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아담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분을 떠났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고백한 그의 말을 보면, 그의 내면에 분명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불신으로 가득하던 그의 마음이 감사로 바뀐 것이다. 그 변화의 배경에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땅을 일구며 하나님 없이는 자신 역시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 경험이 있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에게 환난의 떡을 먹게 하셨던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땅을 힘겹게 갈게 하신 것도 그에게 고통을 주시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근본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얻게 하시려는 특별한 은혜였다.

하나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복으로 갚으시는 선하신 분이다.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악함에 매이지 않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가게 된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하였다. 그런데 태중에서 두 아들이 서로 다투자, 리브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여호와께 묻는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뉘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리브가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민족을 상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인과 아벨 역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대표한다. 성경은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요일 3:12)라고 말하는데,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가인은 하나님을 떠난 악한 자들의 무리를 대표한다. 반면 아벨은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사는 자들을 대표한다.

가인과 아벨은 동일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함께 자랐지만, 그들이 선택한 길은 달랐고 그들의 결말 또한 달랐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겉으로는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인의 길’을 걷고 있든지, 아니면 ‘아벨의 길’을 걷고 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37-42)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여기서 가인과 그의 제물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은 것을 상징하며, 아벨과 그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예표이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신 것은, 흙으로 된 우리 육체의 행위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마귀의 종이 된 인간에게서는 스스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가인은 자기의 노력과 열심으로 얻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반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아벨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은 그와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 성경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히 11:4).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은 영과 육을 분명하게 구별하신다. 하나님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만을 받으신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에 우리가 죄를 이기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안에 거하는 죄는 언제나 우리보다 강하여 우리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이겨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성경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이길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죄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죄에 끌려다니며 악을 행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 1:28-31)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이 분하여 한 것을 보면 그의 안에는 그 분노를 다스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을 보면, 그는 분명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가인은 그 말씀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죄를 이기려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했다. 만일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을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의지했고, 결국 의로운 동생을 죽이는 죄에 이르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죽음을 허락하신 것은, 가인이 끝까지 죄를 이길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죄 없으신 당신의 독생자마저 악한 자들의 손에 넘겨 죽게 하심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근본적인 악함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사람은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임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참된 화목에 이를 수 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사람은 악을 행할 때 보는 이가 없으면, 자신이 지은 죄를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주목하여 보시며, 책들에 다 기록해 두신다.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이 심판받는 광경을 미리 보았던 요한은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라고 증언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계 6:9–10).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의 피에 대한 공의를 호소하는 것처럼 자기 죄를 숨기려 했던 가인에게 하나님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감찰하고 계시며,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계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마음속 죄만 가려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의 책들에 기록된 우리의 모든 죄까지도 완전히 가려 주셨기 때문이다. 이 은혜를 경험한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로마서 4: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농부가 땅에 씨를 뿌렸음에도 싹이 돋지 않는다면, 땅을 경작하고 씨를 뿌리며 물을 준 농부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농부에게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아무리 기도하고 애써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그것만큼 절망적이고 저주처럼 느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분명 저주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씀은 가인에게 베푸신 은혜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가인이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닫고,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사람이 죄를 짓고 두려워하는 것은 대개 죄 그 자체보다도, 그 죄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올 형벌이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자신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악한가를 슬퍼하기보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겁다”고 고백하였다. 이는 죄의 본질보다 죄의 결과를 더 두려워하는,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범죄한 아담에게 장차 오실 구원자, 곧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셨다. 만일 가인이 모든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르실 그리스도를 믿었더라면, 그는 자기 죄로 인한 형벌의 무게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그 말씀을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자신의 구원자로 믿지 않았다. 만일 그가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판 죄로 인해 스스로 목매어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인과 가룟 유다는 공통적으로 자신이 지은 죄의 값을 스스로 책임지려 했고, 그 결과 멸망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죄값을 우리가 아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치르셨음을 분명히 증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자기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의인이다. 구원의 갈림길은 죄의 크기에 있지 않고, 그 죄를 누가 담당하느냐에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가인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었다. 그는 동생 아벨을 죽인 죄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과 분리되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근본적인 죄에 대해서는 깊이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인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던 그에게 표를 주셔서, 그를 만나는 누구에게서도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선인에게만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 아니다. 악인과 불의한 자에게도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고 회개하여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닫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라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보는 제자들의 눈이 복된 것처럼, 원수에게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보고 바라볼 수 있는 눈 또한 참으로 복되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을 높이려 한다. 가인은 성을 쌓고, 그 성의 이름을 자신의 아들 이름인 에녹이라 하였고, 홍수 이후 타락한 사람들은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건설하여 탑 꼭대기에 자기 이름을 새기려 했다.

반면,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높인다. 야곱은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 하란으로 가던 중 한 곳에 이르러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셨다. 깨어난 야곱은 그곳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하였다. 모세도 아말렉과 싸워 승리한 후 재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라 하였다.

육신적인 사람의 눈에는 자기가 크게 보이지만, 영적인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크게 보인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눈은 하나님을 향해 가려져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볼 눈이 없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라는 말씀처럼 그들의 생각과 판단,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들은 오직 자기 필요를 위해 일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 온 마음을 쏟는다.

