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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겔 17:22,23)

높고 가지가 무성한 나무에 각종 새가 모여드는 것처럼 성품이 온화하고 덕이 있는 사람에게 사람들이 모인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로 몰려오는 것은 높고 가지가 무성한 백향목과 같은 예수님이 그들의 그늘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4-8)라고 말씀한다.    

272

“그 날에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겔 20:6)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그들이 알지 못했던 가나안 땅을 예비해 두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다. 성경은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고 말씀한다. 우리 눈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은 그것을 보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을 보는 사람은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라고 노래한다.


273

“그러므로 내가 그를 그의 정든 자 곧 그가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겼더니 그들이 그의 하체를 드러내고 그의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여인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판을 행함이니라”(겔 23:9,10)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것들은 기쁨 대신에 고통을 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를 사랑했을 때 그들이 사랑했던 앗수르는 그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끌고갔다. 율법을 사랑한 사람 역시 율법에 의해 정죄를 당하며, 돈이나 명예를 쫓아간 사람도 그것으로 만족함으로 얻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은 평안한 가운데 행복이 커져간다. 성경은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274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 거리가 되게 하였도다”(겔 28:17)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너무 연약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불평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흙으로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다. 마귀는 자기의 아름다움으로 교만해졌는데 우리 역시 우리 보기에 만족스럽게 만들어졌다면 우리가 교만해져서 마귀가 받은 정죄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막 10:38)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하나님께 구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 주시기 때문이다.  


275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4:15)

양이 누워 있다는 표현은 평안히 쉬고 있다는 뜻이다. 양이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목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양이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해도 목자가 없다면 위험 앞에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다. 비록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276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

우리를 정결케 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우리로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자랑할 것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다. 사도 바울도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말했다.


277

“그 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내 노여움이 내 얼굴에 나타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질투와 맹렬한 노여움으로 말하였거니와 그 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 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며 모든 성벽이 땅에 무너지리라”(겔 38:18-20)

군대가 전쟁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키거나, 전염병이 돌게 하거나, 자연 재해를 일으키면 그들이 준비한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반면에 전쟁을 위해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그 전쟁은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듯이 싸움의 승패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기에 성경은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시 118:7)라고 말씀한다.


278

“그가 내전을 측량하니 길이는 스무 척이요 너비는 스무 척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지성소니라 하고 성전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가 여섯 척이며 성전 삼면에 골방이 있는데 너비는 각기 네 척이며”(겔 41:4,5)

이 말씀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계 11:1)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 에스겔서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성전을 측량하는 말씀은 장차 지어질 제3 성전을 설명한다. 이 성전이 지어지면 아마겟돈 전쟁과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성전을 통해 인간들이 자신의 악을 깨닫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겔 43:10,11)고 말씀한다.


279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백성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지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 대로 나갈지며”(겔 46:9)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성전에 들어올 때 북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남문으로, 남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북문으로 나가게 되면 사람이 몸을 돌이킬 필요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게 된다. 성경은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39)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 구원을 받을 때의 마음으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로로 계속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280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겔 47:9)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아나게 되는 것처럼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하면 살아나게 된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죽음이 아니기에 누구도 죽일 수 없고, 생명이기에 오직 살리는 일만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극히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할 분이다.  


281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단 2:17-19)

느부갓네살 왕이 한 꿈을 꾸고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를 불러 자기가 꾼 꿈과 그 꿈의 해석을 알게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알지 못했다. 그러자 왕은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를 다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보이셨다. 다니엘이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을 의뢰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를 베푸신다.


28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단 5:22)

하나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는데 그가 마음이 교만하여지자, 하나님은 그의 왕위를 폐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기까지 짐승처럼 지내게 하셨다. 그런데 그의 아들 벨사라 왕은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마음을 하나님보다 더 높임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 안에는 일만 스승이 있다. 그런 스승을 통해 마음을 낮추는 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또한 우리는 성경의 인물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위치를 보아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283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단 9:25-27)

무너진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있고 난 뒤 예수님이 일어나기까지 69 이레가 지났고, 이제 하나님이 정하신 70 이레 중의 한 이레만 남았다. 아직은 그 한 이레가 남아 있기 때문에 은혜의 시대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시기에 이스라엘과 연관된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한 이레 동안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제사와 예물을 드리는 조건으로 그 전쟁을 무마시키는 자가 나타날 것인데 그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이다. 그는 7년 약속의 중간에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와 예물을 중지시키며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나타낸다. 그 후 창세 이후로 가장 극심한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 성경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기에 그날이 가까울수록 참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28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 1:9)

하나님이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창 4:12)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 농부가 아무리 밭에 씨를 뿌려도 땅이 싹을 내지 않으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전혀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인간의 비참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과 달리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를 지키시며 돌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285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호 2:23)

성경은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0-32)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이방인인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또한 하나님은 불순종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던 것처럼 당신에게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 긍휼 베풀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셨기 때문이다.


