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장 18절에서 22절까지 읽겠습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18-22)
사람마다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목자가 어린 양을 품듯이 자기를 품어주는 따뜻한 분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이 죄를 지으면 자기를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은 달라집니다. 성경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죄나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이 아니라 우리를 돕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막 1:40)라고 말을 하자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1)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가 문둥병에서 낫기를 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땅은 어두움에 싸여 있었는데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창 1:3)고 말씀하시자 빛이 있었고,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땅을 덮고 있던 물을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셨고, 천하의 물을 한곳으로 모아 땅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땅이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이 땅에 행하신 일이 곧 우리 마음에 행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 되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생각을 제거하셔서 우리 마음이 말씀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원하심이며 그것을 또한 친히 이루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원함을 따라 우리 죄에 대한 대속물로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야곱이 축복받기 위해 아버지 이삭에게 나아갈 때에 어머니 리브가가 그로 축복을 받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꾸며준 것에 비유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주기를 원하시는 그 원함이 우리로 흠이 없고 어떤 책망도 받지 않을 완전한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 앞에 서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부족함을 느껴 무엇인가를 더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하며 악한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마음이 두려워하기도 하고 평안을 누리기도 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자기들을 향한 요셉의 사랑을 보았을 때는 가나안에 있는 자기들의 온 가족을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데려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이 죽자 그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을 생각하며 그것에 매이게 되자 요셉이 자기들을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지만 불완전한 우리의 행위를 보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보게 하는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미 거룩하게 된 우리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 된 우리를 보게 함으로 우리를 두려움 속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울 때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 17:8,9)라고 외쳤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자기를 이기지 못하면 자기의 종이 되어 자기를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만일 우리가 마귀에게 져서 거룩한 자신이 아닌 죄짓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를 이기고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반석되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자기 생각 위에 서게 되면 혹독한 마귀의 정죄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잠 28:26)라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압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집요하게 달려듭니다. 마귀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우리의 구원을 흔들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사실 위에 서서 마귀와 싸워 마귀가 주는 정죄를 물리쳐야 합니다. 이 싸움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동일하게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싸움을 한다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방증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늘나라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 어떤 책망도 받을 것이 없는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 앞에 이렇게 세우기를 원하셨고, 당신의 원함을 따라 이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사 43: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