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시고 눈동자처럼 지키신다. 그래서 우리를 범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적하는 자는 겉으로 강해 보이고 형통한 것처럼 보여도, 실상 그들은 강하지 않으며, 형통하지 않고, 결국 멸망에 이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길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핍박받는 우리를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시며,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신다.
30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슥 7:9-11)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한 것이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과 달라서, 은혜를 입술에 머금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 같은 궁핍한 우리를 돌아보시며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에 우리의 부르짖음에 등을 돌리거나 귀를 막지 않으신다.
303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슥 8:3)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와 함께하실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다시 시온으로 돌아오셨다는 것은, 시온이 정결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성경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오심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증거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지만, 이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분명한 증거다.
304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성경은 “군병 중 하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은 바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을 상징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악한 군병에 의해 예수님 안에 있는 피와 물이 흘러나왔던 것처럼 우리의 죄악됨으로 인해 우리의 죄와 더러움을 씻게 하는 샘이 열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긍휼의 문을 여는 것은 우리의 선함이 아니라 악함이며,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이다. 성경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씀한다.
30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말 1:2,3)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셔서 언약으로 그를 택하시고 복을 주셨듯이, 멸망받아 마땅한 이스라엘 백성 또한 동일한 약속으로 보호하시고 지키셨다. 반면, 에서에게는 그런 약속이 없었고, 하나님의 지키심을 받지 못한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우리가 환란과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이며, 아무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
30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2)
사람이 자신의 결국을 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살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결국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각 사람의 결국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용광로 불 같은 심판의 날이 이를 것이며, 하나님을 믿고 의를 행한 자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이 비출 것이라고 하셨다. 죄인은 그 말씀을 믿지 않을 뿐이며, 의인은 그 말씀을 믿고 소망 가운데 그 날을 기다린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느냐의 여부는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느냐에 달려 있다.
307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본 것은, 바로 빛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닫혀 있던 하늘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열렸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천국의 문이 열린 것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낮과 밤을 맞이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해가 뜨고 지기 때문인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도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
308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
예수님은 “구하는 이에게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께 구할 때, 예수님이 우리의 간구를 외면하실 리 없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주라고 가르치시면서 정작 자신은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분이 되고 마는 셈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행하시는 진실하신 분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구한 것이 응답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구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셨음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선하고 완전한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309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2,3)
나병환자는 신체 일부의 감각을 잃어 상처가 생겨도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병에 걸린 것과 같다. 그러나 감각 없는 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입은 나병환자처럼 우리 영혼의 무감각이 예수님을 만나 감각하게 만들었다. 보지 못하는 소경의 답답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바로 그 답답함이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입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들은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느끼고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다.
310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마 13:55-57)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 또한 처음에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였고,변화되어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가 기록한 야고보서의 서두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약 1:1)라고 밝히는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단순한 육신의 형제가 아니라 메시야로 믿고 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분을 평범한 사람이나 선지자, 혹은 성인 가운데 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지만 야고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님이 참된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면,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된다.
311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 때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자 제자들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다. 제자들은 형편에 따라 그들의 마음이 요동쳤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다르셨다. 환경에 따라 변하는 우리는 신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부인돼야 할 존재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부인할 때 예수님을 의뢰하며 따를 수 있다.
31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 18:32,33)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만 달란트를 주인에게 빚진 종이 있었는데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의 빚을 탕감시켜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빚을 탕감받고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했다. 그러자 그 동료가 엎드려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말을 했지만,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 그 종은 주인에게 만 달란트 빚은 탕감은 받았지만, 그를 불쌍히 여긴 주인의 마음과는 만나지 못했다.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사하셨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자기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과는 만나지 못한 사람이 많다. 또한 자신의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 문제를 해결 받고 기뻐하지만 정작 자기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마음과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많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은혜를 입어 나병에서 나음을 입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다.
313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 앞에 나아왔을 때 그가 예수님에게 개 취급을 당해도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예수님이 자기 딸을 낫게해 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리고의 두 맹인이 잠잠하라는 사람들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에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마 20:31)라고 외쳤던 것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구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314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마 23:8-10)
누군가 우리를 보고 선생이라 하면 듣지 말고, 아버지라 하면 그를 금하며, 지도자라고 하면 그를 물리쳐야 한다. 우리의 선생과 아버지와 지도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하는 지혜나 능력이 없는 무지한 형제일 뿐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높임을 받는다면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그 자리를 드리고 겸손히 내려와야 한다.
