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모습 그대로

도행전 10장 9절에서 16절까지 읽겠습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행 10:9-16)


관공서에서 일을 보기 위해 자기 생각에 필요한 서류들을 주밀하게 챙겨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서류를 들고 관공서에 가면 정작 관계자는 그 서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본인인지 아닌지만 확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자신이 얼마나 공연한 헛수고를 했는지를 알고 허탈감을 느낍니다. 그런 것처럼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옳게 보이려고 많은 수고를 하였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까지도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벌거벗은 자처럼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행위를 문제 삼지 않으시고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죗값인 사망을 우리 대신 치르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에서 해방을 받게 되었고, 심판받을 죄가 전혀 없는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용서받은 행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기에 자기를 꾸미려고 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선한 행위로 자신을 가리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 앞에 자유가 없습니다.

어떤 학생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선생님에게 우리가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예수님만 믿기에는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며, 우리를 부족함이 전혀 없는 완전한 자로 만드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친히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완전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할 때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천국을 가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겨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신의 뜻임을 보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는데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라는 소리가 있었고, 베드로는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를 찾아온 고넬료 집의 사람들을 따라가 복음을 전하여 고넬료 집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죄도 씻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눈으로 우리를 보면 우리는 죄악투성이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의 모든  죄가 흰 눈처럼 깨끗하게 씻겨진 거룩한 자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얻게 된 거룩은 깨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이기에 우리가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람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갈 때 자신의 행위를 아름답게 보이려고 꾸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든 간에 입장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기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꾸미려는 헛된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라고 말씀하며, 또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나 같은 자가 감히 하나님 앞에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거룩하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대함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1서 3:21)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고 난 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하나님을 향해 담대함을 얻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정죄할 것이 없는 깨끗한 자로 만드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하나님 앞에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옳다함으로 자기를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자기에게 매이지 않고 오직 자기를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찬송가에 보면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에 의심을 가득하게 넣어 놓았는데 우리가 그 의심을 버리고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님만을 바라볼 때 우리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대함을 얻을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