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장학금을 받았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노력의 대가다. 그러나 학교에서 모든 학생에게 컴퓨터를 무료로 나누어 준다면 그것은 학생들에게 선물이 된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많은 국가에서는 자기 국민들에게 무료로 지원금을 주었다. 그 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받을 수 있었기에 그것은 정부가 국민에게 베푼 은혜이며 선물이다. 이처럼 선물이 선물답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도 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롬 4:4)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은 것은 당연히 받아야 할 대가이지 은혜나 선물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만일 예수님이 착하고 겸손한 사람이나 교회를 다니는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떠나 마귀의 종이 되어 악을 행하고 있을 때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성경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고 말씀한다.

또한 성경은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롬 4:16)라고 말씀한다. 선물은 받기만 하면 자기 것이 되는 것처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된다.   


죽음 직전에 구원받은 십자가 강도

성경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가던 한편 강도가 그랬다. 그는 자기 행위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사형받을 정도의 악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 욕을 했던 사람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38:44)

예수님 양편에 있는 두 강도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당시 예수님을 욕했다. 그런데 한편 강도는 여전히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한편 강도는 변화되어 예수님을 믿고 낙원을 약속받았다. 그의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39-43)

한편 강도는 사형당할 죄를 짓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다른 편 강도는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욕하던 그가 짧은 시간 안에 스스로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항상 옳았기에 죄 없는 분인 것을 알았고,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자기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두 손과 두 발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기 때문에 어떤 선한 행위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한 것은 오직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듣고 믿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구원은 순간적

십자가 강도가 구원을 받는 데 걸린 시간은 채 6시간이 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노력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고넬료와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면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천사가 환상 중에 고넬료에게 나타나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오라고 했고,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하여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들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39-44)

고넬료와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베드로의 말을 들었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 성경은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라고 말씀하는데 그들이 예수님이 자기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성령은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 이처럼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구원은 순간적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마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마귀가 선악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에게 자기의 벗은 것을 보게 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했던것처럼, 지금도 동일하게 마귀는 우리를 속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죄악된 자신을 보게 하여 선악의 법으로 정죄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고 말씀한다. 추운 겨울에 꽁꽁 언 얼음에 따스한 햇살이 비치면 얼음은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마음속에 비치면 죄로 인한 형벌의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0:12)는 말씀처럼 사랑은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다. 그래서사람은 사랑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이십에 판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보응을 두려워했다. 흉년이 들어 그들이 애굽에 곡식을 사러 왔을 때 정탐으로 몰리자, 그들은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 42:21)라고 말했고, 제일 맏형인 르우벤 역시도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창 42:22)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이 요셉에게 범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가나안에 있는 그의 가족을 애굽으로 데려와 자기가 누리는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행한 악으로 인해 자기가 그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에게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 일을 위해 요셉은 형들을 자기를 판 죄 위에 죄를 더하게 함으로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죄인으로 몰아갔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곡식을 사러 왔을 때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을 정탐으로 몰아갔다.  그러고는 시므온을 감옥에 가두고, 그들이 말한 말째 아우를 데려와 그들이 정탐이 아님을 증명하라고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형들의 자루에 곡식을 사기 위해 가지고 온 돈을 도로 넣어 도둑으로 만들었다.   

형들은 도둑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 자루에 있던 돈을 도로 가지고 막내 동생 베냐민과 함께 곡식을 사러 애굽에 두 번째 왔다. 그때 요셉은 그들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하루를 묵게 하고는 고향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의 자루에 곡식을 사러 가지고 온 돈을 도로 넣었을 뿐만 아니라 베냐민의 자루에 자기의 은잔까지 넣었다. 그러고는 청지기를 시켜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뒤쫓아가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을 찾아내게 하여 형제들을 선을 악으로 갚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되게 했다.   

마침내 형제들의 마음에 사망이 왔고, 그들이 죽은 사람처럼 되어 요셉 앞에 돌아와 다시 섰을 때 그제야 요셉은 그들에게 자기를 밝히면서 형제들을 기뻐하여 입 맞추고 안고 울었다. 형들은 요셉을 판 죄 위에 곡식 산 돈을 도둑질한 것과 자기들에게 베푼 은혜를 악으로 갚은 모든 죄를 알면서도 요셉이 자기들을 진정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기쁨의 눈물 속에서 보았다. 그러면서 형들은 자기들의 모든 죄가 요셉의 사랑으로 덮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는 말씀처럼 요셉의 형들에게는 요셉을 판 죄 위에 죄가 더해질 수록 자기들을 향한 요셉의 사랑이 더욱 크게 보였고, 그 사랑 안에서 요셉을 판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보이셨느니라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도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이셔야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해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성경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라고 말씀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 죄를 위함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을 준비하신 것을 보면 인간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결혼한 여인이 아직 임신도 하기 전에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사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종이 되므로 인해 하나님을 슬프게 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떠나 죄악된 삶을 사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보이셔서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서로 화목하게 되어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셨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성경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라고 말씀한다. 동과 서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에 영원히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죄를 영원히 만나지 못하도록 완전하게 제거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데 우리 죄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못하게 하셨다.    


쳐다본즉 살더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주심으로 그것을 증명하셨고, 우리에게 그 사랑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나를 바라봄으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라고 말씀한다.

애굽에서 나와 오랜 세월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빠른 길을 두고 에돔 땅을 둘러 가게 되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뱀들이 떠나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고,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고,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보면 모두 살았다.

장대에 달린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자기 죄가 십자가에서 이미 용서됐음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불뱀에 물린 자가 고개를 들어 놋뱀을 바라보는 것만큼 쉽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바라보는 데서 돌이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된다. 불뱀에 물려 자기의 어떤 노력과 방법으로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던 사람이 놋뱀을 바라보면 생명을 얻었던 것처럼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영생을 얻게 된다.   


