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잠 9:13)
성경은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9)고 말씀한다. 율법으로 자기를 보는 사람은 자기의 입을 가릴 수밖에 없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입이 열리게 된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로서 자기를 나타내기에 바쁘다.
212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잠 12:9)
한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는 반면에,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는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했다. 그러나 그 부자의 영혼은 음식이 핍절한 것처럼 곤고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 비참한 거지 나사로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풍요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도 마음이 슬프면 모든 것이 슬프고, 아무 것도 없는 자라도 마음이 기쁘면 모든 것이 기쁘다. 그래서 육체의 풍성함보다 마음이 풍성한 자가 낫다.
21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
뜨거운 열로 은과 금을 연단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이 연단 받기 위해서는 물과 불을 통과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로 물과 불을 통행케 하실 때 우리는 고통으로 인해 부르짖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마음이 연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고 말씀한다.
214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사람은 하나님에게 잘못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잘못을 행하지 않으신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는 말씀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행하신 선한 일을 부정한 것으로 바꾸고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되고 자기의 잘못된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성경은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딛 1:15)라고 말씀한다.
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
사람의 마음은 미련한 것과 결탁하여 있다. 그런데 사람의 미련함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제거된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씻으려고 하면 아이는 싫다고 울지만 그래도 목욕하고 나면 깨끗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징계를 싫어하여 피하려고 하지만, 징계를 받은 후에는 우리 마음은 정결해져서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며,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걷게 된다. 성경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고 말씀한다.
2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24:16)
의인과 죄인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의인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지만 죄인에게는 없다. 의인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마음이 있지만 죄인에게는 없다. 의인에게는 성령의 인도가 있지만 죄인에게는 없다. 그리고 의인도 죄인처럼 넘어지는 일이 있지만 의인에게는 그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나 죄인에게는 없다.
217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 28:1)
많은 사람은 자기를 쫓는 자가 없어도 자기의 생각에 쫓겨 다닌다. 마귀는 사람 속에 갖가지 생각을 일으켜 불안하게 만드는데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밖에는 없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사단이 주는 거짓된 생각을 거부하게 하여 말씀의 소망 가운데 평강을 누리게 한다. 그래서 의인은 담대하다. 그러나 반석인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지 않는 사람은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 1:4)라는 말씀처럼 자기의 생각에 정처 없이 끌려다니며 불안해한다.
218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잠 30:5)
성경은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호 2:19)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우리와 결혼할 자 없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심으로 우리에게 장가드셨다. 예수님이 당신 앞에 나아온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도 그들을 고쳐주지 않으면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어 주심은 마귀가 주는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219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전 2:1)
사람들은 자기를 행복하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사람들은 자기를 즐겁게 하려고 공부하고, 돈을 모으고, 집을 사고, 명예와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잠시 기쁨을 주고 사라지는 것들이기에 헛되다. 권력과 부귀와 영광을 누렸던 솔로몬왕도 자기를 즐겁게 하려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 하여 보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사라지는 것이기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고 말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를 얻었기 때문이다.
220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살지 않는다.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말씀하셨다. 마음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보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221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전 8:3,4)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신다. 그런 하나님에게 피조물인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은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18-20)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긍휼이 무한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것이 피조물로서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이다.
222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 11:5)
우리는 우리의 지혜 안에서 장래 일을 생각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은 믿을 수가 없기에 우리를 의뢰하면 안 된다. 성경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고 말씀한다. 우리가 우리의 장래를 선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223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아 2:7)
어린 자식이 품에 안겨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엄마는 아기가 깨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다룬다. 사람이 잠을 자면 피로가 풀리고 새 힘을 얻는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 달콤한 수면이 방해받지 않도록 온갖 조심을 한다. 하나님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볼 때 너무 사랑스러워 아무도 잠든 우리를 깨우지 못하게 하신다.
224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아 5:16)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의 어떤 허물도 문제가 되지 않고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만 보인다. 어린 손주가 할머니 품에 안겨 거짓말을 하고 있어도 할머니는 거짓말하는 것조차 귀여워 손주의 뺨에 입을 맞추며 좋아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우리 전체를 사랑하신다. 우리 보기에 수치스러운 것조차도 하나님의 눈에는 아름답게 보인다.
225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7)
큰 홍수가 나면 마구간에 있는 동물도, 차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집도 다 삼켜 버린다. 큰물 앞에 삼켜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물도 하나님의 사랑을 끄지 못하고, 삼키지 못한다. 마귀가 아무리 우리를 송사할지라도 그 송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삼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송사 속에서도 변함없이 굳건하게 서 있다.
226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정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사 3:1-3)
사람이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음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뢰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뢰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도울 능력이 없는 썩어 없어질 것들이다.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왕하 18:21)는 말씀처럼 우리가 의뢰하는 것들은 가시가 되어 우리를 찌른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우리를 도울 능력이 있기에 하나님은 가시를 제거하듯 우리가 의뢰하는 모든 것을 제하여 버리신다. 우리가 의뢰하는 것들이 온전히 제거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의뢰하게 된다.
227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5-8)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면 말할 수 없는 큰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기꺼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의지로 행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자가 행할 수 있다.
228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성경의 모든 초점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한 아기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아기를 주목해야 한다. 장차 이 아기가 자라서 많은 고난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을 떠나 죽은 사람들에게 진리로 생명을 얻게 하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동행하게 하신다. 이 아기 없이는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 평강을 누릴 자가 아무도 없기에 동방박사들이 이 아기를 경배했던 것처럼 우리도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한다.
229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사 12:1)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악을 행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진노를 돌이키신 것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인함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당신의 진노로 두려워 떠는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안위하신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위로로 인해 기뻐하며 감사한다. 성경은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라고 말씀한다.
230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17:6)
사람은 자기 손이나 다른 도구를 이용하여 나무에 달린 과일을 딴다. 그런데 사람의 손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높은 곳에 있는 과일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 안은 마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안전하다. 그러나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은 마귀가 역사하는 곳이기에 그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 지대인 예수님 안으로 옮기셨다. 성경은 “우리를 저희 이에 주어 씹히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시 124:6)라고 말씀한다.
231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사 19:22)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9:22)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한다. 자식이 잘못된 길을 걷는데도 징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애굽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복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면 그는 복된 눈을 가진 사람이다.
232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사 22:23)
못은 단단한 곳에 견고하게 박힌다. 사람 역시 모래 위가 아닌 반석 위에서 견고하게 선다. 세상 모든 것은 모래와 같아서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비틀 거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석이기에 예수님 위에 선 사람은 흔들림이 없다. 우리를 견고한 반석 위에 세울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에게 있기에 성경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라고 말씀한다.
23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성경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말씀한다. 사랑은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소망을 가질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평강 또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평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