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탑엔고 시스템

자동차가 신호등 앞에서 정차하면 자동으로 시동이 꺼지고, 출발할 때 다시 시동이 켜지는 기능을 ‘스탑앤고(Stop & Go)’ 또는 ‘ISG(Idle Stop & Go)’ 시스템이라고 한다. 이 기능은 불필요한 공회전을 줄여 연료를 절약하고, 배기가스를 감소시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기능이 없는 자동차만 운전해 온 사람은 신호등 앞에 멈춰 있던 옆 차에서 시동이 켜지는 소리를 들으면, 운전자가 직접 시동을 건 것이라고 생각하지 자동차가 스스로 시동을 다시 걸었다고는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스탑앤고’ 기능이 있는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게 되면, 주변에도 같은 기능을 가진 차량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놀라게 된다. 그동안 그런 자동차들이 곁에 있었지만, 자신이 그 기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영적인 세계도 이와 같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를 지을 때마다 정죄와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게 되면 죄에서 해방된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 안에서 감사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편 34:8)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과 아직 맛보지 못한 사람은 살아가는 마음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리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 가운데 살아간다. 그 세계는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한 번 맛보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은혜의 세계이다.

성격 테스트

많은 사람이 함께 성격 테스트를 해 보면,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생각이 놀라울 만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어떤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고 여기지만, 결과를 보면 예상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기준이 다른 사람에게도 반드시 옳은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의 판단 기준은 경험과 환경,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며,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조차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인간의 기준은 변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옳음을 내려놓고, 항상 옳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기준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스스로를 높이던 사람들을 향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 10:12))라고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헤아리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는 말씀처럼 자신의 죄성과 부패함을 보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서 더 이상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없고, 입을 가릴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렇게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본 사람이 구원자가 필요함을 깨닫고, 마침내 그분을 찾고 만나게 된다.

절름발이 강아지

한 강아지가 태어날 때부터 다리 하나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그래서 그 강아지는 늘 절뚝이며 걷고 뛰어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강아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강아지를 불쌍히 여겨 집으로 데려와 키우게 되었다. 그는 강아지가 절뚝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다리의 장애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때는 우리가 경건하고 의로웠을 때가 아니라, 아직 죄인이었을 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있을 때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악함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꾸거나 끊을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다시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미운 오리 새끼

미운 오리 새끼가 다른 오리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은 단지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싫어하는 것 또한 서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미운 오리 새끼가 사실은 아름다운 백조였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지만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므로 고난과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에게 성경은 이렇게 위로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이

수용소 안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수용소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수용소 밖의 세상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자신이 보고 경험한 세계가 전부인 줄 안다. 그러나 어느 날 수용소 밖에서 온 사람이 바깥세상을 이야기해 준다면, 비로소 자신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도 이와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자신이 경험한 삶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먼저 구원받은 사람이 복음을 전해 줄 때, 그제야 복음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3–15)

무료 라면

한 아프리카 자원봉사자가 자신이 봉사하던 마을 사람들에게 라면의 맛을 소개해 주고 싶었다. 그는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주겠다”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더 이상 올 사람이 없자 그는 큰 솥에 라면을 한꺼번에 끓였다. 그리고 그곳에 온 모든 사람에게 라면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하시며 천국을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한 임금에 비유하셨다. 임금은 혼인 잔치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한 뒤 사람들을 초청했다.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저마다 핑계를 대며 오지 않았다. 그러자 임금은 종들에게 “네거리 길에 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명했다. 종들이 길로 나가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마침내 혼인 잔치에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자원봉사자가 준비한 라면을 맛볼 수 있었던 사람은 그의 초청에 응한 사람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임금이 베푼 혼인 잔치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도 임금의 초청에 응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천국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에게나 천국의 초청을 베푸신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9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인 잔치 비유를 마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4)

건방진 거지

차들이 신호를 기다리는 교차로에서 한 거지가 구걸하고 있었다. 그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혹시 자신에게 돈을 줄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거리거나 애원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를 불러 돈을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성경은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고 말씀한다. 심판은 죄에 대한 마땅한 결과이지만, 긍휼은 죄를 따져 묻기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그 거지가 긍휼을 입은 이유는 그의 태도나 자격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도움을 구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그의 죄만 보셨다면 그는 은혜를 입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은 그 여인의 마음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여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고, 그곳에서 정죄가 아니라 긍휼을 입었다.