차별이 없느니라

마귀는 사람이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죄악된 자기만 보게 한다. 그래서 마귀에게 속은 사람은 죄악된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은 자기 같은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으며 절대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고 말씀한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나 남에게 판단을 받는 사람이나 누가 더 나은 것 없이 동일하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장차 있을 환난의 날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잡히시는 날 자기 목숨을 위해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것같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면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기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은 동일하기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된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기에 차별이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믿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인은 행위가 의로운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이며, 죄인은 행위가 악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여리고 성에서 기생으로 살았던 라합도, 여섯 번째 남자와 삶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사마리아 여인도, 로마 사람을 위해 자기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임으로 죄인 취급당했던 삭개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고 말씀하는데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된다.

다 이루었다

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범한 죄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어떤 죄에 대해 회개해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 어떤 사람은 양심이나 율법 그리고 세상 법을 어긴 것을 하나님께 범한 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죄들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 다짐이나 각오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죄가 있다. 그 죄를 모르면 올바른 회개를 하지 못하여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선악을 알게 된 인간

창세기 3장에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죄를 범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에덴 동산에 두셨다. 그리고 그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 그의 아내로 주셨다.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담의 아내 하와에게 뱀이 접근하였다. 이 뱀에 대하여 요한 계시록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계 20:1,2)

여기서 말씀하는 옛 뱀은 하와를 유혹했던 뱀을 말한다. 성경은 이 뱀을 마귀요 사탄이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뱀이 여자에게 접근하였다는 것은 마귀가 그에게 접근한 것이다. 마귀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그러자 여자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2,3)고 대답했다. 그때 마귀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고 말했다.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나무를 보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로 보였다. 여자는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었다. 그러자 아담도 그것을 먹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자 뱀의 말대로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에 없었던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들은 단지 선악을 알았을 뿐인데 그들의 눈이 밝아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법을 통해 역사하는 마귀

법은 이전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을 주목하게 하며,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든다. 바닷가에서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큰 고기를 잡았지만, 미련 없이 그것을 바다에 도로 던져 넣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이 훨씬 더 큰 고기를 잡았지만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고기를 자로 재어보고는 다시 바다에 던져 넣었다. 그곳에는 사람이 잡을 수 있는 고기의 크기가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 법을 어기면 많은 벌금을 물어야 하므로 사람들은 법이 정한 크기보다 작은 고기를 잡으면 바다에 도로 넣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법을 모르는 사람이 그곳에서 낚시를 한다면 그는 고기가 잡힐 때마다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 곳의 법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자기가 잡은 고기의 크기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의 벗은 것이 보인 것은 그들이 선악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롬 7:8)는 말씀처럼, 그들이 선악을 알지 못했다면 그들의 헐벗은 것을 악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귀는 법을 통해 사람에게 역사한다. 그래서 성경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고 말씀한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가 알게 된 선악 간의 법으로 그들의 헐벗은 것을 악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하나님이 그들을 형벌하실 것이라고 속였다.  

사실 하나님에게는 아담과 하와의 헐벗은 것이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우리가 동물의 벗은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그것을 악하게 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아담과 하와를 보실 때 그랬다. 만일 하나님이 아담의 벗은 것을 악하게 보셨다면 그를 창조하실 때부터 그 몸을 가렸을 것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기 전에는 그의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은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의 벗은 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하나님은 당신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대답했다. 그때 하나님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의 벗은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그 선악 간의 법으로 자신을 정죄했기 때문에 형벌의 두려움을 갖게 되어 당신을 피하여 숨은 것도 아셨다. 또한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뱀이 있었다는 것을 아셨기에 뱀에게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4,15)고 말씀하셨다.

아담이 자신의 벗은 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다는 것은 마귀의 음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가 마귀의 음성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했던 것이다. 아담이 비록 선악을 알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다면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1서 4:18)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불신함으로 두려워하여 마음에서 하나님을 떠났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떠난 것을 두고 성경은 그가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씀한다. 사람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가 되면 그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죽음에는 분리라는 개념이 있다. 성경에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롬 6:2]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우리가 죄와 분리가 되어 죄와 상관이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롬 7:4]는 말 역시 우리가 율법과 분리가 되어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떠나므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가 되어 하나님과 상관없는 죽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되는 날 반드시 죽을 것을 아셨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아담이 선악을 알게 되자 마귀는 즉시 그에게 역사했다. 마귀는 그가 알고 있는 선악 간의 법으로 그를 속여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떠나게 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를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8:44)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씀한다. 여기서 말하는 한 사람은 아담을 말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에 죄가 없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종이 되므로 인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라는 말씀에서처럼 사람을 말한다. 아담이 마귀를 받아들이자, 죄의 주체인 마귀는 그의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죄들이 나타났다.  

아담이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을 때 모든 사람도 함께 죽었다. 성경은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롬 5:14)라고 말씀한다.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과 같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도 않았고,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을 떠난 적도 없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할 때 우리도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먹을 때 그의 안에 있던 우리도 함께 먹었고, 아담이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을 떠날 때 우리도 그와 함께 하나님을 떠나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죄

하나님을 불신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눈과 귀를 막고 마귀를 향해서는 마음을 열었다. 마귀는 그런 인간 속에 자기의 모든 악한 것들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1서 2:16)고 말씀한다. 마귀는 사람 속에 온갖 정욕을 일으키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을 정죄하여 형벌을 두려워하게 만들어서 더욱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

또한 마귀는 사람으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하나님을 멸시하고 외면하게 만든다. 마귀보다 지혜롭지 못한 인간은 항상 마귀에게 미혹되어 마귀를 쫓아 악을 행한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마귀의 종이 되어 항상 악을 행하는 우리를 보시고 진노하셨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마귀에게 속해 마귀가 주는 정욕을 따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죄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죄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너희 조상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렘 16:11)고 말하라 하셨다. 그래서 예레미야 2장 19절에는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한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짝하여 간음을 행한다면 분노하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버리고 마귀를 음란하게 섬기는 것을 보고 진노하셨다. 그 분노가 얼마나 큰지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나 1:6)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한 것은 바로 마귀다.   


