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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 8:56-59)

만일 어떤 손자가 자신이 할아버지보다 먼저 태어났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거의 2,000년 전에 태어난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은 분명한 사실을 말씀하셨지만, 인간의 이성과 한계로는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눅 8:52)고 하시자 사람들이 그 말씀을 비웃었던 것과 같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믿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332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3,4)

마르다의 누이들은 마르다가 병든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었지만, 예수님은 그 병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보고 계셨다. 우리 또한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에서 벗어나는 데만 집중할 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다. 다윗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의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이며, 삭개오에게 문제가 없었다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 속에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333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 12:9-11)

대제사장들이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 한 것을 보면, 그들이 진리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나사로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많아지자, 그들은 자기들의 지위와 입지를 걱정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8–19).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들이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결국 사람의 행위는 그의 마음을 드러낸다.


334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

칠 년의 풍년이 칠 년의 흉년을 능히 감당하듯, 아무리 고통이 크더라도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면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 사람들이 허무한 것에 빠지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기쁨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때 사랑하던 세상을 더 이상 좇지 않고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된 것도,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335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요 18:39,40)

유대인들은 그들의 영혼을 위하신 예수님을 버리고, 도리어 자신들에게 해를 끼친 바라바를 선택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성경은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2)고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해를 입을지라도 진리를 배척하고, 방자하게 자기를 신뢰하다가 결국 멸망하게 된다.

성경은 또한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달리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잠 24:13,14)고 말씀하신다.


336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0-22)

우리는 각자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 베드로에게는 그가 가야 할 길이 있고, 요한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만의 길이 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시 37:23)라고 말씀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걷는 길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다. 그러므로 자신보다 형통해 보이는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보다 고난이 많다고 해서 불평할 이유도 없다. 우리의 모든 길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길이었다.


337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행 5:18-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사 43:10)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사도들뿐 아니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우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해지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해 사도들을 옥에서 이끌어 내셨듯, 우리도 얽매인 자리에서 이끌어 내신다. 예수님께서 타시기 위해 매여 있던 나귀를 푸신 것처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모든 얽매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구원하신다.


33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18-20)

마술사 시몬은 성령을 받게 하는 능력을 돈으로 사서, 자신도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게 하고자 했다. 그는 성령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선물은 대가 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롬 4:16)라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 성령을 돈이나 노력으로 얻으려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갈 5:4)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다.


339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3-5)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님을 믿게 된 분명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이전까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기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자 그의 삶에 분명한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자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처럼 구원받은 사람들도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다. 사람마다 간증의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동일하게 고백한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과 후가 확연히 구별되듯,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도 구원받기 전과 후가 분명히 나뉜다.


340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 14:3)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행하신 것은, 당신의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고는 쉽게 하나님을 인정하거나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문제를 허락하시는 것도,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어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하시려는 것이다. 다윗에게 어려움이 없었다면, 자신과 함께하시며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노래하지 못했을 것이다.


341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행 17:32-34)

예수님의 부활은 참으로 중요한 진리이다.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과 행하심이 진리임을 확증하셨다. 사도 바울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도 헛것”(고전 15:14)이라고 말한 것처럼,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성경은 그저 인간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증거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며, 자신의 불신을 변명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예수님이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됨을 인정하여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


342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육상 선수가 자기 트랙을 달리듯, 우리에게도 달려가야 할 길이 있다. 예수님 안에서 그 형태는 다를 수 있지만, 모두가 복음을 증거하는 길을 걷는다. 그러나 육상 선수가 자기 트랙이 아닌 다른 트랙으로 달리면 실격하듯,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아닌 육신을 따르는 길로 가면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 주인에게서 한 달란트를 받고 땅에 묻어둔 종과 달리,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곧바로 나가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맡기신 복음 전하는 일을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며 끝까지 달려간 사람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면류관을 얻게 된다.


343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 21:10-14)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리라는 선지자의 말도,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 각오한 바울의 마음을 흔들 수 없었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 살기로 결단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 112:7)라는 말씀처럼, 여호와를 향해 마음을 정한 사람은 앞으로 닥칠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344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행 25:18,19)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고발당해 로마 총독 베스도 앞에 섰다. 사실 바울과 유대인들의 논쟁은 영원한 생명에 관한 중대한 문제였다. 바울이 주장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총독 베스도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로만 보였다. 성경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말씀한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자기와 상관없는 종교 이야기일 뿐이다.


345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다. 목마른 자에게는 갈증을 해소하는 물이, 아픈 자에게는 병을 고치는 약이 기쁜 소식이 된다. 마찬가지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간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영생이 주어진다는 소식이 참된 기쁜 소식이다. 이 복음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예언하신 것이며, 예수님은 그 말씀을 친히 이루셨다. 그로써 우리를 죄에서 살리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며,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주셨다.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은 없다.