귀신 들린 딸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가나안 여인도 그렇다. 성경은 그녀의 자격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예수님께 나아와 긍휼을 구했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을 알았기에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후하심이니이다.” (시 86:4-5)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는 근거는 우리의 자격이나 행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의 인자하심과 은혜를 입는다.

사망의 법과 생명의 법

행위가 아닌 법

사람이 아무리 잘못된 행동을 했을지라도 그것을 정죄하는 법이 없다면 그 사람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반면에 자신이 보기에 아무리 옳아 보이는 행동을 했을지라도 그를 정죄하는 법 앞에서는 죄인이 된다. 결국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은 행위에 있지 않고 법에 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리오 왕의 총애를 받아 높은 지위를 얻었지만, 다른 이들의 질투를 받았다. 그를 질투하는 사람들이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은 왕에게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 법을 만들자고 했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고, 다니엘은 그것을 알면서도 자기 집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로 인해 그는 무리들에 의해 발견되어 사자굴에 던져질 운명이 되었다.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었지만 그를 정죄하는 법 앞에서 죄인이 된 것처럼 사람의 행위가 아닌 법이 사람을 죄인되게 한다. 미국 라스베가스에서는 도박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은 그곳에는 도박을 금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같이 도박을 해도 도박을 금하는 법이 있는 곳에서는 죄를 짓게 되어 벌을 받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롬 7:8)고 말씀한다. 법이 없는 곳에는 죄도 없다.


왕의 두 조서

모든 법이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법은 사람을 정죄하지만, 또 다른 법은 오히려 정죄 받은 사람을 죄에서 벗어나게 한다.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은 127도를 다스리는 왕이었고, 그의 아내는 에스더였다. 아하수에로 왕은 그의 신하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고 그에게 꿇어 절하게 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하만에게 절을 하는데 모르드개는 유다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도 하지 않았다. 그런 모르드개를 보고 하만은 매우 노했고,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온 나라에 있는 모르드개의 민족인 유다인을 다 멸하고자 했다.

하만은 왕에게 나아가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않고 자기들의 법률을 고집하는 유다인을 진멸할 것을 요청했고,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하만은 12월 13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을 담은 조서를 역졸에게 부쳐 온 나라에 알리게 했다. 그러자 왕의 이름으로 된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는 곳마다 유다인은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었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했다.

왕비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사촌 동생으로서 유다인이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왕에게 나아가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고 말했다. 에스더는 왕의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규례를 어기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왕에게 나아갔다. 왕은 에스더를 보고 너무 사랑스러워 금규를 내어 밀어 그를 맞이 했고, 그의 소원과 요구를 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에스더는 왕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자기와 자기 민족의 생명을 구했고, 왕은 그 모든 일을 계획한 자가 하만인 것을 알고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다.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에게 유다인을 살리는 조서를 자기 이름으로 쓰게 했다. 그 조서에는 12월 13일 하루 동안 각 고을에 있는 유다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도록 했다. 역졸이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고 왕의 조서를 온 나라에 반포하자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았다.

유다인들은 자기들을 진멸하라는 왕의 첫번 째 조서로 인해 사망 아래 놓이게 되었다. 만일 유다인을 살리라는 왕의 두번 째 조서가 없었다면 그들이 죽음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을 살게하는 두번 째 조서로 인해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들을 사망 가운데 가둔 것도 왕의 법이었고, 그들로 생명을 얻게한 것 역시 왕의 법이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법

사람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하라, 하지마라’는 계명들은 하나님의 법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법이라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성경은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갈 4:21-24)고 말씀한다. 이 말씀에서 창세기 말씀 자체가 율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도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으로 구분하셨다. 여기서 모세의 율법은 모세가 기록한, 흔히들 말하는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말한다. 이 모세 오경이 율법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 10:15-17)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 또한 법이라고 말씀한다.

사도 바울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0,21)라고 말했는데 그는 자신이 깨달은 사실조차도 법이라고 말했다. 이로 미루어 볼때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

성경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1-4)고 말씀한다.

여기서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말한다. 이 율법은 사람이 계명을 어기면 그 대가로 사망을 요구한다. 만일 우리에게 이 율법만 있다면 모든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해 죽어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다.

전쟁 중에 탈영을 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을 가진 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그 나라에 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이 치열해 지자 자기 목숨을 위해 탈영한 병사들이 많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들은 사형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기에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던 중 나라에서 탈영병들을 사면해 주는 법을 제정하자 그들은 마침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다.

