나님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가운데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일부분만 살펴보아도 그 장엄함과 섬세함에 압도되어 정신을 잃을 정도인데, 하물며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는 얼마나 더 크고 놀랍겠는가.

이처럼 지극히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없는 존재와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입을 가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다윗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3-4)라고 고백하였다. 이보다 더 합당하고 정당한 고백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 놀라운 세계를 펼쳐 놓으신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을 경외하며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 본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 곧 우리의 주인이시라 부르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땅의 처음 모습은 어두움이었다. 그래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였다. 그러나 바로 그 상태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무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곧 빛이 있었고, 어두움은 즉시 물러갔다. 그로 인해 땅은 더 이상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지 않고, 빛 가운데서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

땅은 우리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 마음도 본래 어두움의 권세 아래 있었다. 그래서 혼돈과 공허 가운데 살아가며, 어두움 속에서 고통하고 신음했지만 그 권세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마침내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자 어두움은 물러가고,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빛으로 환하게 밝아져 기쁨과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낮과 밤은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자연적인 낮과 밤과는 다르다. 이때는 아직 하나님이 해와 달을 만드시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5)고 말씀하며, 예수님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곧 빛이시요, 낮이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두움은 빛이 없는 상태, 곧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를 말하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가리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도 바울에게 하신 말씀에 이것이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행 26:17-18)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낮과 밤을 비유로 삼으사,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 가운데 행할 것을 권면하셨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 11:9-10)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람과 짐승을 지으시기 전에, 그들이 살아갈 하늘을 먼저 만드셨다. 이는 마치 아이를 잉태한 여인이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과 같다.

모세가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한 말씀에는,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 1:33)

또한 성경은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 12:14)라고 말씀하며, 예수님도 이렇게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하나님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십 년 동안 앞서 행하시며 도우셔서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행하시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 이로써 과거에도, 현재에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물이 땅을 덮고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은 땅에 아무 일도 행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땅에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땅을 덮고 있던 물을 걷어 내셔야 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생각들을 걷어 내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마귀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생각을 심어 놓았다. 우리 마음이 어두웠던 것은 우리를 힘들게 했던 여러 형편들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마귀가 심어 놓은 그 생각들이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라고 말씀한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좋은 땅이란,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드는 생각들이 제거된 깨끗한 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복음이 온전히 심겨지고 임하게 하시기 위해, 먼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물이 걷힌 땅에는 아직 어떤 생명도 없었다. 오직 메마르고 황량한 땅뿐이었다. 그러나 그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은 땅으로 하여금 풀과 각종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내게 하였고, 삭막했던 땅은 아름다움과 풍성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 35:1-2)

땅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자 메마른 땅에서 생명이 솟아났고, 황량한 곳은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되었다. 하나님은 그 변화를 통해 자신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내셨다.

우리의 마음도 본래 죄로 인해 생명이 없고 소망이 없는 메마른 광야와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마음에 말씀을 보내 주셨다. 그 말씀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 결과 메마른 심령에는 생명의 샘이 흐르고, 절망 가운데 있던 영혼은 소망을 얻으며, 하나님이 이루신 아름다운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찬양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메마름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시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며, 죽은 자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하나님은 해와 달을 단순히 빛을 비추고 낮과 밤을 구분하는 용도로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징조를 나타내는 기능도 주셨다. 해와 달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나타내실 때 때로 그 자연의 질서를 초월하여 해와 달을 통해 기적과 표적과 징조를 나타내셨다.

여호수아 시대에 예루살렘 왕을 중심으로 한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이 기브온을 공격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성경은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수 10:13)라고 기록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연의 질서까지 다스리시며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기적이었다.

또한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해 주셨다. 그리고 그 약속을 확증하기 위한 표적으로 해시계의 그림자를 십 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해의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는 초자연적인 일을 통해 히스기야에게 주신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증하셨다.

그러나 해와 달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의 사건에만 머물지 않는다. 성경은 주의 날, 곧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완성되는 마지막 때에도 해와 달을 통해 징조가 나타날 것​을 말씀한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선포했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행 2:19-20).

이처럼 성경에서 해와 달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 안에서 움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실 때 그것들의 질서를 초월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을 행하시고, 자신의 말씀을 확증하는 표적을 보이시며, 다가올 하나님의 때를 알리는 징조를 나타내기도 하신다.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하나님은 보이는 만물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씨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씨가 뿌려진 땅을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으로 설명하셨다. 또한 목자와 양을 통해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양인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보이는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설명하신다.

하나님은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을 두시고 그것들로 어둠 가운데 있는 땅을 비추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의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것을 보여 주신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나온다. 제자들이 그를 보고 예수님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어둠 가운데 있는 우리의 마음에도 빛을 비추신다. 그리고 그 빛을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