마귀의 정체

마귀는 타락한 천사 루시퍼다. 하나님은 그를 창조하실 때 지혜가 충족하며 아름답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를 높혀 천사장 중의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마귀는 자신의 뛰어남으로 인해 교만하여졌고, 영화로움으로 자신의 지혜를 더럽혔다. 그는 하나님과 비기려는 마음을 가짐으로 인해 그를 추종하는 천사들과 함께 땅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음부에 떨어지기로 작정 되었는데 성경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2-15)

또한 마귀의 마지막에 대해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고 말씀한다. 이것이 마귀의 정체이며 결국이다. 마귀는 자신을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도록 작정한 하나님에 대하여 분한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함께 지옥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께 보복하려고 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결코 자신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교만하기에 사람을 향한 그의 잔인한 뜻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고전 6:16)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마귀와 짝함으로 그와 한 육체가 되었다. 그로 인해 우리도 마귀와 함께 영원한 불못에 들어갈 운명이 되었다. 그럴지라도 마귀에게 속은 사람은 자신의 결국을 깨닫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두 기생이 솔로몬 왕 앞에서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할 때 솔로몬이 칼로 아이를 반으로 나누어 두 여인에게 각각 나누어 주라고 말하였지만, 그 아이는 자기가 반으로 나뉘어져 죽게 될 운명에 놓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솔로몬의 칼이 진짜 엄마의 마음을 불붙게 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영원한 멸망 아래 놓이게 되자 하나님의 마음은 불붙는 것 같이 뜨거웠다. 가짜 엄마는 아이가 반으로 나뉘어져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진짜 엄마는 절대 아이를 죽게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마귀와 함께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 보고만 계실 수 없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욜 2:18)는 말씀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당신의 분노를 돌이키게 했다. 그래서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고 말씀한다.   


예수님을 준비하신 하나님

자식이 죽을죄를 지었을 때 부모는 그에게 죽일 듯이 화를 내어도 죽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비록 우리에게 진노하셨지만, 우리가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 허락하실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해 내셔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저주받아야 하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 대신 예수님에게 저주를 내리심으로 우리를 용서하기로 작정하셨다.

성경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할 것을 아시고 창세 전에 이미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여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하셨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높은 보좌에 앉아 우리를 지켜보며 잘잘못을 따라 심판만 하는 분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신 분이다. 사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기에 예수님의 고통은 곧 하나님의 고통이며, 예수님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이나 다름이 없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알게 하셔야 했다. 사람이 죽을병에 걸렸어도 그것을 모르면 아무리 좋은 약을 줄지라도 그 약을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마귀와 함께 영원한 멸망을 받을 운명에 놓여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면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주실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와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사망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셔야 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사실 우리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간음이 보편화되어 있는 곳에서는 간음을 죄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양심은 환경에 따라 무뎌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경은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롬 5:13)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양심이 무뎌져 자신이 죄인 됨을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을 주셨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우리 마음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그래서 율법으로 우리 마음을 비추어 보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알게 된다. 사람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엡 5:12)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율법은 다른 사람에게는 있으나 자기에게는 없을 것 같은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죄들까지도 적나라하게 들추어낸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 27:19)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에 범람하고 있는 모든 죄악이 우리 속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죄없이 창조된 인간 속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죄의 주체인 마귀가 사람 속에 악한 것들을 넣었기 때문이다. 마귀는 사람 속에 육체의 정욕을 일으켜 그것을 좇아가도록 미혹한다. 마귀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같이 육체와 마음의 정욕을 따라 행한다.

사도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도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했다. 율법은 선한 것이기에 그는 율법을 좋아하고 지키려 했지만, 오히려 율법을 어기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과 자기로 악을 행하게 하는 죄가 자기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8-20)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 있는 죄가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기를 이겨 항상 악을 행하게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1-23)라고 그는 말했다.

주인의 손에 잡힌 강아지가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가는 것은 주인이 강아지보다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처럼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 있는 죄가 자기보다 힘이 강해서 언제나 자기로 죄를 짓게 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나 죄에 정복당하는 자신을 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했다. 죄는 육신을 통해 온갖 정욕을 일으키기 때문에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다.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자신을 보면서 자기를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줄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저주 아래 있는 자

사실 율법은 무섭기가 한이 없다. 율법은 우리가 한 개의 계명만 어겨도 율법 전체를 어겼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10,11)고 말한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가 하나의 계명만 어겨도 우리에게 저주를 요구한다. 성경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고 말씀한다. 결국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우리는 저주 아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악을 행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말씀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9-19)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 7:12,13)고 성경은 말씀한다.

율법은 선하다. 그렇다고 율법이 우리에게 선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마귀에게 정복당한 우리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가 선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통해 항상 악한 우리를 보게 한다. 그리고 율법은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여 우리가 저주 아래 있음을 알게 한다. 율법을 통해 자기 힘으로는 절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마음에는 사망이 온다. 그런 사람은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 줄 구원자를 찾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갈 3:24)의 역활을 한다.


진노 속에 숨겨진 사랑

아버지가 잘못을 범한 아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아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올바른 길을 걷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우리가 당신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마귀에게서 벗어나 당신에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진노 속에 아버지의 사랑이 숨겨져 있듯이 하나님의 진노 속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숨겨져 있다.

만일 하나님이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만 우리에게 주셨다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율법과 함께 예수님도 주셨다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살리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고 말씀한다.

