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시 69:2)
수렁에는 사람을 견고하게 세워줄 받침이 없기에 그곳에 사람이 빠지면 허우적거리며 밑으로 가라앉게 된다. 사람의 생각은 수렁과 같아서 생각에 빠지면 혼돈 속에서 끝없이 헤매게 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반석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 걸음이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182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 72:2-4)
재판관이 법대로 재판을 하지 않고 실력자라고 재판을 굽게한다면 그는 공의로운 재판관이 아니다. 그런 재판관에게는 가난한 자가 보호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법을 따라 판단하시는 공의로운 재판관이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구원을 받지 못하거나 억울함을 당하는 일은 없다.
183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시도다”(시 76: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는 귀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을 받았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만든 신 정도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크고 두려운 분이다. 하나님은 비록 인간을 만드시고 사랑하시지만 오직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
184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78:6-8)
성경에는 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말씀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품어야 할 마음과 걸어가야 할 길을 가르친다. 성경은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8-11)고 말씀한다.
185
“하나님이 애굽 땅을 치러 나아가시던 때에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시 81:5,6)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수고의 짐을 지웠던 것처럼 마귀는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 마귀는 사람으로 죄의 짐을 지울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욕망의 짐을 지운다. 우리가 그 짐으로 인해 고통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셨고, 그 짐을 친히 벗겨 주셨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죄의 정죄가 주는 고통에서, 육신을 좇는 수고에서 벗어나 안식하게 되었다.
186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두렵고 떨림 속에 사는 사람은 하루라도 마음 편히 살기를 소망한다. 짧은 인생 속에서 악이 난무하는 공의가 상실된 세상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하루를 살더라도 사랑과 배려가 있는 공의로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낫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풍성한 공의로우신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셨다.
187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시 88:10-12)
죽은 자는 어떤 것도 감각할 수 없기에 어떤 고통도 없다. 그래서 죽은 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살아 있는 자만이 자기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배워 찬송할 수 있다. 우리에게 고통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성경은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4)고 말씀한다.
188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시 91:14-16)
사람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사랑의 관계로 맺어졌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때 만족한다. 그러나 마귀의 역사로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기까지 사랑을 갈망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여 그 사랑에 속하게 되면 우리는 한없는 기쁨을 누리게 되며, 하나님은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온 마음을 쏟으신다.
189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시 94:17)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는 밝고 쾌활한 반면 미움을 받고 자라는 아이는 침울한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움 없이 어려움만 계속된다면 우리는 슬픔 속에서 침묵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이 있어야 우리 입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게 된다.
190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찌어다”(시 96:3)
씨를 뿌리러 나간 자가 그의 손에 씨가 없다면 씨를 뿌릴 수가 없다. 하나님을 선포하러 나간 자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본 적이 없다면 하나님을 선포할 수 없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살아나셔서 처음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고,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증인으로 세우셨기에 먼저 우리에게 당신을 나타내신다.
191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9:5)
다윗은 그의 신복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그를 용서하여 죽이지는 않았지만, 다윗은 그 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그는 그 고통을 통해 죽을 때까지 다시는 그런 악을 행하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이 잘못했을 때 채찍질하여 올바른 길을 걷게 하지만 용서 못 할 죄는 없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다.
192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시 102:13)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는 때를 정하셨던 것처럼 만사에는 때가 있다. 음식을 충분히 익히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철에 충분한 열을 가하지 않으면 목적에 맞게 다듬을 수 없다. 하나님의 때가 우리 영혼에 가장 유익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에 순종해야 한다.
193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7-19)
감옥에 있는 요셉을 보면서 극심한 흉년에서 애굽을 구원할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흠모할 것이 없는 예수님을 멸시하고 무시했다. 그러나 성경은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심판 날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을 볼 것이다.
19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
하나님은 예수님을 제사장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맹세로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그래서 마귀가 하나님 앞에 우리를 송사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변호하신다. 마귀가 우리를 송사할 송사 거리는 차고도 넘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발의 못 자국으로 그 모든 송사를 단번에 엎어 버리시고 재판장인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죄 없다고 변호하신다.
