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대하 6:8)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 짓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은 그 마음을 좋게 보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즐겨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원하며,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고 말씀하셨다.
122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대하 7:1)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제물을 태운 것은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항상 응답하신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을지라도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눅 11:9)라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소망 가운데 기도한다.
123
“르호보암 왕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원로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이 백성에게 어떻게 대답하도록 권고하겠느냐 하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이 백성을 후대하여 기쁘게 하고 선한 말을 하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대하 10:6,7)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이 르호보암 왕에게 와서 솔로몬이 자기들에게 메운 무거운 명에를 가볍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때 르호보암이 원로들의 말을 듣고 그들에게 선한 말을 하였다면 그들은 르호보암의 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르호보암 왕은 오히려 그들에게 아버지가 메운 멍에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리라고 말을 함으로 그들을 자기에게서 떠나가게 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났던 것은 그 땅에서 고역이 심했기 때문이다. 만일 애굽의 바로가 그들에게 평안을 주었다면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된 것도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자를 멀리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가까이하기 마련이다.
124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대하 15:15)
성경은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대하 15:7)고 말씀한다. 유다 왕 아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자 하나님은 그의 나라에 평안을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고 말씀하는데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다윗이 받은 복을 함께 누리게 된다.
125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대하 16:8,9)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어떤 능력 있는 자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능력을 베푸신다. 그래서 세상 어떤 것을 의뢰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가장 우리를 복되게 한다. 성경은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시 22:4)라고 말씀한다.
126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대하 20:17)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유다 왕 여호사밧을 치려고 하자 여호사밧과 온 유다 백성은 금식하며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레위 사람 야하시엘을 통해서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말며 너희는 가만히 서서 내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당신께 구하는 자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신다.
12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대상 24:17,18)
영적인 한 사람이 다른 많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크다. 유다 왕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자,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늘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돕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진노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하고 복된 것은 예수님이 우리 속에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128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대하 27:6)
성경에는 정도를 걸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은 모두 형통했다. 바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걷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당신의 뜻을 나타내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행할 때 우리는 안전하며, 모든 면에서 강성하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 4:6)고 말씀하신다.
129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첫째 해 첫째 달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대하 29:2,3)
악한 왕들은 성전을 닫지만, 영적인 왕들은 성전을 열었다. 성전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했는데 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귀며,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 음성을 따라 행한다. 반면에 육신적인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귀기보다는 마귀가 주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한다.
130
“이 모든 일이 끝나매 거기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나가서 유다 여러 성읍에 이르러 주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으며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거하여 없애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각각 자기들의 본성 기업으로 돌아갔더라”(대하 31:1)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난 후에 일어나는 변화 중의 하나는 우리가 육신적인 것들과 멀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질수록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혐오하여 버리게 된다.
성경은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19-22)고 말씀한다.
131
“이와 같이 섬길 일이 구비되매 왕의 명령을 따라 제사장들은 그들의 처소에 서고 레위 사람들은 그들의 반열대로 서고 유월절 양을 잡으니 제사장들은 그들의 손에서 피를 받아 뿌리고 또 레위 사람들은 잡은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대하 35:10,11)
눈이 하는 일이 다르고 귀가 하는 일이 달라도 다 한 몸을 위하는 것처럼 제사장이 하는 일이 다르고 레위 사람이 하는 일이 달라도 다 하나님을 위한다. 우리도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가 다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님을 위한다. 그러나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의 은사를 보잘것없게 생각하여 소홀히 여긴다. 반면에 마음이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뻐하며 자기의 은사를 따라 충성한다. 성경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고 말씀한다.
132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스 1:1-3)
바사 왕 고레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유다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한 것은 그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이다.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결국 애굽을 떠난 그들을 죽이려고 쫓아간 것도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회개하여 하나님에게로 돌아온 것도 우리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회개할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133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스 6:19-22)
제1 성전인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제2 성전이 지어졌다. 그 성전이 지어지기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의해 많은 방해가 있었지만, 마침내 성전이 완공되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즐거움으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켰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을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원하는 바가 이루어진 것 역시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환경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134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 7:10)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가 된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다니엘 역시 한 환상을 보고 그것을 깨닫기 위해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비하기로 결심하자 주의 천사가 그에게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단 10:12)고 말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위해 무엇이든 배우기로 마음을 정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알도록 우리를 도우신다.
135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스 10:10-12)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금하신 이방 여인을 자기의 아내로 삼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그때 에스라는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고 말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통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들 중에는 자식을 낳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7-39)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의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을 주셔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가 필요하다.
