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선3

창조의 완성

 


린도후서 5장 17절 한 절만 읽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있는 자유의지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지 않고 당신의 계획대로만 움직이게 하셨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상주시거나 심판하실 수가 없습니다.

바닷가에는 수많은 게들이 다른 동물들처럼 앞으로 기어가지 않고 옆으로 기어다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시고 그들이 앞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가는 것을 문제 삼는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는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이 없다면 우리는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는 한 부부가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편은 무선 리모컨으로 장난감 자동차를 조종하고 있었는데 그 자동차는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왼쪽으로 조종하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조종하면 오른쪽으로, 빠르게 달리게 하면 빠르게, 느리게 가도록 하면 느리게, 자동차는 남편이 원하는 대로 정확하게 움직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옆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강아지의 목을 묶은 줄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아지는 자동차에는 아무런 관심 없이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낑낑대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자동차와 주인의 의지와 달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강아지는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보다는 말을 잘 듣지 않을지라도 마음을 가진 살아있는 강아지와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그런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당신의 말씀에 전혀 거부하지 않고 순종만 하는 기계 같은 인간을 만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지 않고 당신처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기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의지를 존중하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막지 않으신 것은 아담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담이 선악을 알게 된 것으로 많은 고통도 당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담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타락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이 마치 하나님의 실수인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인간 창조가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아시고 미리 예수님을 준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지혜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절대 실수나 실패를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아무리 악을 행할지라도 그것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사람을 새롭게 재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실 때 그것은 인간 창조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대한 말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의 큰 맥락을 보면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 대해 개괄적으로 말씀하고 있고, 창세기 2장 1절에서부터 3절까지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천지와 만물을 다 만드시고 안식하신 부분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 4절부터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설명은 요한 계시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점에서 보면 요한 계시록은 장차 일어날 미래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능력 차이입니다. 우리는 찰나와 같은 현재만 볼 수 있지만 알파와 오메가인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한눈에 다 보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 타락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은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한 그릇에 비유됩니다. 예레미아 18장 1절에서 4절까지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터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토기장이는 그 터져버린 그릇의 진흙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토기장이는 하나님에 대한 비유인데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21-24)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모든 사람은 천히 쓸 그릇인 진노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어 그 사랑을 믿고 당신에게로 돌아오는 자는 귀히 쓸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요한1서 4장 9절, 10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진노의 그릇인 타락한 사람은 마귀에게 속해 하나님에 대하여 귀머거리이며,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셔야 했습니다.

요즈음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경우가 많아서 귀여운 손자가 태어나도 직접 보지 못하고 화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할아버지는 사랑스러운 손자를 직접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서 보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손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있지만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자식의 집에 가서 그 손자를 보게 되면 그제야 손자는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되고, 할아버지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게 되면서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사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함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충분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보다 더 잘 나타내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때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영혼은 한없는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 긍휼의 그릇인 귀히 쓸 그릇이 되었습니다. 이 긍휼의 그릇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새 것 곧,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긴 거룩한 자로, 율법을 지키지 못한 우리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신 예수님의 의를 가진 의로운 자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할 자로 재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완성입니다.

결국 이 땅에는 천히 쓸 그릇인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귀히 쓸 그릇인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귀히 쓸 그릇인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를 바라십니다.

이사야 54장 7절부터 14절까지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와 같도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하지 아니하며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려야 할 진노를 예수님에게 대신 내리심으로 인해 우리 죄로 인해 우리에게 노하지 않으시며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신 것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잘잘못을 가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책망의 대상이 아니라 불쌍히 여김을 받아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를 판단할 지혜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과 다투기보다는 오히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긍휼 앞에 감사함으로 무릎을 꿇어야 할 자입니다.

성경에는 천국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천국에 관해서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인간의 상상을 넘어서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곳이라고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천국을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소유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악한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도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이지만 하나님이 그 엄청난 천국을 공짜로 주신다는 것도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힘든 관대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대함을 넘어 두려운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 것을 보면 경이로움보다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한번은 배를 타고 나이아가라 푹포의 물이 떨어지는 곳 가까이 갔는데 그곳에서 마치 하늘에서 거대한 양의 물이 떨어지는 것 같은 엄청난 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니까 그 웅장함 앞에서 입이 딱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 놀라운 관경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에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훨씬 더 많은 양의 물이 떨어진다면 장엄하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두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두려운 분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분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나 엄청나고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지극히 보잘것없는 존재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앞에 온 마음으로 감사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는 세례 요한의 말처럼 하나님은 타락한 우리를 버리고, 돌을 가지고도 당신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을 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모든 사람을 귀히 쓸 그릇으로 만드시지 왜 천히 쓸 그릇과 귀히 쓸 그릇으로 만드셨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0,21)고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이며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기에 당신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런 목자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정에 태어난 자식보다 더한 행운이며 기쁨입니다.

지혜가 없는 자는 지혜 있는 자의 말을 따라가면 안전한 것처럼 무지한 우리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고 따르는데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행하도록 도우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게 될 때 우리는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