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삼하 15:32)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은 정처 없이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후새는 큰 슬픔으로 다윗을 맞으러 나왔다. 성경은 후새를 다윗의 친구라고 말씀한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다.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친구 되신 예수님은 비록 우리가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며 힘이 되어 주신다.
92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삼하 1&:14)
아히도벨의 모략은 분명 좋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후새의 계략을 그보다 더 낫게 여기게 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에 우리는 마땅히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과 지혜를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자기의 마음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93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삼하 19:4)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 압살롬의 어떤 행위도 그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기에 사랑인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94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1-3)
다윗은 그가 노래한 것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원수와 사울에게서 자기를 구원하신 것을 보고 이 노래를 불렀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증인이 되었다. 다윗을 도우신 하나님은 동일하게 우리를 도우시기에 다윗의 노래는 또한 우리의 노래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을 찬송하는 열매를 우리 입술에 맺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95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왕상 1:5,6)
위치나 행위로 보면 아도니야는 왕이 될 만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기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산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가 없다. 비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선다.
96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왕상 4:29)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지혜와 총명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다. 우리는 없는 것을 문제 삼을 때가 많지만 사실은 없는 것을 채워 주실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97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왕상 9:3)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예수님의 그림자인 동시에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그림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은 항상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릴 때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지만, 영적으로 자라면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된다.
98
“왕께 말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사실이로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친히 본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가 들은 소문보다 더하도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왕상 10:6-8)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놀라운 지혜에 감동하였고, 그의 앞에서 항상 지혜를 듣는 신하들을 복되다고 했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볼만한 눈이 있었다. 성경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라고 말씀한다. 하나님 말씀에서 단맛을 느끼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더욱 가까이한다.
99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왕상 13:2)
여로보암은 두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세우고,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들이라고 말하면서 경배하게 했다.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할 때 여호와의 사람이 장차 요시야가 그들의 악행을 그치게 할 것을 예언했다. 실제 그로부터 300년이 지나서 요시야는 하나님 사람의 예언을 그대로 이루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다 이루어진다.
100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 17:1)
야고보서에서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셨던 것처럼 우리의 기도도 들으신다. 성경은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고 말씀한다.
101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왕상 21:2,3)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원했다. 그러나 나봇은 조상의 유산인 포도원을 왕에게 주는 것을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알기에 왕의 요구를 거절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그 뜻을 따라 행한다.
102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왕하 3:15-17)
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모압을 치러가는 중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어 큰 곤란에 빠지게 되자 선지자 엘리사에게 묻기 위해 갔다. 그러자 엘리사는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고 했고, 다음 날 아침 그의 말대로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 지금 당장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미리 준비해 놓고 계신다. 때가 되면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취하게 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103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왕상 5:14)
성경은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 4:27)고 말씀한다. 나아만이 문둥병에서 깨끗하게 나았던 것은 선지자를 귀히 여겨 그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고 말씀한다.
104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 7:1)
아람 군이 사마리아 성을 에워쌈으로 인해 성중의 사람들은 크게 주리게 되어 심지어는 자식을 잡아먹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에 먹을 것이 풍성하여 아주 헐값으로 거래될 것을 말했을 때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러나 다음 날 엘리사가 말한 대로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 보기에 도저히 절망 같은 형편에서도 그대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성경은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고 말씀한다.
105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왕하 12:2)
성경은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수 24:31)고 말씀한다. 육신적인 사람이 육신적인 사람과 함게 있으면 육신적인 일을 도모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육신적인 사람이라도 영적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106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하 13:12)
성경은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9,10)고 말씀한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하늘나라에 기록되어 있고, 그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의인과 죄인의 심판은 다르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지만, 의인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그들이 행한 일로 칭찬과 상을 받는다. 그래서 죄인들의 심판은 두려운 것이지만, 의인들의 심판은 소망스러운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고 말했다.
107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왕하 18:3)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하나님이 아닌 이방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였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악한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성전을 정비하고, 성전 예배를 회복하는 일을 하여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다. 마귀를 쫓아가는 악한 세상에도 하나님을 섬기며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여 세상을 이기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한다.