사람에게는 영육간에 필요한 것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을 시인하며 감사한다. 그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

소경은 스스로 눈을 뜰 수 없다. 그러므로 소경은 소경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눈을 뜨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보는 자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성경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고 말씀한다. 성령은 우리를 이 말씀이 삶 속에서 실제로 성취되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므로 참된 선을 행할 수 없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라멕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는 자기의 상처로 사람을 죽였고, 자기의 상함으로 소년을 죽였다.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스스로를 위하여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칠십칠 배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얼마나 쉽게 폭력과 교만의 자리로 올라가는지를 드러낸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이처럼 판이하게 다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증언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19-24)

성령의 인도는 단순한 감정이나 도덕적 결심이 아니라,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 능력 안에서만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되돌려주지 않으며, 도리어 복을 빌 수 있다. 이것이 성령 안에 있는 자의 삶이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는 길이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주었다. 셋은 자신의 아들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는데, 에노스는 “연약한 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가인의 후손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가인의 계보처럼 자기 힘과 능력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와 세상의 힘에 따라 행하다가 결국 멸망을 당하였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도 지혜로우므로 재앙을 내릴 것이다”(사 31:1–2)

반면, 아벨이나 에노스처럼 자신의 허무함과 연약함을 아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시고 친히 돕는 자가 되어 모든 환난에서 건지며, 그들을 보호하는 산성이 되어 주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제5장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아담의 계보는 가인의 계보와 분명히 구별된다. 가인의 계보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족보라면, 아담의 계보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들의 족보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범죄하게 한 배후의 존재로 뱀을 지명하여 저주하셨다. 그리고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는 타락 직후에 주어진 구속의 약속이며, 사탄의 권세가 결국 한 인물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계보를 이어 가신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아담의 계보를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심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며, 마귀를 멸하고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견고히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족보는 단순한 혈통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보존되고 성취되어 가는지를 증언하는 신앙의 기록이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말씀하셨다.

이 복은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도 철회되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지속되어 인류는 실제로 땅에 충만하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이 인간의 상태나 행위에 의해 좌우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히 6:14)고 약속하실 때,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신실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성품에 근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는 한,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개될 수 없다.

성경은 또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고 증언한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며, 그분에게서 나온 약속 역시 변하지 않는다.

아담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족보를 살펴보면, 그 안에는 악을 행한 사람들과 실패한 인물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람들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당신이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보장은 우리의 행위나 결단이 아니라,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하나님은 아담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한 분이시기에, 범죄하기 전의 아담 또한 죄가 없는 거룩한 존재였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죄가 그의 안에 들어왔고, 그 결과 그는 부패한 본성을 지니게 되었다.

성경이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한 것은, 죄와 부패한 본성이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 아래 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범죄하기 전의 아담이 거룩했던 것처럼 우리를 다시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 안에서 참된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거룩함을 위한 것이며, 성경은 이에 대하여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고 증언한다.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이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처럼,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 또한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하나님은 아벨이 죽은 후에 아담에게 셋을 허락하셨다. ‘셋’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이 다른 씨를 세워 주셨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의 계보를 이어 갈 자가 필요하였고, 그 일을 위해 셋을 세우셨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친히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모세를 세우셔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아브라함의 자손을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게 하셨다. 약속은 하나님이 하시고, 그 성취 또한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의 유산을 값없이 기업으로 받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약속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며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품은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 가운데 산다.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아담의 족보에는 “낳고, 죽었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는 범죄한 인간의 결국이 사망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낳았다”는 표현만 있을 뿐, “죽었다”는 말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 안에는 사망이 역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사역을 보아도,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은 있으나 살아 있는 자를 죽이신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8:44)인 마귀와 분명히 대조되는 분이시다.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3)라고 노래했는데,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생명이 되실 뿐 아니라, 죽어 있던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하나님은 사람의 이름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에노스는 게난을 낳고, 게난은 마할랄렐을 낳았는데, 에노스라는 이름은 ‘연약한 인간’, 게난은 ‘얻다, 소유하다’, 마할랄렐은 ‘하나님을 찬양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연약한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것을 받아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라는 말씀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찬송이 되게 하시기 위해,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지으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정죄의 이유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연약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감사의 조건임을 안다.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하나님을 찬양하다’라는 뜻을 가진 마할랄렐은 ‘내려오다’라는 뜻을 가진 야렛을 낳았다.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내려옴을 보여준다. 성경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고 말씀한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사 57:20)는 말씀처럼, 악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도 의를 배우지 않으며 언제나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하는 말을 한다. 그 결과 악인은 자기 악에 걸리며 죄의 줄에 매여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사울은 창을 들었으나 다윗은 수금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창을 든 사울에게는 악령이 임했지만, 수금을 든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5,6)라고 노래하였다.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사도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오직 자기 배를 위하여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

에녹이라는 이름에는 “헌신된 자, 봉헌된 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 헌신된 삶으로 이끄신다. 이것은 인간의 결단이나 의지의 결과라기보다, 하나님께 속한 생명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열매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베드로는 자기를 위하여 고기를 잡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인도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욕망을 따라 살던 사람을 부르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신다. 성경에는 이러한 변화의 증인들이 참으로 많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헌신된 삶으로 인도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친히 채우신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던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성경은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장차 행하실 일을 선지자들에게 미리 보이시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사람들이 다가올 일을 준비하게 하시며,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 하나님을 참으로 믿게 하시기 위함이다.