율법의 속죄 제사

예수님이 우리 죄를 해결하러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특히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율법에는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용서받는 속죄 제사가 있는데 그 속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속죄 제사를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 죄를 씻어 정결케 하셨는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먼저 율법에 기록된 속죄 제사를 숙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율법에는 죄를 지은 사람에 따라 그 드리는 속죄 제사가 다르다. 그러나 우리 같은 평민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속죄 제사와 이스라엘 사람이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한 번에 용서받는 속죄 제사만 알아도 예수님이 우리 죄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먼저 우리 같은 평민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죄를 씻는 속죄 제사는 다음과 같이 드려졌다. 이스라엘 사람이 죄를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자신이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성막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사람은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자신이 지은 죄를 염소에게 넘겼다. 그러고는 죄를 건네받은 염소를 죽이고 그릇에 염소의 피를 받았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릇에 받은 염소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단 밑에 쏟았다. 그 후에 제사장은 염소의 가죽을 벗기고 기름을 취하여 번제단에서 불살랐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죄를 지은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깨끗하게 되었다. [레위기 4장 참조]

여기서 제사장이 염소의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른 것은 번제단 뿔에 사람이 지은 죄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두 군데 기록이 된다. 성경은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렘 17:1)이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제사장은 번제단 뿔에 기록된 죄를 염소의 피로 덮어 보이지 않게 하였다. 그런데 우리 마음 판에 기록된 죄는 염소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가려진다.     


대속죄일

매년 7월 10일이 되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씻는 속죄 제사를 드렸다. 이 속죄 제사는 평민이 직접 염소에게 안수하여 자기 죄를 넘기는 속죄 제사와는 달랐다. 이날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각자가 염소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표가 되어 죄를 넘겼다.

이날에는 먼저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여 넘기고, 그 수송아지를 죽여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 동편과 앞에 일곱 번 피를 뿌려 일 년 동안 지은 죄에서 자신을 먼저 정결케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대제사장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죄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두 마리의 염소 중 한 마리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넘겼다. 그러고는 죄를 담당한 염소를 대제사장이 죽여 그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다시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앞에 그 피를 뿌렸다.

지성소에서 나온 대제사장은 남아 있는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번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단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의 부정에서 번제단을 속죄하여 성결케 했다. 그런 후에 대제사장은 남아있는 다른 한 마리의 염소 즉, 아사셀(내어놓음)을 위한 염소의 머리에 두 손으로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에게 넘겼다. 그러면 그 염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지었던 죄를 지고 미리 정한 사람의 손에 이끌려 성막에서 나와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에 버려졌다. [레위기 16장 참조]

그 후에 대제사장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죽었던 수송아지와 염소의 가죽과 고기와 똥은 성막 밖에서 불살랐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제사장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 년 동안 지었던 모든 죄에서 용서받고 정결케 되었다.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의 죄를 지고 가는 아사셀 염소는 우리 죄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아사셀 염소가 광야에 버려지기 위해 사람의 손에 이끌려 성막 밖으로 나오면 성막 밖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지고 가는 그 염소를 보았는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의 그림자다.  


세상 죄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이스라엘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해 양이나 염소가 피를 흘려 죽었던 것은 율법에는 피로써 거의 모든 것이 깨끗하게 되며 피흘림이 없으면 죄의 용서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이나 염소의 피는 지었던 죄만 씻을 수 있었지, 앞으로 지을 죄까지는 씻을 능력이 없었다. 만일 염소의 피가 사람이 지은 죄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단번에 씻을 수 있었다면 속죄 제사를 한 번 드리고는 더 이상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히 10:2)라고 말씀한다.

또한 성경은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 10:1)고 말씀한다. 양이나 염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짐승의 피로는 사람의 모든 죄를 한 번에 완전히 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단번에 씻어 영원히 깨끗게 할 제물을 준비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예수님에게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시키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말했다. 7월 10일 대속죄일 때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사람이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염소에게 넘겼듯이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우리 모든 죄를 넘기셨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우리 문제를 담당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문제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우리 문제를 담당해 준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 인해 우리 죄의 문제는 더 이상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로 넘어갔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예수님보다 육 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인데 그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속죄 제물이며 세상 죄를 지셨다고 증언했다.  

우리가 예수님이 지신 세상 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이라는 말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세상은 사람이 있어야 존재한다. 그래서 세상은 아담이 창조되면서 시작되었고, 장차 이 지구상의 마지막 한 인간이 죽으면 끝이 난다. 그래서 세상 죄라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사람의 죄를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종이 되어 마음과 육체를 따라 지은 모든 죄를 예수님이 지셨던 것이다.


다 이루었다

죄를 씻기 위해서는 피가 흘려져야 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죗값인 사망을 치르기 위해서 우리 죄를 지고 채찍을 맞으며 갈보리 산으로 끌려가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을 미리 보고 성경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결국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마지막 말씀을 큰 소리로 외치고는 운명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용서받아 흠이 없고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뜻을 다 이루셨다.


율법도 죄도 형벌도 다 없애신 예수님

율법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말한다. 율법은 사람에게 죄가 전혀 없는 거룩함을 요구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신 6:25)고 말씀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거룩하게 되어 의롭게 될 자는 아무도 없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율법은 거룩하지 못한 자에게는 저주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죄악된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받으신 저주로 인해 우리의 죄는 용서를 받아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었다. 성경은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인 거룩함과 저주를 친히 다 이루셨다. 그로 인해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로 율법을 폐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4,15)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정죄하던 율법도 폐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도 용서하시고, 형벌도 우리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과 죄와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사실 율법과 죄와 형벌 중 하나만 해결되어도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과 죄와 형벌 모두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셨다. 그로 인해 우리에게는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을 방해할 어떤 장애물도 없다.

예수님으로 인해 마귀는 우리를 속일 모든 근거를 잃어버렸다. 단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는 하나님이 아담의 헐벗은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으시는데도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아담을 속였던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는데도 그 본질을 숨기고 마치 하나님이 우리 죄를 문제 삼으시는 것처럼 속이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약속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마귀와 짝하여 지었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그러고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는 약속을 하셨다. 사실 성경은 약속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이 소제목만 보더라도 성경은 약속의 책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구약‘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하나님이 하신 첫 번째 약속이다. 이 약속은 사람의 행위에 기반한 것인데 사람이 모든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하나님은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히 8:9)고 말씀하셨다.