195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시 113:9)
어머니는 아이를 낳으면 아이에게 온 마음을 쏟는다. 아이를 기쁘고 즐겁게 하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좋은 옷이나 놀거리들을 준비한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준비하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알 수 있는 지각을 주셔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게 해 기쁘고 즐겁게 하신다. 성경은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 12:14)고 말씀한다.
196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1,2)
우리가 아무리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혀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 기도는 고통이 되며, 기도하는 힘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며, 때를 따라 응답해 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기도하기를 즐거워한다. 성경은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라고 말씀한다.
197
“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시 118:15,16)
힘이 있는 곳에 평화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힘이 없는 민족은 힘 있는 민족에게 정복당하여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감수해야 했다. 능력 없는 우리의 장막에 슬픔 대신 기쁨의 소리가 있는 것은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의 산성이 되어 모든 위험에서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 또는 ‘미련한 자’라는 뜻을 가진 마온 사람 나발이 자기 양들의 털을 깎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자기 일행들과 함께 밤낮 그의 목자들과 양들의 담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발은 그의 이름처럼 그것을 알지 못했다.
198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사람이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올 때처럼 언제나 행복하고 기쁘다. 그곳에는 자기를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집에 올라갈 때 기뻐하는 것은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우리 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겨 모든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199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우리가 보이는 형편 앞에 자주 흔들리는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을 의뢰하여 흔들리지 않으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셔야 하는데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는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를 요동치 않게 하실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200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126:1,2)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함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능력이 없어 그곳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심으로 그들을 그곳에서 해방하셨다. 우리 역시 마귀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심으로 우리를 마귀에게서 벗어나게 하셨다. 이처럼 자비는 멸망 받아 마땅한 자를 구원하여 상상치 못한 기쁨을 누리게 하지만 자비가 없는 곳에는 멸망 받아야 할 자는 멸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201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3,4)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따라 심판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하심 밖에는 없다. 그래서 용서라는 말은 죄악된 우리에게는 참으로 아름답고, 감사와 평안을 준다. 용서는 심판을 가리기에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202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예수님은 우리의 주와 목자인 동시에 우리의 남편이며 형제이시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맏형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서로 연합하여 동거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세상을 이기며 하늘에 있는 본향을 향해 함께 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볼 때 지극히 선하고 아름답게 여기며 기뻐하신다.
203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2)
이스라엘을 억누르고 있던 바로의 손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의 손보다 약했다.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했던 많은 왕의 손은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보다 약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려는 마귀의 손은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손보다 약했다. 하나님의 손이 약했더라면 우리는 벌써 멸망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함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에 하나님의 강한 손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기 때문이다.
20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가 우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까지 다 아신다. 알파와 오메가인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다 아셨다. 성경은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5,16)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어떠함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205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시 143:10)
성경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말씀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 안에는 예수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며, 그 뜻을 따라 행하게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다.
206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시 144:2)
강아지가 사람에게 꼬리를 흔들며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이 강아지로 사람을 따르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에게 복종한 것은 다윗이 훌륭한 인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백성으로 순종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도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순종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순종할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에게 임했음을 알 수 있다.
207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시 147:1)
: 하나님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이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하나님은 당신을 찬송케 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욕하거나 대적할 수 없다.
208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하나님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은혜를 베푸신다면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하지 않을 것이다. 호흡이 있는 자는 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시듯 은혜도 동일하게 베풀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가 누리는 것이다.
209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3:3,4)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우리 마음판에 새길 수 없다. 우리는 근본 육신적인 사람이라 영적인 것을 싫어하기에 하나님이 친히 우리 마음에 새겨 주셔야 한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 마음판에 당신의 것들을 새겨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중히 여김을 받게 하며, 안전한 길을 걷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길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
210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7,8)
개미가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는 것은 그의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우리 속에 있는 죄로 인함인 것 같이 우리가 이 땅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을 위해 준비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