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1장 11절에서 18절까지 읽겠습니다.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찌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룻 1:11-18)
성경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 6:24)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에 대제사장이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 14:61)라고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라고 사람들에게 물었고, 예수님보다 대제사장의 말을 더 크게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고 예수님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쳤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은 그것이 올무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애굽 바로의 떡굽는 관원장이 나무에 달려 죽은 이유도 예수님을 의미하는 떡 세 광주리 위에 자기가 수고로이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을 더 높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은혜를 입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보는 형편이나 생각들을 무시하고 하나님만을 높였습니다. 아직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창 15:5)고 말씀하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후 백 세가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나 자기 아내가 너무 늙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아는 것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봄으로 인해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포도즙을 짠 바로의 잔을 들고 바로 앞에 나아감으로 인해 죽임당함을 면하고 전직이 회복되었던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자기의 모든 것 위에 올려놓습니다.
나오미의 며느리 룻 또한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날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죽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보았고, 그 역시 자기 남편이 죽는 고통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룻은 다 망해 버린 시어머니가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 하자 그도 시어머니와 함께 가려고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자기와 함께 가려는 그를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을 하면서 나오미를 따라갈 뜻을 절대 굽히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룻이 어떤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민족을 많은 기적과 함께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말할 수 없는 은혜로 광야에서 그들을 먹이시고 기르신 하나님을 알고 믿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따르려고 한 것을 보면 그가 당한 어떤 고통보다도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 모든 형편 위에 하나님이 세워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때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는 이유는 하나님보다 자기가 당하는 형편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보고 한없는 영광과 감사를 드렸지만 이내 마실 물이 없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유는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보다 물이 없으므로 갈증을 느끼는 그들의 고통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 무엇이 더 높게 자리를 잡고 있느냐에 따라 소망을 가질 수도 있고, 근심과 두려움에 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아진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로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될 때 우리 마음에 있는 근심과 두려움은 사라지게 되고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빛이 어두움에 비치면 어두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빛으로 차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형편이 더 크게 자리 잡게 합니다. 마귀는 우리로 우리의 악한 행위를 보게하여 스스로 정죄하게 만들어 복음을 위해 달려가는 마음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도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들을 무시한 채 하나님의 말씀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라고 말씀하며, 또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3,24)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걸음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그 길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머뭇거리지 말고 계속 경주해 나가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보기에 불행하거나 슬퍼 보이는 일들을 만날 때도 그런 일들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놓아 슬픔에 언제까지 잠겨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라고 말씀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로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선하신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높일 때 우리는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