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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사 48:21)

하나님은 우리 상상 밖의 일을 하실 때가 많다. 사막을 통과하던 이스라엘의 눈에는 전혀 물이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방법으로 물을 주셨다. 성경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전혀 길이 없을 때 피할 길을 내심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믿게 하신다.


242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만일 황폐한 곳이 황폐한 그대로 있다면, 그리고 광야가 삭막한 그대로 있다면 누가 그것을 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하겠는가. 만일 예수님의 역사하심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죄인 그대로 있다면 누가 예수님께 감사하며 찬송을 부르겠는가. 우리가 예수님께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씀한다.


243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와 같도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사 54:7-9)

이삭은 조금의 복도 남김없이 야곱에게 모든 축복을 하였다. 그로 인해 에서가 복 받기 위해 아버지에게 나아 왔을 때 이삭에게는 더 이상 그에게 줄 복이 없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떠나 음란하게 마귀를 섬기는 우리에게 진노하셨지만, 그 진노를 예수님에게 모두 쏟으심으로 인해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향한 진노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때때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노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선을 행하고 계시나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게 한다.


24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4-7)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모양을 하는 것이 금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괴롭히는 일일 뿐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금식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예배 또한 그렇다. 좋은 옷을 입고 예배당에 가서 경건한 모습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말씀을 듣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에 대해서 성경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말씀한다.  

245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사 62:3,4)

누가 보아도 버려져야 할 쓰레기 같은 물건으로 세상에서 둘도 없는 귀한 것을 만든다면 그 물건은 만든 사람에게 영광이 된다. 하나님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슥 3:2) 같은 우리를 당신  손의 왕관으로 만드셨기에 하나님은 우리로 인해 영광 받기에 합당하다. 하나님은 조각목에 금을 입히듯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드셨다. 그리고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아 5:8)라는 말씀처럼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246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사 65:17,18)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만드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오묘함을 보고 놀랄 때가 많지만 성경은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우리가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곳에서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기억하거나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곳은 우리의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우리에게 지극한 기쁨을 주는 곳임에 틀림이 없다.   


247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1,2)

지렁이가 사람이 살 집을 짓는다고 하면 모두가 웃을 일이다. 지렁이에게는 우리가 살 집을 지을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다. 하나님 앞에 지렁이 같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어떤 것도 들고 나갈 수 없는 가난한 자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교만한 자기을 보면서 심령에 통회할 수 밖에 없다.


248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 5:25)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좋은 것이 들어 오도록 하는 통로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모든 좋은 것을 막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아담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행복했지만, 하나님을 불신한 후에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하나님의 좋은 것을 받지 못하고 마귀가 주는 것들로 고통받았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사람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한다.  


249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렘 6:17)

파수꾼은 다가오는 위험을 보고 나팔을 불어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한다. 그 파수꾼의 소리를 무시하면 위험을 대비하지 못하고 화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성경과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아는 사람들을 통해 앞으로 있을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다. 사람이 그 경고를 무시하면 영원한 멸망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성경은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2)라고 말씀한다.


25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침몰하는 배에서 자기의 잘난 것이나 부한 것을 자랑하는 자는 어리석다. 그곳에서는 오직 물에서 자기를 구원해 줄 수영 잘함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자랑이 된다. 사람의 선함과 성실함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자기 영혼을 구원시키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평안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라고 말씀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은 그것만이 우리 영혼을 기쁘게 하며 복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배워 알아야 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자랑해야 한다.


251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피부가 검은 구스인이 그의 피부색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반점을 가진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악한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은 숙명적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고 말씀한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닌 우리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한 것이다.


252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렘 17:1)

성경에는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 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표현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우리 죄가 도말 되었다는 말이다. 도말이란 덮어서 없애거나 지운다는 의미를 가진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두 군데 기록이 되는데 한군데는 번제단 뿔이며, 다른 한군데는 우리 마음 판이다. 번제단 뿔에 기록된 죄는 염소나 양의 피로 가릴 수 있지만 우리 마음 판에 기록된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려진다. 더러운 벽에 페인트를 칠하면 더러운 것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는 우리 마음에 있는 죄를 완전하게 가리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거룩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 죄가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피만 보이기 때문이다.  


253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우리는 흙과 같은 존재이기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토기장이가 흙으로 자기 원하는 대로 모양을 만들 듯이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만드신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자기를 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자격조차 없다. 오직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우리 영혼을 위해 하나님의 긍휼하심 앞에 은혜를 구해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피조물인 우리의 마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교만이다.


25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렘 26:8)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두셨던 것처럼 우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셨다. 아담이 생명나무 대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선택한 것처럼 무지한 우리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사망의 길을 선택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도록 도우신다. 그런데 자기 마음의 고집을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부한 사람은 사망의 길에 서 있으며 그 마지막은 영원한 불 못이다. 무섭고 끔찍한 그날이 오기 전에 사람은 반드시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인간의 선택 중에 그것만큼 영광스럽고 위대한 선택은 없다.


25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렘 24:3-5)

무화과의 좋고 나쁨은 주인에 달려 있다. 주인이 마음을 많이 쏟은 나무일수록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의 형편이 달라진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극히 좋은 열매를 맺지만, 마귀를 주인으로 삼은 사람은 아주 나쁜 먹을 수 없는 열매를 맺는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시 92:12,13)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25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성경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고 말씀한다. 우리가 당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빼 버리면 모두가 무익한 것이 되고, 우리를 어렵게 하는 일들은 재앙이 되어 버린다. 반면에 범사에 하나님이 사랑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의 평안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어 소망을 가지게 된다.


