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서 4장 16절에서 19절까지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1서 4:16-19)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완전하다(perfect)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처럼 마귀의 정죄 속에서 항상 마음이 주눅이 들어 하나님 앞에 담대하지 못하고 쭈그려 있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마음의 두려움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완전’이라는 말은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것이기에 우리에게 어떤 것도 요구할 것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행위에 따라 우리에 대한 사랑이 변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 아닌 조건적인 사랑이 됩니다. 조건적인 사랑은 조건이 충족될 때는 사랑이 지속되지만, 조건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 사랑은 깨어지고 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조건적이라면 죄악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완전한 것이기에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은 그 사람에게 올무가 되어 그 사람을 구속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것도 요구할 것이 없는 완전한 사랑인데도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옳게 보이기 위해서 선을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함이 있을 수가 없고, 선을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것은 절대 깨어지지 않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변하거나 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시기 전인 영원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범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들을 씻어 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이 짓는 많은 죄로 가득 차 있는데도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자신들의 헐벗은 것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들의 헐벗은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도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하나님이 두려움 속에 있는 그들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처럼[고전 13:5] 완전한 사랑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일을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이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낸 이유도 만일 그들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영생을 하게 되면 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목숨을 드리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1서 4:9,10)라고 말씀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어떤 흠이나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1,22)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비록 자신이 악을 행하고 잘못을 한다고 해도 변함없이 자기를 용서하고 사랑해줄 대상을 찾는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 18:22)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이렇게 할 수 없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악 된 우리는 어떤 죄를 지어도 우리를 언제나 용서하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1-3)라고 말씀하면서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10)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신이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그 모든 죄를 용서하셨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조건적이어서 우리의 행위에 따라 변한다면 누구도 안식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부족함도 없는 완전한 사랑이시기에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헛된 수고를 내려놓고 하나님 안에서 쉬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 사랑을 모른다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