만일 탈영병을 사면해 주는 법이 제정되지 않았다면 탈영병들은 잡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살려주는 새로운 법이 생기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을 어긴 사람이 받아야 할 사망을 십자가에서 대신 치루심으로 죄인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이 사실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며, 이 복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심으로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러자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로 우리를 정죄하던 계명의 율법을 폐하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다. 이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3-18)

예수님이 ‘죄와 사망의 법’을 폐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법이 없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예수님 안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고 약속하셨다.


법에 의해 거룩해 지고, 그 거룩이 지켜진다

율법에는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레 27:32,33)는 법이 있다. 어떤 소나 양이 여호와께 받쳐질 성물이 된 것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히 열번 째로 목자의 지팡이 아래를 지나갔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을 거룩하게 만든 것은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열번 째로 통과하는 것마다 성물이 된다는 법이었다.

율법에는 양면성이 있다. 율법은 계명을 어긴 자를 정죄도 하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다. 법이 열번 째로 목자의 지팡이 아래를 통과하는 짐승을 거룩하다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복음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율법은 거룩하게 된 짐승이 좋은지 나쁜지 살펴보지 말고 그것을 다른 짐승으로 바꾸지 말라고 말한다. 만일 그것을 바꾸면 그것과 그것을 바꾼 것이 다 거룩하다고 말한다. 결국 한 번 거룩하게 된 짐승의 거룩은 깨어지지 않고 법으로 지켜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룩하게 된 우리의 거룩은 동일한 복음으로 지켜지기에 우리의 거룩은 깨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첫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신 예수님

하나님은 베드로를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러 보내시기 전에 그가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여 주셨다. 베드로는 환상 중에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담겨 있는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 부터 내리어 자기 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행 11:7)는 소리가 있었고, 베드로는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행 11:8)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시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소리가 있었다.

율법에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나온다. 그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고기는 가증하기때문에 먹지 말라고 율법은 말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부정한 짐승을 먹지 않았는데 환상 중에 하나님이 부정한 짐승을 깨끗케 하셨다는 소리를 들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고기가 부정하게 된 것은 율법이 그것을 부정하다고 말하기 때문인데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심으로 그것들이 깨끗하게 되었다. 우리 또한 율법으로는 부정한 자이지만 예수님으로 구속으로 인해 깨끗하게 되었다.

성경은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9,10)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첫째 것 즉,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을 폐하시고, 둘째 것인 생명의 성령의 법을 세우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그 뜻을 따라 우리 죄를 위해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율법을 폐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은혜의 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을 세우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율법에서 해방되어 은혜 아래 있다.


어두움은 빛이 와야 쫒겨난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고 성경은 말씀하지만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율법에 갇혀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한 일본 장교가 필리핀의 한 섬에서 그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일본이 항복을 하면서 전쟁이 끝이 났고, 산 속에 남아 있는 일본군 패잔병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미군과 필리핀군 뿐만 아니라 가족과 그들을 아는 사람들이 전단지를 뿌렸다. 그러나 그 장교는 전단지를 보면서도 미군과 필리핀의 기만전술이라고 생각하여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근 30년 동안 도망다니며 전쟁이 끝났다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고 일본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자신만의 전쟁을 치루었다. 그러다가 한 일본 대학생이 그를 만나 일본이 패전한 현실을 인정하게 했고, 정부도 그를 돕기 위해 그에게 임무를 준 직속 상관 중 한 사람을 수소문해 그에게 보냈다. 그제서야 그가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 들였고, 마침내 그의 마음에서 전쟁이 끝났다.

일본군 장교가 전쟁이 끝났다는 전단지를 보면서도 그것을 믿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믿음으로 그의 마음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고 율법을 폐하셨다는 복음을 듣고서도 그 복음을 믿지 않는다면 여전히 율법 아래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마귀가 넣어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방해하는 많은 생각들로 더렵혀져 있다.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행 15:1)고 안디옥에 있는 형제들을 가르쳤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결국 형제들은 이 문제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냈다. 예루살렘에서도 사도와 장로들 사이에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행 15:7-11)

