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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사람은 선악을 알기에 끊임없이 선을 행하려 하고, 할 수만 있다면 선한 율법을 지켜 자신을 거룩하게 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 속에 있는 죄로 인해 결국 죄인으로 드러나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 즉, 스스로의 행위로는 결코 거룩하게 될 수 없었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이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자를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따라서 누군가가 “나는 의롭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모든 죄를 씻으셨음을 믿는 고백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여전히 자기 행위에 매여 있다는 증거다. 성경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믿음과 율법은 공존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세계이며, 모든 사람은 이 두 세계 중 하나에만 속해 있다. 믿음과 율법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지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362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무르러 들어가셨을 때, 삭개오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했다. “주여, 보시옵소서.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라고 말씀하셨다.

삭개오가 구원을 받자 그의 마음은 새로워졌고, 이전의 육신적 욕망에서 떠나는 변화가 나타났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다. 한때 우리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았지만, 이제는 영의 인도하심을 받아 거룩함에 이르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363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7)

어떤 사람이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곁에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홀로 발버둥치며 그 어려움을 감당하려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도 우리가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처럼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고아처럼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364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을 갖기는 참으로 어렵다. 마귀는 기회만 있으면 사람이 자기를 높일 수 있는 조건들을 보게 하여 교만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이 예수님을 배우지 않고는 예수님과 같은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서는 예수님의 흔적이 드러나는데, 이는 그가 오랜 세월 예수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겸손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365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우리가 죄 사함의 비밀을 깨달아 예수님 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죄 사함의 비밀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람이 어두운 곳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밝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보이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어둠 속에 있던 우리를 빛이신 예수님 안으로 인도하시어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 밖에 있는 자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 안에 있는 자이다.


366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침례는 세상을 따르던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죄 없는 거룩한 자로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침례를 받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예수님이 물 속에서 장사되실 때 우리 역시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 자신도 그분과 함께 살아났음을 믿는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367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복음을 머리로만 아는 사람은 죄가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죄를 이길 힘이 없다. 하지만 복음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복음의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이러한 삶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말씀대로 이루는 능력이 있지만, 말씀을 지식으로만 아는 사람에게는 이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씨앗이 흙 위에 떨어져 싹을 틔우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흙 속의 씨앗처럼 심겨져 결국에는 그 안에서 역사하고 열매를 맺게 된다.


36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18)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일에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즐겁고 행복할 때는 감사하기 쉽지만, 어려움이나 슬픔을 만날 때는 결코 기뻐하거나 감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게 인도하시는 자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셔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이 결국 우리 영혼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에야 비로소 모든 일에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언제나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369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3-5)

하나님이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지키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악한 자를 이길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을 때, 그 믿음이 우리를 악한 자로부터 승리하게 한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과 인내를 우리에게 보여 주셔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도록 이끄신다.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를 위험에서 보호하며 사랑으로 돌봄으로 자녀의 마음에 부모의 사랑이 커져가는 것과 같다. 성경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라고 말씀한다.


370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1-4)

우리가 먹는 음식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에 모두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받는다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성경에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사 45:7)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든 것까지 창조하셨다. 그렇기에 음식뿐 아니라 우리가 싫어하는 환난조차도 결국은 선한 것이며,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항상 살리는 일을 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우리를 살리고 소생시키는 것들이다.


37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수르 광야에서 사흘 동안 물을 찾지 못하다가 마라에 이르러 마침내 물을 발견했지만, 그 물이 너무 써서 마실 수 없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셨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물이 단물로 변했다. 이처럼 우리가 마치 쓴물 같은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나무 되신 예수님과 연결되는 순간 그 고통은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마음을 주신 적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이 다시 하나님과 연결될 때, 우리를 억누르던 두려움은 즉시 사라진다.


372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밭에 감추인 보화를 보지 못한다면 결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살 수 없고, 값진 진주임을 알지 못한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살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주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육신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온 생애를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 마치 육상 선수가 결승선만을 바라보며 달리듯, 하나님의 상 주심을 확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상을 향해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달려간다. 믿음 없이 믿음을 지킬 수 없고, 믿음 없이 복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 없다.


37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3-5)

선의 최정상에 계신 하나님과 우리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마치 악의 깊은 뿌리 끝에 서 있는 존재와 같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신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크신지를 가늠할 수 있다. 별마다 영광이 다르듯이, 각 사람의 마음속에 빛나는 하나님의 긍휼도 서로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은혜가 클수록 선한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딛 1:16)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374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몬 1:16-18)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는 그곳에서 구원을 받았다.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의 종이었는데, 도망친 상태였다. 당시 종은 주인의 재산에 불과했기에 인간적인 대우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구원받자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를 더 이상 종으로 보지 말고,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오네시모는 종에서 형제로 신분이 바뀌었다.

사실 우리도 오네시모처럼 하나님께 고통을 주고 그분을 떠난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로 받아주셨다. 성경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라고 말씀한다.


375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 4:8-10)

여호수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육신의 안식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참된 안식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여호수아가 준 안식은 육신적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은 영원하고 참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직도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중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의 안식을 누릴 수 없다.


376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7-13)

이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두 언약을 잘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후 한 약속을 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는데, 성경은 이를 첫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해 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결국 인간의 행위를 조건으로 한 첫 언약은 인간의 죄악됨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안에 머물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흠이 없는 두 번째 언약을 세우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죄값인 사망을 치르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주신 것이다. 이 두 번째 새 언약은 첫 번째 언약과 달리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절대 깨어지지 않는 완전한 약속이다.