결국 첫 번째 약속으로는 죄악된 인간이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로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흠이 없는 새로운 약속 즉, 두 번째 약속을 하셔야 했다. 그래서 두 번째 약속은 우리의 행위에 기반하지 않은 예수님의 공로로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곧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당신의 피를 가지고 이 땅에 있는 성소가 아닌 하늘 성소에 가서 그 피를 뿌려 ‘영원한 속죄’(히 9:12)를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는 새로운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셔서 죄를 깨닫게 하여 우리가 사망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던 이유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새로운 약속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고 말씀한다.


생명의 성령의 법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은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셨다. 성경은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5-18)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은 약속인 동시에 법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성령이 증언하신 이 새로운 약속은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법이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시기 때문에 이 새로운 약속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성경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고 말씀한다.

전쟁 중에 탈영병은 사형을 시킨다는 법이 있는 나라에서는 전쟁 중에 도망한 사람은 사형의 두려움 속에서 떨어야 한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탈영병을 사면해 주는 법이 생기면 그 사람은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된다. 이처럼 법은 법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 우리를 정죄하여 우리를 사망 아래 놓이게 했던 ‘죄와 사망의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 제재를 받아 무력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되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사망 아래 놓이게 되자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영원 전부터 예수님 안에 있었고, 영원까지 예수님 안에 있는 법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 안에 들어온 우리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만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원히 정죄함이 없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고 법에 있다. 사람이 어떤 법 아래에 있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달라진다. ‘죄와 사망의 법’ 아래서는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지만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는 생명을 얻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리는 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고 말씀한다.


조건 없는 사랑과 은혜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의롭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심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을 아시기에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해 놓으셨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고 말씀한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얻은 의로움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 얻는 의로움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해 놓으신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성경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Justification)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Righteousness)로 여기시나니”(롬 4:5)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인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의인이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4-7)고 말씀한다.

성경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고 말씀한다. 만일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고 말씀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떠나 마귀와 짝하고 있을 때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모에게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조건 없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에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회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떠났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셔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서도 우리 죄를 씻을 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굳이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택하신 것은 그만큼 우리의 구원이 값진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성경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율법의 속죄 제사를 통해 그들의 죄를 씻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하신 것은 날마다 짓는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참된 회개란 날마다 짓는 죄에 대해서 용서를 빌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 다짐이나 각오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예수님이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을 믿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예수님의 양편에서 두 강도도 함께 죽어갔다. 그런데 처음에는 두 강도 모두 예수님을 비방했다. 그런데 한 강도가 죽음 직전에 회개했다. 그러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아무리 죽을죄를 지은 악한 자라도 예수님을 영접만 하면 구원을 받아 천국을 유업으로 받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 그래서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말씀한다.

  
심판받을 죄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두어 사람이 예수께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2-5)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죄를 많이 지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 심판받을 죄다. 불신자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지극히 큰 사랑을 보이셨는데도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마귀의 종이 되어 산 것으로 인해 심판을 받아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6-29)  

여전히 마귀에게 속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는 자다. 성경은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고 말씀한다. 이 죄는 짐짓 죄에 해당하며 이 죄에 대한 속죄 제사는 없다. 그래서 성경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고 말씀한다.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

요한 계시록에는 하나님이 마지막 날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말씀이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1-15)

지옥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부분에서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도 지옥에 대해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8,49)고 말씀하셨다. 지옥은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곳이기에 그 무섭기가 한이 없다. 심판 날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비웃고 믿지 않았던 자들이 심판 날에 오직 맹렬히 타는 진노만을 가지신 하나님을 보면서 두려워 떨며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심판날의 판결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 앞에 생명책이 있는데 그 생명책에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판가름 난다. 생명책에 기록이 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가 되어 불못에 떨어지는 둘째 사망을 당하게 된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 보지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는 하나님을 보면서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살갗이 터지며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모진 채찍을 맞으면서 십자가로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며 죽으셨는데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에 대하여 절대 용서하지 않고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듯 진노 역시 영원하기에 지옥은 영원한 곳이다. 성경은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8,19)고 말씀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이 땅에서 이미 지옥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마지막 날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날 심판 때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는데도 이날은 사람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신다. 왜냐하면 죄인이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한 말이나 행위는 그가 마귀에게 속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고 말씀한다.

소가 돼지처럼, 돼지가 소처럼 살 수 없는 것처럼 의인은 의인답게, 죄인은 죄인답게 살기 마련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요 8:41)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가 주는 마음을 따라 악을 행하며 살다가 심판을 받는다. 성경은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고 경고한다.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고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신 하나님이라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당신에게 나아오는 자를 거절하실 리가 없다.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담을 헐어버리시고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7,38)고 말씀한다. 거룩한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지성소에는 죄가 있는 사람이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 휘장이 막고 있었다. 그래서 대속죄일 때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던 대제사장도 죽임을 면하기 위해 먼저 자기의 죄를 씻고 들어갔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완벽하게 씻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휘장이 지성소를 가리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성소의 휘장을 찢어버리셨다.

우리 앞에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고 말씀한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고 말씀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는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지 모른다. 아직은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 열려 있다. 그러나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눅 13:25-27)고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고 계실 때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본래 마귀의 자녀였는데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었기에 성경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말씀한다.

우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는데 이제는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분에게로 돌아와 그분이 기르시고 돌보시는 양이 되었다.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7-29)고 말씀하셨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고 노래했다. 목자는 모든 위험에서 그의 양들을 지키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며 그들을 위해 일한다. 그러므로 양들은 목자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안식하게 된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기에 하나님의 사랑 역시 영원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깨닫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고 누리는 정도가 다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만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용서라는 것은 피해를 본 사람이 피해를 준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간음을 행했다면 아내는 남편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남편을 용서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마귀와 짝함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로 인해 고통을 당한 피해자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신 것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경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말씀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행위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얻은 생명은 영원한 것이기에 ‘영생’이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다는 사실[히 6:18]과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요17:17]라는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절대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고 말씀하신다.