여기서 베드로는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라는 말을 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스러운 생각들로 더렵혀져 있는데 복음을 믿으면 그 마음의 악한 생각들이 제거되어 깨끗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일본군 장교가 일본이 패전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 그의 마음에 있던 자기가 본 전단지가 미군과 필리핀군의 기만전술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 어두움은 빛이 와야 쫒겨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면 자기의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장학금을 받았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노력의 대가다. 그러나 학교에서 모든 학생에게 컴퓨터를 무료로 나누어 준다면 그것은 학생들에게 선물이 된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많은 국가에서는 자기 국민들에게 무료로 지원금을 주었다. 그 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받을 수 있었기에 그것은 정부가 국민에게 베푼 은혜이며 선물이다. 이처럼 선물이 선물답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도 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롬 4:4)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은 것은 당연히 받아야 할 대가이지 은혜나 선물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만일 예수님이 착하고 겸손한 사람이나 교회를 다니는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떠나 마귀의 종이 되어 악을 행하고 있을 때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성경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고 말씀한다.

또한 성경은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롬 4:16)라고 말씀한다. 선물은 받기만 하면 자기 것이 되는 것처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된다.  


죽음 직전에 구원받은 십자가 강도

성경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가던 한편 강도가 그랬다. 그는 자기 행위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사형받을 정도의 악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 욕을 했던 사람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38:44)

예수님 양편에 있는 두 강도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당시 예수님을 욕했다. 그런데 한편 강도는 여전히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한편 강도는 변화되어 예수님을 믿고 낙원을 약속받았다. 그의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39-43)

한편 강도는 사형당할 죄를 짓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다른 편 강도는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욕하던 그가 짧은 시간 안에 스스로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항상 옳았기에 죄 없는 분인 것을 알았고,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자기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두 손과 두 발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기 때문에 어떤 선한 행위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한 것은 오직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듣고 믿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구원은 순간적

십자가 강도가 구원을 받는 데 걸린 시간은 채 6시간이 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노력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고넬료와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면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천사가 환상 중에 고넬료에게 나타나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오라고 했고,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하여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들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39-44)

고넬료와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베드로의 말을 들었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 성경은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라고 말씀하는데 그들이 예수님이 자기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성령은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 이처럼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구원은 순간적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마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마귀가 선악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에게 자기의 벗은 것을 보게 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했던것처럼, 지금도 동일하게 마귀는 우리를 속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죄악된 자신을 보게 하여 선악의 법으로 정죄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고 말씀한다. 추운 겨울에 꽁꽁 언 얼음에 따스한 햇살이 비치면 얼음은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마음속에 비치면 죄로 인한 형벌의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0:12)는 말씀처럼 사랑은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다. 그래서사람은 사랑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이십에 판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보응을 두려워했다. 흉년이 들어 그들이 애굽에 곡식을 사러 왔을 때 정탐으로 몰리자, 그들은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 42:21)라고 말했고, 제일 맏형인 르우벤 역시도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창 42:22)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이 요셉에게 범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가나안에 있는 그의 가족을 애굽으로 데려와 자기가 누리는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행한 악으로 인해 자기가 그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에게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 일을 위해 요셉은 형들을 자기를 판 죄 위에 죄를 더하게 함으로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죄인으로 몰아갔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곡식을 사러 왔을 때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을 정탐으로 몰아갔다.  그러고는 시므온을 감옥에 가두고, 그들이 말한 말째 아우를 데려와 그들이 정탐이 아님을 증명하라고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형들의 자루에 곡식을 사기 위해 가지고 온 돈을 도로 넣어 도둑으로 만들었다.  

형들은 도둑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 자루에 있던 돈을 도로 가지고 막내 동생 베냐민과 함께 곡식을 사러 애굽에 두 번째 왔다. 그때 요셉은 그들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하루를 묵게 하고는 고향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의 자루에 곡식을 사러 가지고 온 돈을 도로 넣었을 뿐만 아니라 베냐민의 자루에 자기의 은잔까지 넣었다. 그러고는 청지기를 시켜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뒤쫓아가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을 찾아내게 하여 형제들을 선을 악으로 갚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되게 했다.  