136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느 3:1-3)
이스라엘 백성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각자가 맡은 부분이 있었다. 각자가 맡은 부분은 전체에 비하면 적은 부분이었지만 그 부분 부분들이 모여 성벽을 완성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미치지 못할 높은 곳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충성되게 행하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지어지게 된다.
137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느 8:13)
율법을 알기 원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에 능통한 에스라에게 모였듯이 사람은 자기가 관심이 있는 분야의 전문가를 찾는다.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을 찾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을 자기와 무관하게 여긴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자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라고 말했다. 마귀에게 속아 멸망 받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와 상관없는 분으로 생각하며 상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138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느 9:26-28)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떤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항상 그들을 어려움에서 구원해 내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 생각의 한계를 넘어선다.
139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느 13:1-3)
암몬과 모압 사람이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이스라엘과 연합하지 않고 대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고 말씀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을 섞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것의 섞임 없이 순수하게 우리 마음에 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한다.
140
“아하수에로 왕의 제칠년 시월 곧 데벳월에 에스더가 왕궁에 인도되어 들어가서 왕 앞에 나가니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에 2:16,17)
왠만한 여자들은 에스더 정도는 되어야 큰 나라를 다스리는 아하수에로 왕의 아내가 될 수 있지 자기 같은 사람은 절대 왕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에스더와 비교할 수 없는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 엄청난 일이기에 꿈꾸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를 사랑하여 그의 머리에 관을 씌웠듯이 예수님은 우리 머리 위에 영원히 빛나는 영광의 관을 씌우셨다.
14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에 5:1-3)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모르드개의 민족인 유다인들은 죽음에 놓이게 되었다. 왕이 이미 이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죽음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제 그들이 죽고 사는 것은 왕 앞에 나아간 에스더가 왕에게 은혜를 입느냐 입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에스더가 왕에게 은혜를 입음으로 유다인들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되었다. 우리 역시 죄로 인해 멸망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구원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멸망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되었다.
142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5-17)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영향을 받은 왕이 유다인을 죽이라는 조서를 내리자 모르드개는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했었다. 그리고 그 조서가 이르는 곳마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했다. 그러나 에스더로 인해 왕이 유다인을 살리라는 조서를 다시 내리자, 유다인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잔치를 베풀었다.
우리는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으로 인해 죽음의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율법을 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을 얻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143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욥 2:4-6)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뼈와 살을 치는 것은 허락하셨지만 생명까지 해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도 실족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실족을 허락지 않으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144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욥 5:7)
사람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고통과 고난이 있다. 그러나 그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을 얻지 못한다면 영혼은 병들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고 말씀한다. 성경은 빛과 어두움이 일반이라고 말씀하는데 우리의 근심으로 하나님을 얻는다면 오히려 근심은 우리를 살리는 복된 것이 된다.
145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욥 9:16)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 9:11)는 욥의 말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을지라도 그것이 우리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이다. 성경은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3,4)고 말씀한다. 그래서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와 깨달을 수 있는 감각을 주셔야 한다.
146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욥 12:16)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와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을 치려고 할 때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이스라엘 왕의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시자, 그들이 거짓 예언하여 아합을 전쟁에 나가 죽게 했다.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는 자를 속이기도 하시는데 하나님이 속이시면 속지 않을 인간이 아무도 없다. 자기의 지혜를 믿는 사람은 어리석기에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고 말씀한다. 우리는 마땅히 존경할 자를 존경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해야 한다.
147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욥 13:5)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가 하는 말이 다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것들이기에 입을 다무는 것이 지혜다. 성경은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고 말씀한다. 우리는 거짓되기에 우리의 생각 역시 거짓되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 신뢰한다.
148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욥 16:9-11)
욥이 하는 말이 마치 예수님이 악인들에게 잡히셔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모욕했고, 어떤 이는 예수님의 뺨을 쳤다. 그리고 하나님도 예수님에게 진노하셔서 채찍질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났다.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149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욥 19:4)
우리가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향해 돌을 들 수 없는 것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그와 우리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이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자기를 판단하게 된다. 우리를 참으로 고통스럽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자기를 정죄할 때이다. 자기와 다른 사람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면 다른 사람과 자기에 대해서 관대해진다.
150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욥 22:3)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로움이나 행위 완전함을 요구하신다면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 아닌 무엇인가 부족한 분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기 영원 전부터 당신의 영광 속에서 온전히 만족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부족을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영광 속에서 함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고 말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