108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왕하 20:2-5)
히스기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죽게 될 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자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과 전심으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며 통곡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행한 행위가 아닌 그의 기도와 눈물을 보시고 그를 병에서 낫게 해 주셨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시 27:7)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인자와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109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왕하 22:8)
유다왕 요시야 때에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이 발견되었다. 사반이 왕의 앞에서 율법책을 읽자, 요시야는 겸비하여 옷을 찢으며 통곡했다. 요시야는 자기 조상이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성경은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요시야 때에 율법책을 발견케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더욱 영적으로 살 수 있도록 그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
110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시위대장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나 모두 가져갔으며”(왕하 25:13-15)
하나님의 무수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섬기는 악에서 돌이키지 아니함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의 민족인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다. 하나님은 성전을 불타게 했고, 그 안에 있는 기물조차도 바벨론으로 옮기셨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에게 긍휼 베풀기를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준비하셨고,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로 작정하셨다. 예수님은 때가 되매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사람들로 그 사랑을 깨닫게 하여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돌아와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에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는 의미가 있다.
111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대상 4:9)
산모는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자식을 낳는다. 그래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특별하다. 예수님은 우리를 낳을 때 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다. 그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은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영원한 것이다. 성경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고 말씀한다.
112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그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아므람의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이요 아론의 자녀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며”(대상 6:1-3)
하나님은 아론의 자손과 레위 지파의 사람들을 성전에서 일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성전에서 일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그들의 족보는 참으로 중요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113
“전에 곧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입하게 한 자가 왕이시었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대상 11:2)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고 한 약속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사울이 그를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그를 쫓았지만 그에게 미치지 못했고, 다윗에게 임한 숱한 환난과 어려움이 그를 실족시켜 왕이 되지 못하게 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명하셨는데 우리의 어떤 행위나 잘못된 생각조차도 우리에게 임하는 복을 막을 수 없다.
114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대상 12:1)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다윗을 돕는 용사들을 일으키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친히 모든 것을 준비하고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성실하게 일하고 계시며 마침내 그 약속을 지키신다.
115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이스라엘 무리와 더불어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사사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고”(대상 17:5,6)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친히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7,8)라고 말씀한다.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116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대상 18:6)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인해 애굽으로 팔려 간 일이나,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써 감옥에 가게 된 것을 보면 그는 고난이 많았던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심으로 형통했다고 말씀한다. 요셉이 당한 그 모든 일들은 사실 그를 총리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항상 이기게 하신다. 우리 보기에 마치 재앙처럼 보이는 일들도 결국은 하나님을 배우고 얻게 하여 마귀를 이기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다.
117
“다윗이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대상 22:5)
우리는 복음의 일을 하기에 지극히 미약한 자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모가 어린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듯이 우리에게 복음을 섬길 힘도 주시고, 성도를 섬길 마음도 주시고, 복음을 전할 길도 열어 주신다.
118
“여두둔에게 이르러서는 그의 아들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시므이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의 아버지 여두둔의 지휘 아래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대상 25:3)
성전에는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들이 있었다. 모든 환난에서 건짐받은 다윗이 하나님을 노래하였던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마땅한 바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하나님을 향한 노래에 미숙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장성하게 되면 우리는 큰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노래하게 된다.
119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2)
대장장이가 쇠를 연단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연단하신다. 우리가 연약한 자를 판단할 수 없고, 자기의 강함을 자랑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2-4)고 말씀한다.
120
“성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가 삼십오 규빗이요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 성소 같이 사슬을 만들어 그 기둥 머리에 두르고 석류 백 개를 만들어 사슬에 달았으며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대하 3:15-17)
야긴과 보아스는 솔로몬 성전 입구에 세워져 있는 두 놋 기둥이다. 야긴은 ‘그가 세우실 것이라’는 뜻이며, 보아스는 ‘그 안에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마귀를 쫓아 죄악에 물든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을 섬기는 자로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