315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마 26:14-16)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돈 사이에서 돈을 선택했다. 그가 버림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먼저 버리시는 일이 없다. 다만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기에, 그 결과로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자신의 영혼에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헛된 것들만 크게 보인다. 성경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라고 말씀한다. 참된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에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가 진정 복된 사람이다.
3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막 1:16-18)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그는 평생 자기 육신을 위해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수고를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헛된 것을 얻기 위해 평생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인해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믿어 복음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었다. 성경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라고 말씀한다.
317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5-39)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었다면, 아무리 큰 광풍이 일어나 배에 물이 가득 찼을지라도 결국 안전하게 저편에 도착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환경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결국 예수님을 급히 깨울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에 대해 완전한 신뢰를 하고 계셨기에, 그러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평안히 주무실 수 있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의지할 때, 우리의 무거운 짐을 그분께 맡기고 참된 쉼을 누리게 된다.
318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막 7:24)
예수님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결코 숨겨질 수 없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결코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성경은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지 않았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드러나 있지만, 자기 영혼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비밀처럼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인해 고통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의 마음에 복음의 빛을 비추시고, 그 사랑을 친히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구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319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막 11:4-7)
나귀 새끼가 매인 곳에서 풀린 것은 예수님께서 그 위에 타시려 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우리가 복음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일로 우리를 얽어매려 한다. 그러나 사람이 그릇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깨끗하게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가 매여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성경은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320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막 13:3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단지 아브라함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아파트 사무실에서 공지사항을 전달할 때 각 주민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지 않아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것처럼, 성경 말씀은 각 사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마음으로 읽고 들어야 한다.
321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6,37)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능력의 한계 안에서만 역사하신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그분의 행하심에 놀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당신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임신할 수 없던 사라와 엘리사벳을 임신하게 하셨고, 더 나아가 동정녀 마리아마저 임신하게 하셨다. 또한 우리 눈에 전혀 길이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 길이 되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경험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는 진리를 믿게 하신다.
322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 5:4-7)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고기가 없던 곳에 놀라운 양의 고기가 몰려왔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 한 걸음을 내딛으면, 모든 환경이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변화하기 시작한다. 나병환자 나아만이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었을 때, 그의 살은 어린아이처럼 회복되어 깨끗해졌고, 임신할 수 없었던 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때, 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323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7,38)
부모가 죽었을 때 부모에게 잘한 사람보다 잘못했던 자식이 더 슬피 우는 모습을 종종 본다. 부모가 죽은 후에 불효했던 자식의 슬픔이 더 큰 것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후회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옥합을 깨뜨린 사람이 착하게 산 사람이 아닌 동네에 죄를 지은 여자였던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악한 자인 것을 아는 사람이다. 어쩌면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32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눅 9:14-17)
어떤 정치인도 모든 사람의 필요를 다 채워주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우고도 남음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엡 3:20)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주시기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라고 말씀한다.
325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 12:7)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면 우리의 어떤 것도 하나님에게는 숨길 수 없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리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가리려고 하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불가능하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모습 그대로 우리를 귀하게 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를 정죄하는 것도 무익하다.
326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이 추구하는 바는 달랐다. 많은 차가 고속도로를 함께 달리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목적지가 다 다른 것처럼 많은 사람이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지만, 각자의 마음이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육체의 욕망이 채워지기를 소원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한다. 성경은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라고 말씀한다. 말세를 만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날을 더욱 사모하는데 마침내 하나님은 우리가 기쁨으로 그날을 맞이하게 하실 것이다.
327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1-14)
세리보다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자기가 아닌 세리를 의롭다고 하셨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자기의 판단을 따라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는 자를 멸시하고 정죄한다. 이런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서 하나님의 판단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동일하게 악하다는 하나님의 판단을 알기에 자기를 높이기보다는 오히려 낮추게 된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자기를 의롭게 하시고 지극히 높이셨다는 사실을 알기에 악한 자기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즐거워 한다.
328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4-46)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찢어졌다. 죄로 인해 닫혀 있던 천국 문이 예수님으로 인해 열렸던 것이다. 그 문을 통해 천국 길이 곧게 뻗어있고, 천국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휘황찬란하다. 그러나 이 문이 언제까지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눅 13:25)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9-11)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마 12:8)인데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열린 천국 문으로 들어가 안식하게 된다.
329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눅 24:5-8)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고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는 그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제자들 역시 그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씀 또한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무엇보다 먼저 그 말씀의 절대성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330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요 5:36)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은 어떤 인간도 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 속에서도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증거다.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린 것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증거였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삶에도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언제나 죄가 있다고 여겨지던 우리가 이제는 “죄가 없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기적 중의 기적이며,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도움과 은혜가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분명한 증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