마침내 형제들의 마음에 사망이 왔고, 그들이 죽은 사람처럼 되어 요셉 앞에 돌아와 다시 섰을 때 그제야 요셉은 그들에게 자기를 밝히면서 형제들을 기뻐하여 입 맞추고 안고 울었다. 형들은 요셉을 판 죄 위에 곡식 산 돈을 도둑질한 것과 자기들에게 베푼 은혜를 악으로 갚은 모든 죄를 알면서도 요셉이 자기들을 진정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기쁨의 눈물 속에서 보았다. 그러면서 형들은 자기들의 모든 죄가 요셉의 사랑으로 덮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는 말씀처럼 요셉의 형들에게는 요셉을 판 죄 위에 죄가 더해질 수록 자기들을 향한 요셉의 사랑이 더욱 크게 보였고, 그 사랑 안에서 요셉을 판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보이셨느니라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도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이셔야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해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성경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라고 말씀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 죄를 위함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을 준비하신 것을 보면 인간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결혼한 여인이 아직 임신도 하기 전에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사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종이 되므로 인해 하나님을 슬프게 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떠나 죄악된 삶을 사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보이셔서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서로 화목하게 되어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셨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성경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라고 말씀한다. 동과 서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에 영원히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죄를 영원히 만나지 못하도록 완전하게 제거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데 우리 죄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못하게 하셨다.   


쳐다본즉 살더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주심으로 그것을 증명하셨고, 우리에게 그 사랑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나를 바라봄으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라고 말씀한다.

애굽에서 나와 오랜 세월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빠른 길을 두고 에돔 땅을 둘러 가게 되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뱀들이 떠나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고,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고,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보면 모두 살았다.

장대에 달린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자기 죄가 십자가에서 이미 용서됐음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불뱀에 물린 자가 고개를 들어 놋뱀을 바라보는 것만큼 쉽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바라보는 데서 돌이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된다. 불뱀에 물려 자기의 어떤 노력과 방법으로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던 사람이 놋뱀을 바라보면 생명을 얻었던 것처럼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영생을 얻게 된다.  


차별이 없느니라

마귀는 사람이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죄악된 자기만 보게 한다. 그래서 마귀에게 속은 사람은 죄악된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은 자기 같은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으며 절대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고 말씀한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나 남에게 판단을 받는 사람이나 누가 더 나은 것 없이 동일하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장차 있을 환난의 날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잡히시는 날 자기 목숨을 위해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것같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면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기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은 동일하기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된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기에 차별이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믿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인은 행위가 의로운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이며, 죄인은 행위가 악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여리고 성에서 기생으로 살았던 라합도, 여섯 번째 남자와 삶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사마리아 여인도, 로마 사람을 위해 자기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임으로 죄인 취급당했던 삭개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고 말씀하는데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된다.

헐벗음과 부끄러움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지으셨는데 그는 헐벗은 상태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 하나님에게는 아담의 벗은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아담 역시 자신의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마치 동물의 벗은 몸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보이고, 동물 또한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에는,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다.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 뒤에는 뱀으로 묘사되는 마귀의 역사가 있었다.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는 말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하와는 뱀에게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2-3)고 대답했다. 그러자 뱀은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고 말했다.

뱀에게 미혹된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어 아담도 먹게 되었다. 그러자 뱀의 말처럼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몸을 가렸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되자 자기들의 벗은 것을 부끄럽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말씀하셨을 때 아담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그 말을 들으신 하나님은 아담에게 반문하셨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기에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기쁨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아담은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는 신세가 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아담이 알게 된 선악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벗은 것이 과연 부끄러운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할 만큼 악한 것일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이 벗은 것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벗은 몸이라도 목욕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모두가 옷을 입고 있는 거리에서 혼자 벗고 있다면 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만일 벗은 것이 그 자체로 부끄럽고 악한 것이라면 우리는 혼자 목욕할 때조차 항상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중목욕탕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되었을 당시 세상에는 그들 두 사람밖에 없었기에 자신들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몸을 가리고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는 것은 선악 간의 판단 때문이 아니라 마귀의 역사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예수님은 마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거짓의 아비인 마귀는 자신의 지혜로 아담이 알게 된 선악의 기준을 이용해, ‘벗은 것이 부끄럽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만큼 악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마귀는 이렇게 함으로써 아담이 하나님을 두려워해 떠나게 함으로, 그를 영적으로 죽게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를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귀는 오늘날에도 동일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어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속죄 제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에서 양이나 염소가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여 죽음으로 그들을 정결하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죄의 값인 사망을 치르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하지만 거짓의 아비인 마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분명히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에게 용서받을 죄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속이고 있다. 마귀에게 속아 아직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수많은 기적과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직접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귀에게 미혹되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했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거룩한 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우리를 속여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죄를 짓는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여 여전히 죄에 매여 있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선악의 기준을 이용해 우리를 정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한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님을 마귀가 시험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물리치셨던 것처럼, 마귀가 우리를 정죄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