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로우신 하나님

마서 3장 26절을 읽겠습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


어떤 재판관이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한다면 그는 공의로운 재판관이 아닙니다. 공의로운 재판관은 뇌물이나, 혈연이나, 학연 등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법대로 판결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법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따라 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시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고도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능력 없는 우리와는 달리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시 103:20)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 3:14)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에 절대 더하거나 덜하지 않고 한번 하신 말씀 그대로만 행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고 업신여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귀와 엄위는 손상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절대 변개하지 않고 영원히 지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며, 그 공의는 절대 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을 동시에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법’에 따라 죄를 지은 우리를 반드시 심판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우리 죄를 넘겨 우리 대신 예수님이 사망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라고 말씀하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내리신 심판은 곧 죄를 지은 우리에게 내리신 심판이었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법’을 우리에게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죽은 예수님을 살리실 때 우리도 함께 살리심으로 ‘생명의 성령의 법’을 또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행하심으로 당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게 해 놓으신 사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다 이루십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길을 가실 때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말하자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을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의 간구하는 소리를 듣고도 지나쳐 버리신다면 예수님의 공의는 깨어져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저를 부르라”(막 10:49)라고 말씀하셨고, 그가 예수님에게 나아오자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을 하자 예수님은 그가 구하는 대로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딸이 귀신 들려 고통을 당하던 수로보니게 여인이 당신에게 나아왔을 때도 동일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의 믿음을 보이기 위해 잠시 개 취급하였지만 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의 딸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한 번도 당신에게 은혜를 입기 위해 나아온 사람들을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기에 우리도 하나님에게 감사함으로 구할 것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히 13:8)하신 분이기에 우리의 구함을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10:11)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0-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한 사람  중에 싸움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육백 명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족까지 고려한다면 그 수는 참으로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도망을 다니면서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부족을 채우시는 것을 보았고, 그로 인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노래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애굽에서 나온 수백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생활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따라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로 그들을 먹이시며, 의복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심으로 그들 역시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아는 사람들은 다윗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도 동일하게 행하실 것을 알기에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그러면 신실하신 하나님은 말씀대로 그들의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시고 다윗의 입술에 찬양의 열매를 맺게 하셨듯이 그들의 입술에도 동일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참으로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때때로 육신의 생각 속에 빠져 고통스러워할 때도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은 성경은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시 66:9)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우리로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손을 잡으시고 우리를 고통에서 반드시 이끌어 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따라 행하시는 공의로운 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배우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깁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지상의 어떤 것들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천국을 유업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기에 천국을 우리의 본향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마귀의 유혹을 이기며 나그네와 이방인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우리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여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게 살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신 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