제1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듯이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다. 성경은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것을 알 뿐이다.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주님”(주인님)이라고 부른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으며, 어둠이 깊은 수면 위를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혼돈을 해결할 해답을 가지고 계셨다. 그 해답은 바로 빛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빛이 생겨났고, 땅을 덮고 있던 어둠은 즉시 물러갔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이 깊은 어둠 속에 있었다. 우리는 그 어둠에서 벗어날 어떤 지혜도 능력도 없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빛이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마음속 어둠은 사라지고 대신 하나님의 빛이 충만하게 되었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셨기에 둘은 결코 함께할 수 없다. 성경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오직 빛의 자녀만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다. 하나님은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를 천국과 지옥에 각각 두어 영원히 구별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은 땅을 덮고 있던 물을 나누시고, 그 사이에 하늘이라 불리는 궁창을 두셨다. 이 궁창은 물로 둘러싸인 구조이며, 그 안에는 호흡하는 모든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성경에서 ‘물’은 정결, 생명, 심판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만, 특별히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으며,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끝없는 생명과 참된 복락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물이 땅을 덮고 있던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땅에 아무 일도 행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땅에서 역사하시기 전에 먼저 그 땅을 가리고 있던 물을 거두어 내시는 일을 하셨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다. 우리의 마음은 수많은 생각들로 덮여 있으며,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고후 4:4) 한다는 말씀처럼, 이러한 생각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으시기 전에 먼저 잘못되고 혼미한 생각들을 제거하신다. 우리의 생각이 온전히 내려지고 나면, 비로소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우리의 참된 모습과 근본이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채소나 열매에 있는 씨가 땅에 뿌려지면 뿌리를 내리고 자라 결국 같은 모양의 채소와 열매를 맺는다. 씨 속에는 이미 그 종의 형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담의 씨 속에도 아담의 형상이 있었기에 그의 자손들은 아담의 모습을 닮아 태어나게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종종 ‘씨’에 비유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뿌려진 사람에게는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신 사람은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세계이기에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시간의 질서 안에 두셨다. 해가 뜨고 지면 하루가 되고, 그 하루들이 쌓여 일년이 되며, 그 안에 사계절이 돌아가도록 허락하셨다. 이러한 질서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시간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유한함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찾도록 이끄는 목적이 있다. 또한 정해진 때에 구원자 예수님이 오심을 알게 하려는 뜻도 담겨 있다.

하나님은 때때로 낮과 밤이 반복되는 자연의 법칙을 깨뜨려 징조를 보이기도 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어둠이 임한 것이 그 예이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징조였다.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낮과 밤은 되풀이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궁창에 두 큰 광명체를 두셔서 낮이나 밤이나 항상 땅을 비추게 하셨다. 우리의 삶에도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반복되지만, 빛이신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가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더 이상 어둠이 아니듯,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근심 가운데 머무는 것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라는 말씀처럼, 자신과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은 새가 하늘의 궁창에서 살고, 물고기가 물 속에서 살도록 창조하셨다. 각 동물은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새는 물 속에서 살 수 없고,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도록 지으셨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는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을 떠나 죽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안으로 돌아오면 생명을 얻게 된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물고기와 새들이 각기 주신 자리에서 충만하고 번성하기를 기뻐하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자리 잡아, 마귀가 주는 어떤 생각이나 욕망도 틈타지 못할 만큼 오직 하나님으로 가득 차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이미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성경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19–20)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동물을 지으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욥은 “모든 짐승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욥 12:7)고 말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주변 곳곳에 하나님을 가르치는 많은 것들을 준비해 두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 하나님처럼 거룩한 존재였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 거룩함이 깨져 버렸고, 그로 인해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잃어버린 거룩을 회복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인간이 가졌던 거룩을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셨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가운데 사람이 가장 뛰어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물과 구별하여 특별하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친히 흙으로 빚어 만드셨다. 그리고 사람을 모든 생물 위에 두시고 그것들을 다스리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시고, 하나님이 누리시는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도록 하셨다. 성경은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라고 말씀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천사들까지도 자신의 자녀를 섬기게 하신 것을 보면,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계획 속에서 얼마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입은 존재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은 사람과 동물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먹을 것을 친히 준비하셨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38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예비하신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이미 준비해 두셨기에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할 것을 가르치셨다.

제2장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는 일을 엿새 동안에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그리고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하다’는 뜻인데, 하나님은 일할 것이 없는 일곱째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시고 복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이 안식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는 안식 안으로 들어가게 되며, 성경은 이러한 자에 대해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 4:10)고 증언한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기서부터 성경은 하나님께서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역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눈에는 요한계시록이 장차 일어날 일들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그것마저도 이미 다 이루어진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모든 예언을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 또한 이미 완성된 사건이다. 더 나아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에 있는 것 역시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이미 완성된 이 모든 사실이 곧 우리의 실상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농부는 땅에 뿌린 씨가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땅을 일구고 거름을 준다. 그렇게 수고하여 가꾼 땅은 점점 윤택해지고, 마침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 마음에 당신의 말씀이 뿌리를 내려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끊임없이 수고하며 역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음을 경작하지 않은 사람은 “모든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의가 가득하며,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롬 1:29–31)가 된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마음을 경작하신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와 같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지으시고 그 안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사람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은 육체와 영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며, 영이 육체 안에 거하며 육체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는 작용이 곧 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영이 육체 안에 있을 때 가지는 혼적인 사고이다. 그러나 영이 육체를 떠나게 되면 더 이상 그러한 혼적인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이 육체를 떠난 후에는 육체와 연관된 혼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영은 정한 때가 되면 육체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도서 11:9)고 말씀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잠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에덴 동산에는 사람이 수고하지 않아도 먹기 좋은 열매가 풍성하게 있었다. 또한 동물들은 풀을 먹었기에 서로를 해치거나 잡아먹는 일도 없었다. 에덴 동산은 결핍이나 두려움이 없는, 평온하고 조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에덴 동산이 참으로 에덴 동산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더 이상 에덴 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하셨다. 예수님 안에는 사랑과 화평, 기쁨과 안식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이 곧 우리 영혼의 에덴 동산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가 선악을 알게 되는 날에 정녕 죽을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아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과 몸이 분리되면 죽음에 이르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분리되면 하나님에 대하여 죽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함으로 인해 선악의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될 것을 염려하셨다.