34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로마서는 복음을 매우 자세하고 깊이 있게 설명한다. 그중에서도 이 말씀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잘 드러낸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치르심으로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으로 복음을 설명한 말씀은 드물다. 이 말씀 안에는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모든 진리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을 내어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347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만일 우리가 우리의 조건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불완전한 우리는 하나님과 참된 화평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에,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데 그 어떤 것도 방해가 될 수 없다. 아브라함과 다윗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결과이며,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의로움이 하나님의 선물임은 분명하다.


34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법은 다른 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으며, 상위 법은 하위 법보다 우선한다. 죄와 사망의 법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 제재를 받았다는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더 높은 법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정죄함을 받지 않는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인 복음으로 인해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이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안에서 영원히 역사하므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349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죄로 인해 고통받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을 받게 되면,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마음이 생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배우며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육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한다. 또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자신을 드리는 것도 영광으로 여기기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이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므로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어려운 형편 속에서 더욱 빛난다.


350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 14:4)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믿음이 없었던 열 사람은 여러 이유를 들어 그 땅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며 악평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진 갈렙과 여호수아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 땅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결국 출애굽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 중에서 믿음을 가진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가나안에 들어간 이가 아무도 없었다.

우리도 때로는 갈렙과 여호수아 같은 믿음을 갖지 못할 것 같아 낙담할 때가 있다. 그러나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우리와 함께하심을 보여 주셔서 우리를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견고히 세우실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35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누가 보아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귀한 종이다. 그런데 성경은 바울이 나의 것이고, 내가 그의 것이라고 말씀한다. 사람은 본래 자기의 것을 사랑한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그곳은 사랑이 충만한 곳이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곧 자기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라고 말씀하셨다.


352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하나님이 예수님의 핏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주장할 수 없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다. 종은 주인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우리는 여전히 종이기 때문이다. 주인을 기뻐게 하는 종에게는 칭찬이 있지만, 게으르고 불순종하는 종에게는 책망이 있다. 지혜로운 종은 주인을 경외하며 주인의 뜻을 알고 행하는데 마음을 다한다.  


353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8)

우리는 복음을 전할 수도 있고 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했다. 그는 복음 전할 사명을 받은 사람일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살면 하나님께서 상 주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말씀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육신을 위해 살지 않고 복음을 위해 살아갈 때,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해 주신다. 하나님의 상은 그분을 믿고 행하는 자들을 위해 이미 준비되어 있다.


354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0,11)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라”(살전 4:7)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와 세상에서 분리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세상을 따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우리의 몸과 마음이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스스로의 지혜나 능력으로는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없지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능히 승리하게 하신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죄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산다.


355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사람의 생사(生死)는 그 사람의 어떠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 안에 있느냐에 달려 있다.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은 홍수 이후 방주에서 나온 뒤, 포도주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아버지를 업신여김으로 형제들의 종이 되는 저주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홍수 때 방주 안에 있었기에 물의 심판을 피하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은 각자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도 자신의 선한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 안에 속했기 때문이다. 기생 라합 역시 행위로만 보자면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자였으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속함으로 구원을 얻었다.


356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해 열심히 운동했는데도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 수고가 헛된 것처럼,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그 고난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지만 이 땅에서는 결혼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결혼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우게 하시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천국에는 고난이 없지만 이 땅에서는 우리가 고난을 겪는다. 그 이유 또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고난이 넘친 것 같이 위로도 넘쳤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위로의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357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학생을 만나려면 학교로 가야 하고, 왕을 만나려면 왕궁으로 가야 하듯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모든 말은 거짓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시며,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 결과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정죄가 있을 수 없고, 노아가 방주 안에서 물의 심판을 피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안전하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은혜와 축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358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고후 6:11,12)

어린 시절에는 학교 담장이 아주 높아 보였지만, 성인이 되어 다시 보면 그 담장이 놀라울 만큼 낮게 느껴진다. 담장은 변하지 않았지만, 보는 우리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언제나 동일하시지만, 우리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마음이 더러운 자에게는 모든 것이 더럽게 보이고, 마음이 깨끗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게 보인다. 또 마음이 좁은 자에게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조차 작게 보이지만, 마음이 넓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크심이 더욱 크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넓히는 일이다.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는 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359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후 9:7-9)

연보도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하지만 복음을 섬기는 일도 억지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은 연보가 억지가 되지 않도록 물질을 넘치게 주시는 것처럼 우리가 복음을 섬기는 것이 억지가 되지 않도록 모든 부분에 은혜를 베풀어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 성경은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라고 말씀한다. 때때로 우리가 복음 섬기는 일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36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우리가 교만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기의 소리를 더 크게,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니다. 지혜 없는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따를 때 가장 안전한 길을 걸을 수 있지만, 자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마치 인도자 없는 소경처럼 결국 곤란과 위험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신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로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