25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2)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두 가지 언약이 나온다. 첫 번째 언약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 죄가 전혀 없는 거룩한 자가 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조건적 약속이다. 그러나 이 언약은 우리의 행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번째 언약을 허락하셨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고, 더 이상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은혜의 약속이다. 이 새 언약은 하나님의 자비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에 따라 첫 번째 약속인 옛 언약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새 언약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 그의 행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258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렘 33:1)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가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두어 버린다. 선지자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은 사울 왕에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며 그를 책망했다. 그러나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포도주를 거부한 레갑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복을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음성을 귀히 여기며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성경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고 말씀한다.


25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렘 38:3,4)

경고는 단순히 사람을 두렵게 하려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을 통해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경고는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경고를 마치 예레미야가 자신들이 재앙을 당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오해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장차 있을 심판과 지옥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보지 못했다.


260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눈 앞에 이루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렘 39:15-18)

예레미야가 유다 지도자들에 의해 시드기야 왕의 승인을 받아 진흙 구덩이에 던져져 그곳에서 굶어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에벳멜렉은 시드기야 왕에게 나아가 예레미야를 구출해 줄 것을 간청했고, 왕의 허락을 받아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올렸다. 예루살렘 성에 재앙이 임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믿은 에벳멜렉을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자는 마지막 심판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일에 반드시 보상하신다.


261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렘 44:16-18)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거부하며 여전히 하늘의 여왕을 섬기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과거에 먹을 것이 풍부하고 복을 받으며 재난을 당하지 않았던 이유가 하늘의 여왕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참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풍성하게 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그 은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지혜나 능력으로 살아간다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따를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262

“너희 장사들이 쓰러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서지 못함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신 까닭이니라 그가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시매 사람이 사람 위에 엎드러지며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포악한 칼을 피하여 우리 민족에게로,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자 하도다”(렘 44:15,16)

장사라고 해서 절대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잘 걷는다고 해서 넘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쓰러지게 하시면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붙드시면 어떤 사람도 쓰러질 수 없다. 성경은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이사야 40:30)라고 말씀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누구나 쓰러질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께서 붙드심으로 완전히 넘어지거나 실족하지 않는다. 학사이자 제사장이었던 에스라는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에스라 8:22)고 말했다.


263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렘 50:31)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연약은 문제 삼지 않으시지만, 교만은 미워하신다. 성경은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고 말씀하는데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루시퍼가 그랬듯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자기를 높힌다.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이 그 속에 흐르는 자는 자신의 무익함을 깨닫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은혜로 인하여 기뻐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지만 교만은 그 은혜를 막는 일을 한다.


264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애 1:1)

화려하고 번화한 도시를 보면, 그곳이 언제까지나 사람들로 북적일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적막하고 쓸쓸하게 변해버린 도시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섯 번째 남자와 함께 살며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손가락질받던 사마리아 여인의 삶도 그랬다. 그녀의 마음은 기쁨 없이 고독과 슬픔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의 마음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게 되었다. 예수님 밖에서는 모든 것이 점점 쇠퇴하고 사라져 가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소망으로 가득해진다.


265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애 4:4)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벧전 2:2)는 말씀에서 젖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젖먹이가 젖을 먹지 못하면 배고픔의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사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극심한 영적인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마음은 사막과 같다. 사막에 강이 흐르면 사막이 변하여 많은 생명체로 아름다워지는 것처럼 마음에 말씀이 임하면 마음의 고통은 즉시 사라지고 영적인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게 된다. 사람은 형편을 바꾸려고 하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한다.    


266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겔 3:5,6)

에스겔은 자신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완고하고 마음이 강퍅하여, 에스겔이 전하는 말씀에 쉽게 순종하지 않을 것을 아셨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사람이 멀리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주린 사람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도 반응한다.


267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5:13)

하나님은 당신의 분이 다 풀리기까지 노를 품으신다. 만일 노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분은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을 떠나 마귀를 섬기는 우리에 대해서 노하셨는데 그 노을 우리 대신 예수님에게 모두 발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분이 풀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에서 우리를 향한 분노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모든 분노를 발하시고는 우리에게 노하지 않기로 맹세하셨기에 우리는 그 맹세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268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겔 8:12)

: 부모가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가 서로 다르듯이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르다.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마음가짐과 행동을 조심하지만,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 함부로 생각하며 행동한다. 성경은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라고 말씀한다. 마귀는 사람들의 눈을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여 어둠 속에서 온갖 악을 행하게 한다.


269

“내가 슬프게 하지 아니한 의인의 마음을 너희가 거짓말로 근심하게 하며 너희가 또 악인의 손을 굳게 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삶을 얻지 못하게 하였은즉”(겔 13:22)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슬프게 하실 리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말씀한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근심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다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고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우리의 생각을 믿으면 우리는 필경 슬픔과 근심 속에 빠져 고통스러워하게 된다.


270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라”(겔 14:5)

연인 관계에 있던 사람이 자기의 연인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 역시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사랑했기 때문인 것처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한다. 하나님 아닌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하게 하지 못하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며 의뢰하는 것들을 끊으시고 당신만 사랑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 우리 영혼이 소망 가운데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