우리는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선악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선악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정죄하며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을 보고 그것을 믿게 되었을 때, 그 사랑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 보건대 문제는 사람이 선악을 알게 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는 데에 있다. 그것이 곧 죄이며, 그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생명을 얻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그를 도울 아내를 만들어 주고자 하셨다. 그러나 아담이 거하던 에덴동산은 이미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기에, 아내가 아담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아내가 아담을 도울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그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우리를 신부로 자주 비유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을 돕는 배필로 세우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그분을 위해 무엇을 더할 수는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내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존재로 지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아담은 각 동물에게 이름을 지었다. 그는 이름을 붙일 때, 그 동물의 특성이 잘 드러나도록 지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흙으로 지으신 첫 사람을 ‘아담’이라 부르셨는데, ‘아담’은 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름에는 그 존재의 본질과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 역시 여러 이름을 가지고 계신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를 뜻하며,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 ‘엘 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 ‘엘 로이’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또한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 ‘여호와 라파’는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샬롬’은 ‘여호와는 평강’이라는 뜻을 지닌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많은 이름을 가지신 것은, 그 이름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특별히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우리는 그 이름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은 자기에게 여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그를 도울 배필이 필요함을 아시고, 아담을 위해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갈빗대를 취해 여자를 만드실 때, 아담은 깊이 잠들어 있어 그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도 무엇이 우리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인지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실 때 우리는 잠든 아담처럼 그분의 역사하심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당신의 행하심을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복된 사람이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그의 아내를 만드셨기에, 여자의 근원은 아담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기에게 속한 것을 사랑하므로, 아담은 자기 몸처럼 그의 아내를 사랑하였다.

성경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히 2:11)라고 말씀한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은 우리는 모두 한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이며, 하나님께 사랑받는 하나님의 것이다.

예수님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는 말씀은 아담 한 사람만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다. 아담에게는 육신의 부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에는 깊은 비밀이 담겨 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모든 사람은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예수님도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 8:4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를 떠나,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께로 돌아가 그분과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룰 때,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 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변화에는 언제나 변화되기 전과 변화된 후가 있다. 아담에게도 선악을 알기 전과 후의 상태가 분명히 존재했다. 선악을 알기 전에는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지만, 선악을 알고 난 후에는 자신이 벗은 줄을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삼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로 인해 고통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죄에서 해방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었다. 성경은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라고 말씀한다.

제3장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은 말에서 우리는 뱀의 간교함을 볼 수 있다. 뱀은 이 질문을 통해 여자의 시선을 ‘모든 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금하신 한 가지 실과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는 먹도록 허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못하게 하셨는지에 대해 여자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여자가 그 주제를 가지고 뱀과 대화를 나누도록 유도하였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같은 방식이 사용되었다.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6)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으며, 그 말씀을 이용해 예수님까지 유혹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오늘날 우리를 유혹하지 않을 리 없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는 순간, 말씀이 변질되고 말았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말씀이 변질되면, 그 틈을 타 사람을 속이고 유혹한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8-11)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먹으면 죽을 수도 있고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자, 마귀는 그 틈을 타 하와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유도해 갔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사람이 선악을 알지 못하게 하신 이유를,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지 못하도록 부족한 위치에 묶어 두고 그들 위에 군림하려는 불의한 의도로 왜곡시켰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람을 연약하고 부족하게 만들어 놓고 그들 위에 군림하며 섬김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 또 사람이 잘못하면 심판만 하시는 불의한 분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라고 말씀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마귀에게 속임을 받자, 본래는 자기를 죽게 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오히려 탐스럽게 보였던 것처럼, 사람이 마귀에게 속으면 자기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조차 좋게 여기게 된다.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고 말씀한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은 사람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 기쁘고 행복한 삶인 것처럼 착각하며, 다른 사람들 또한 자기와 같은 방식으로 살기를 원한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선과 악을 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항상 헐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 샤워를 하거나 공중 목욕탕에 있을 때는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옷을 입고 있는 장소에서 혼자만 옷을 입지 않았다면 우리는 극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되었을 당시, 세상에는 그들 둘밖에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몸을 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는 사실은, 이전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의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다름’을 보게 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마귀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정죄하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을 떠나게 만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우리를 속이려 한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그러나 바람이 불자 그 잎들은 흔들렸고, 그들의 몸을 충분히 가려 주지 못했다. 그때 하나님의 소리를 들은 그들은 감히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사람은 흠이 없는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 보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사 59:6)라고 말씀한다. 바람이 불면 무화과잎이 흔들려 속살이 드러나듯,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형편을 만나면 사람 안에 숨겨진 악함은 결국 드러나고 만다.

사람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이유는 자신의 악함을 완전히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악함을 온전히 가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뿐이다. 하나님은 장차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것을 아시고,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고 미리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을 모르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리는 없다. 이 질문은 아담의 위치를 묻는 말씀이 아니라, 그가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숨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물음이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아담의 몸의 위치가 아니라 마음의 위치를 물으신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했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이요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피해 숨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0:12)고 말씀한다. 비록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여전히 믿었더라면 하나님을 피해 숨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도록 끊임없이 미혹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를 의지한 채 하나님을 피해 숨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물으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자신의 헐벗었음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동물들이 벗은 채로 살아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문제되지 않던 것이 갑자기 문제가 되어 두려움이 되었다면, 그것은 마귀의 역사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통해 두려움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당신의 피로 씻어 용서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죄로 인해 두려워한다면, 그 두려움은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

마귀가 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뿐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죄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마귀가 주는 두려움에서도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하나님께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헐벗은 상태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마귀는 헐벗은 아담에게 하나님과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고, 그 극심한 부끄러움은 두려움을 낳았다. 그러나 아담이 느낀 두려움의 근원은 단순히 헐벗음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일에 대해 마귀가 선악의 법으로 그를 정죄했기 때문이다.

