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33절, 34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사람은 알게 모르게 자신을 정죄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법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도 하지만 동일한 법으로 자신을 판단합니다. ‘내가 그때 분을 내지 않았더라면’, ‘내가 거짓되지 않고 좀 더 진실했더라면’, ‘내가 욕심만 내지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인데’ 등등 많은 것으로 자신을 정죄하며 그런 일을 행한 자신을 미워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정죄하는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인지만 자신이 자신을 정죄하는 것 역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줍니다.
가나안에 있던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왔을 때 요셉은 그들을 정탐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 42:21)라고 말을 했고, 맏형 르우벤도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창 42:22)라고 말하며 서로를 정죄했습니다. 우리 역시도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요셉의 형들처럼 우리가 잘못했던 일을 떠 올리며 자신을 정죄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 다른 사람이나 자기를 대하는 것을 보면 마치 그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성경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속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는 것 또한 포함됩니다. 그런데도 말씀과는 달리 우리는 다른 사람은 용서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두 사람은 동일하게 범죄하였지만 가룟 유다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동일하게 자신을 정죄하여 심히 통곡하였지만, 그는 모든 죄를 사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정죄에서 벗어나 복음의 귀한 일군이 되었습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 3:10,11)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 정죄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바사왕 아하수에로 때에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지도 아니하고 절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모든 유다인이 죽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는 왕비인 에스더에게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에 4:8)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에스더는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지가 이미 삼십일이라”(에 4:11)라고 말하였습니다. 에스더의 말처럼 사실 아하수에로왕은 자신의 안뜰에 들어오면 죽일 수 있는 법과 살릴 수 있는 법을 동시에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도 당신 앞에 나아오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율법과 살릴 수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동시에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는 마음으로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섰을 때 아하수에로왕이 그에게 손에 잡았던 금홀을 내밀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 앞에 나아오는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율법이 아닌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만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으로 만나지 않으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을 십자가에서 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기에 우리는 심판의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알리면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라고 말을 했고,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이 그들이 요셉을 판 죄에 다시 매여 두려워하자 요셉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19-21)라고 하며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이 형들에게 하는 위로가 하나님이 스스로 정죄하는 우리에게 하시는 위로입니다.
성경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처럼 자신이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고 정죄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복음을 믿는 사람이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혹자는 지옥이 뜨거운 불못이기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곳에서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영원히 자신을 정죄하기에 더욱 고통스러운 곳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보고 계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다른 어떤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될 때 나의 영혼은 큰 힘을 얻고 마음에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풍요롭게도 해야 하지만 동일한 말씀으로 자신을 풍요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죄도 용서하셨지만, 나의 죄도 용서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