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8장 26절을 읽겠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예수님이 잡히시는 날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잡히시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도 멀찍이 예수님을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그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말을 하자 베드로는 저주와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했고, 그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할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라면 어떤 악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만큼의 자신의 악을 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아람 군대로 에워싸인 사마리아가 먹을 것이 없게 되어 크게 굶주리게 되자 자신의 아이를 잡아 먹은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위해 자식을 버리고 도망하는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우리 인간 속에 내재하고 있는 악들을 감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기 전까지는 간음 중에 잡힌 여자와는 자기가 다르며,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과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라고 성전에서 기도한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베드로 역시 자신이 다른 제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할 동안에는 예수님에게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후에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는 것을 보시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며 자신은 떡 때문이 아니라 자기 영혼의 문제로 인해 예수님을 따른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과 달리 정확히 그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성경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 인해 자기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다른 제자들에 비해 예수님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두려움 속에 있는 그를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라면 그 모든 은혜를 짓밟아 버릴 정도로 악한 자신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자인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게 되자 그는 자신을 더 이상 의뢰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심한 어려움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심지어는 욕을 하며 저주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알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자신을 남보다 낫게 여기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자신이 얼마나 악한 자인 것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자신의 악을 깨닫기 전에는 마음에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자신의 악함을 본 사람은 자신을 기대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고 예수님만 의뢰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입니다. 자신의 악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아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악을 다 깨우치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고 자신을 정죄하여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악으로 인해 자신을 정죄는 하였지만 여전히 자신을 의뢰하는 그 의뢰는 버리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알았더라면 더 이상 자신을 기대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처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악함을 보면서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회개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변하자 그제야 악한 자기를 아시면서도 버리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을 보면 베드로가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1서 4:19)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베드로의 악함을 미리 아신 예수님이 그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악한 베드로는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 사랑을 보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롬 4:4)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께 자기가 행한 일로 인해 오히려 보상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악함을 보는 사람은 자기를 높일 수 없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