만일 아담이 마귀의 정죄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더라면, 그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했고, 그 결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는 처지가 되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지 못한 채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헐벗은 몸을 가리는 데에만 몰두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마귀는 오늘날에도 선악의 법으로 하나님처럼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며, 그들을 두려움 속에 가둔다. 많은 사람들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가리려 애쓴다. 그러나 시선이 자기 자신을 가리는 데에 머무는 동안에는, 십자가에서 자기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다.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스스로 가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때에야 비로소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 그때 사람은 죽기까지 자신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하와를 가리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라고 말할 만큼 그녀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아내를 감싸거나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사실대로 직고하는 모습을 보인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1,12).

사람은 때로 자기만 아는 죄는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을 사실대로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정죄받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이렇게 증언하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는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8-20)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한다.

이 고백처럼 우리 속에 죄가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혹을 받지도, 죄를 짓지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뱀이 하와를 꾀지 않았다면 하와가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온전히 이기지 못하듯, 하와 역시 죄의 주체인 뱀을 이기지 못함으로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는 말씀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연약함 위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참된 소망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범인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 범인은 바로 뱀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셨다. 하나님은 뱀에게 배로 다니게 하시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게 하셨다.

뱀이 흙을 먹는다는 말씀은,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육체를 대상으로 삼아 살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마귀는 사람 속에 육신의 정욕을 일으켜 인간을 유혹한다.

그래서 성경은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10-12)고 말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말씀을 믿는 믿음을 주셔서 마귀의 유혹을 이기게 하신다.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고 증거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의미한다. 뱀과 여자가 서로 원수가 된 것처럼, 예수님 또한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마귀와 원수가 되셨다.

마귀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통해 원수 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사건으로 인해 마귀는 예수님에 의해 머리가 상하게 되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자신이 승리한 듯 보였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때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 역시 생명을 얻어 예수님과 함께 살아나게 되었다. 그 결과 사망은 더 이상 예수님과 그 안에 있는 우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사람을 죽이는 독을 지닌 뱀의 머리는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짓밟힌 것이다. 성경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라고 증언한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큰 악을 행함으로써 여호와의 원수들에게 크게 비방할 거리를 주었다. 그 죄의 결과로 다윗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이 하와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은 여자가 많은 수고와 고통 가운데서 자녀를 낳게 하셨다. 이 고통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보여 주시는 깊은 표징이기도 하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산모의 해산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지만, 특히 어머니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녀를 낳았기에 그 사랑이 더욱 깊고 특별하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의 말할 수 없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자녀로 얻으셨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깊고 각별하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은 저주를 받았다. 땅이 저주를 받자, 원래 없던 상대를 찌르는 가시를 가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왔다.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육신 또한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결과 인간의 육신에서는 악한 것들이 나오게 되었고, 사도 바울 역시 이를 깨닫고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라고 고백하였다.

저주받은 육체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기에, 우리가 행한 것으로는 우리 자신을 가릴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받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말 1:8)라고 책망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도록 길을 여셨다. 이에 성경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라고 증언한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인간이 평생 얼굴에 땀을 흘리며 쌓아 올린 수고와 노력의 최종 결과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이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죽음으로 귀결되기에,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한다.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도서 2:11).

사람이 죽음 앞에 설 때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평생 짊어지고 살아온 수고와 슬픔뿐이다. 인간의 노력은 생명을 낳지 못하고, 그 끝은 허무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오직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달랐다. 그분도 육체를 입고 이 땅에서 수고하셨으나, 그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바라보며 이렇게 증언한다.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사도행전 2:31).

비록 예수님도 인간과 같이 육체를 입으셨지만, 그분의 수고와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인간의 수고가 죽음으로 끝난다면, 그리스도의 수고는 죽은 자를 살리고, 믿는 자로 하여금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게 한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떠남으로써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그의 아내를 ‘생명’이라는 뜻을 가진 ‘하와’라 부른 이유는, 장차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미리 보고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말씀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었고, 그 믿음 안에서 그는 죽어 있는 아내가 아니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될 아내를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었고, 그 결과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로마서 4:16)이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하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영생을 얻고 살아나는 모든 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벗은 몸을 부끄러움으로 느끼게 된 이상, 그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몸을 가리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의 몸을 온전하게 가릴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의 몸을 완전하게 가릴 수 있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 가죽옷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생명의 죽음이 필요했는데, 이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예표였다.

우리 또한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죄로 인해 생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다른 어떤 방법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는 길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죄와 부끄러움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되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한 가죽옷도, 우리의 죄를 위한 예수님도, 모두 우리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이다. 한겨울 매서운 바람 속에서 갈 곳 없이 떨고 있는 아이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덮어 주는 마음씨 착한 어른처럼, 예수님은 죄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품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한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하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가 아니라, 선악의 판단 아래서 스스로를 정죄하며 영원히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이유다. 죄는 사람을 생명에서 분리시키고, 끝없는 정죄와 고통 속에 가두어 버린다.

아담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가 그런 영원한 고통 속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단순한 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베푸신 은혜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참된 영생을 얻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영생은 죄 가운데 있는 상태에서 주어질 수 없다. 먼저 죄를 씻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셔야 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 그 생명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정죄와 두려움 속에 살지 않고, 참된 영생을 누리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고,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셨다. 그러나 땅은 스스로 아무것도 낼 수 없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아담이 자신의 능력이나 수고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자임을 알게 하셨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는 말씀처럼,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아담은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크며 절대적인지를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은혜 없이도 자기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안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도, 스스로를 의롭게 할 만한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기뻐하게 된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이는 죄 있는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모습은 성전의 지성소를 휘장으로 가려 두신 것과 같다. 지성소를 휘장으로 막으신 이유는 죄 있는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죄를 지닌 채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성경은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7–38)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다.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기에, 더 이상 휘장이 지성소를 가릴 이유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하늘 성소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히 10:20)을 우리 앞에 열어 놓으셨다. 그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계 2:7)를 먹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