377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세상이 지어졌을 때, 우리가 직접 보지 못했어도 그것을 아는 이유는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셨다는 말씀을 믿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또한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더라도 우리가 거룩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예수님의 단 한 번의 제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거나 보지 못한 세계를 알게 한다.


37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한 나라의 왕이 말을 자주 바꾸거나 법을 수시로 고친다면 백성들은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만약 하나님도 인간처럼 자신의 말씀을 번복하신다면 우리는 늘 불안 속에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한 번 하신 말씀을 결코 변개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변함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임한 참된 평안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시 119:89)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굳게 신뢰하게 한다.


379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마귀를 알지 못하면 마귀를 대적하는 일이 막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귀가 우리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라”(약 3:14,15)고 말씀한다. 반면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약 3:17)라고 말씀한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과 다른 마음은 마귀가 주는 마음이며, 우리가 대적하고 싸워야 할 대상임을 알 수 있다.


380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두 기생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 아이는 결국 친어머니의 품에 안겨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품에서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닌 여인은 솔로몬이 아이를 칼로 반으로 나누라고 했을 때조차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아이에게 잔인했다.

우리도 한때는 우리를 영원한 불못으로 끌고 가려는 잔인한 마귀의 지배 아래 있었고, 그 속에서 고통과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그 마귀의 손에서 건지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셨고, 마침내 우리를 지극한 사랑으로 품으시고,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어 주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이사야 46:3-4).


38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우리는 때때로 불시험을 겪을 때가 있다. 금을 불로 연단하듯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세속적인 것들을 태워 없애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믿음을 성숙시켜 굳건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이 바로와 홍해 사이에 갇혔을 때, 그들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까지 인내로 견뎌야 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지기까지 인내로 불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382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벧후 3:18)

사람이 음식을 먹고 성장하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을 영적 양식으로 삼아 점점 자라간다. 사도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도, 깨닫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말했다. 하나님 안에서 성숙한 사람은 어린아이의 말과 생각, 행동에서 벗어나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 안에는 점점 예수님의 형상이 이루어져 간다.


383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한 부류는 마귀가 주는 세상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며 그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성전에서 찬송을 인도했던 아삽은 악인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난당하는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려 “거의 넘어질 뻔하고 걸음이 미끄러질 뻔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악인들의 종말을 깨닫게 되었고,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나이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시 73:18-19).

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에서 고난받는 삶을 살아가는 의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악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결말에 이르게 돤다.


384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 1:7)

마귀가 인간을 미혹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만드는 데 있다. 특히 마귀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사실을 부인하도록 미혹한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은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죄의 삯인 사망을 대신 치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부인하게 되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막 1:24)라고 외쳤던 것처럼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로 남게 된다. 결국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대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마귀에게 속해 예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385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 1:14,15)

새가 지저귀는 것은 새이기 때문이며, 개구리가 개굴거리는 것은 개구리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그가 경건하지 않기 때문이며, 의로운 자가 의롭게 행하는 것은 그가 의롭기 때문이다. 마귀의 자녀로 태어난 자에게서는 마귀의 성품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자에게서는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다. 성경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 3:9)고 말씀한다.


386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0,21)

무리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은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심지어 생명을 드리는 일도 분명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값진 승리는 마귀가 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데 있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정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은 바로 우리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387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3-17)

많은 사람은 어제도 오늘도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졌기에, 내일도 역시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어제처럼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형벌이 없었기에, 내일 죄를 지어도 아무 일 없으리라 여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죄에 대한 심판을 즉시 내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담대히 죄를 짓는 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멸하신 분이시다.그 심판들은 앞으로 다가올 심판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으며,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크고 두려운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 두려움에 떨 것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그저 심판을 피하려고만 할 것이다. 이미 그들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강퍅해져 있기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388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계 9:20,21)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심판이 등장한다. 천사가 인을 떼고, 나팔을 불며, 대접을 쏟을 때마다 땅에는 무서운 재앙이 임한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와 악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데 있다. 그러나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육신의 욕망을 따라간다. 이 모습은 마치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장가들고 시집갔던 것과 같다.

사람에게 영적 지각이 없는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 모른다. 지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뿐 아니라 멸망이 다가와도 그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입으로는 주님 오실 날이 가깝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욕망을 쫓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이라고 말씀한다.


389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7,8)

제3 성전이 세워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큰 권세를 가진 짐승이 나타나 성도들과 싸워 이기며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짐승을 경배함으로써 자신이 짐승에게 속해 있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은 짐승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에 박해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성도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환난을 넉넉히 이기게 될 것이다.


390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9-12)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으려 한다. 이마나 손에 표를 받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온다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그 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도, 결국 그 표를 받음으로써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음을 드러낼 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 표를 받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에,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날, 성도들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목숨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39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계 18:1-3)

너무 부유하고 강대하여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나라들이 역사 속에서는 수없이 무너졌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큰 권세를 누리던 성 바벨론도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성경은 그 큰 성 바벨론을 “귀신의 처소요 각종 더러운 영과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묘사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비웃으며 끝없이 악을 행하고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날에는 피할 길 없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세상 권세를 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다. 예수님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말씀하셨다.


39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1-4)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우리를 유혹하던 마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곳에는 두려움도 없고, 시험에 들거나 하나님을 원망할 일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충만하기에,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끝없는 감사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잠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경험하지만, 새 예루살렘에서는 다시는 그런 고통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고 말했다. 우리 또한 만약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 예루살렘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생을 산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헛되지 않으며, 우리의 소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