286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어두운 밤이 지나면 언제나 변함없이 새벽 빛이 비치듯 하나님의 나타나심도 그와같이 동일하다. 비가 건조한 땅에 생명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모든 자들에게 항상 은혜를 베푸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라고 말씀한다.


287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호 9:10)

광야에서 포도를 만나기란 극히 어려운데 포도를 만나면 참으로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날 때에 그렇게 기뻐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죄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셨다. 그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과 같이 기뻐하신다.


288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호 11:1)

사람 사이에서도 한 가지의 증거만 가지고도 상대방의 사랑과 미움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그곳에서 이끌어 내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마귀 아래서 고통을 당하며 영원한 멸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던 것 역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기에 충분하다.


289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7,8)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에 있다.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그 말씀은 그 사람에게 무익하다.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받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자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일어난 변화를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임한 사람의 말과 행동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속일 수가 없다.


290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

마음과 뜻이 같은 사람들이 함께하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친다. 그러나 부부 사이일지라도 마음의 방향이 다르면 피곤하고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있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힘들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것도 막힘이 없어야 하며, 순결함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와 우리 마음을 온전히 주장하실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섞여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동행하며 한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291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암 4:4)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이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그가 잘못된 길을 걸어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는 다르다. 비록 자식이 부모에게 올바르게 행동하더라도 잘못된 길을 가면 근심하며 책망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그들이 잘못된 길을 걸을 때 분노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때때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브리서 12:8-10).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유익과 거룩함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29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사람이 육신의 욕구를 충족했을 때 영혼이 만족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모든 육신의 욕구를 충족했음에도 영혼이 여전히 곤고하다면, 사람은 단지 육신적인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대로, 육신의 욕구를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곤고에서 벗어나 만족을 누린다면, 사람은 떡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마치 물이 육체의 갈증을 해소하듯,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갈증을 해소한다.


293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옵 1:3,4)

마귀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자기 것으로 여기며 교만해져, 하나님을 대적한다. 마찬가지로, 마귀에게 속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여 자기를 높인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언 18:12)고 말씀한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로 자부심을 갖게하는 많은 것을 마음에 담고 있지만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높일 만한 것이 마음에 없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어 은혜를 구한다.


294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 성에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라고 외쳤을 때, 왕과 대신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조서를 반포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란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4:17)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회개란 마귀를 따라가는 삶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뜻한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마귀를 따르는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이는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3-14)고 말씀한다.


295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미 2:1)

사람은 악을 행하려는 계획을 세울 수 있지만, 그것을 실행할 힘이 없다면 악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 내면에는 악을 행하도록 이끄는 죄의 능력이 작용하기에, 결국 죄를 범하게 된다. 죄로 인해 항상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선을 행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라는 찬송가에 보면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이 가사처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산다.


296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예수님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구유에 뉘어졌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겸손하기에 하나님의 뜻 앞에 당신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예수님이 당신을 찾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지극히 작은 자의 부르짖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것은 겸손하시기 때문이다.


297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크게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나 3:4-6)

나훔 선지자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 특히 이 예언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과 짝을 이룬다.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의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의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계 18:2,3)
악한 자가 심판받을 때 그에게 고통을 당한 사람이 위로와 평안을 누리듯 니느웨의 멸망으로 이스라엘이 기뻐하고, 바벨론이 심판받음으로 심령이 상한 자들이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장차 마귀가 심판받을 때 의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29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 1:13)라고 하나님에게 말했던 하박국 선지자는 때가 되면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많은 것이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했다. 우리 역시 많은 것이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하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299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6,17)

우리가 때때로 두려움에 싸이고, 절망으로 손을 늘어뜨릴 때가 있는데 이는 문제만 보이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며 살아가지만, 그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항상 도우시고 지키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에 매이지 않고 어떤 문제 앞에서도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300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학 1:4,5)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성전 재건을 중단하고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 마음을 쏟았다. 이를 보신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그들을 책망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망 아래 있는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복음의 일을 게을리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태도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자원하는 마음을 기뻐하신다.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고 고백했다. 그의 이 같은 고백은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귀한 종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