므두셀라의 이름에는 “그가 죽으면 그것이 임한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므두셀라를 통해 그가 죽는 날 세상에 심판이 임할 것을 미리 알리셨다. 실제로 므두셀라가 죽은 후,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큰 홍수가 일어나 노아의 가족 여덟 명 외에는 모든 사람이 물로 멸망당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는데, 이는 성경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 가장 긴 수명이다. 그의 긴 생애는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인간들을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고 인내하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의 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인내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으며, 정하신 때가 이르면 심판은 반드시 임한다.

성경은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하나님은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해 수없이 말씀하셨다. 미련한 자는 그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과 생각을 따라 살아가지만,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움으로 자신을 살피며,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시는 유일한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성경에는 장차 이루어질 일들이 그림자와 예표로 기록된 내용이 많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입히신 가죽옷,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 그리고 기생 라합이 창문에 매어 두었던 붉은 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이다.

아담의 계보를 보면 모든 인물에 대해 “자녀를 낳고 죽었다”는 기록으로 마무리되지만, 오직 에녹에게만은 죽었다는 표현이 없다. 그는 자녀들을 낳은 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이는 장차 있을 놀라운 사건을 미리 보여 주는 하나의 표적이다.

성경은 에녹과 같이 사람이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장면을 이렇게 증언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홀연히 변화된 몸으로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질수록 그 날이 가까움을 아는 사람은, 혼인을 앞둔 처녀가 자신을 정결하게 하듯, 이 세상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거룩함 가운데 거한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라멕이라는 이름에는 ‘강한 자, 힘센 자’라는 의미가 있는가 하면, ‘낮아짐’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 속한 라멕은 교만한 ‘강한 자’로, 셋의 계보에 나오는 라멕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는 ‘낮아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특히 므두셀라가 죽은 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심판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한다. 성경은 이러한 자들을 두고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므두셀라가 죽은 후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앞으로는 불로써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강퍅한 마음으로 멸망을 향해 나아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 회개하며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한다.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하나님은 라멕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낮추고 겸비하는 자를 위하여, ‘위로’와 ‘안식’이라는 이름의 뜻을 지닌 노아를 허락하신다. 이 사실을 아는 다윗은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라고 노래하였다.

또한 성경은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분 안에서 모든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하신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악함과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기에, 룻이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랐던 것처럼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떠나지 않고 따른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당신의 보호하심 아래 두시고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하나님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노아에게 자식들을 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 이후가 아니라, 심판 이전에 노아에게 아들들을 주셨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마귀를 멸하실 구원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심판이 임하기 전에 노아에게 세 아들과 그 며느리들을 주셨고, 약속을 가진 그 가족이 심판을 통과하게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장차 있을 심판을 앞두고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그 뒤에 생긴 율법이 그 복음을 폐하지 못했던 것처럼, 심판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을 이기고 넘어가신 분이다.

이것이 우리가 심판을 피하기 위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노아에게 자식들을 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 이후가 아니라, 심판 이전에 노아에게 아들들을 주셨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질서를 보여 준다.

큰 재난이 오기 전에 먼저 경보가 울리고 대피소가 준비되듯이, 하나님은 심판이 임한 뒤에 구원의 길을 마련하신 것이 아니라, 심판이 오기 전에 이미 살 길을 예비하셨다. 노아의 방주는 홍수 후에 주어진 대책이 아니라, 홍수 전에 준비된 은혜의 통로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마귀를 멸하실 구원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심판이 임하기 전에 노아에게 세 아들과 그 며느리들을 주셨고, 약속을 가진 그 가족이 심판을 통과하게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장차 있을 심판을 앞두고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그 뒤에 생긴 율법이 그 복음을 폐하지 못했던 것처럼, 심판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을 이기고 넘어가신 분이시다.

이것이 우리가 심판을 피하기 위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심판은 구원의 문을 닫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가 누구의 것인지를 드러내는 시간이다.

제6장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성경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쫓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육신의 정욕을 일으켜 그것을 따라 행하도록 유혹한다. 실제로 사람의 수가 땅 위에서 번성하기 시작할 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대로 아내를 삼았던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약 4:17)라는 말씀처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말했는데 그는 자신의 계획과 욕망을 날마다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단순히 인간의 몸을 가리키기보다는, 죄로 인해 부패한 인간의 내적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기에, 그러한 타락한 인간과는 함께하실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말씀하셨다.

“거기 죄인 전혀 없으니 거룩한 자 뿐이라 주님 주신 면류관 쓰고 거룩한 길 다니리”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천국은 오직 거룩한 자만이 거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다.

성경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바로 우리의 죄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장벽을 제거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담을 허무셨는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3,14)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 형제였지만, 그들이 추구한 바는 전혀 달랐다. 에서는 들사람이었고 능숙한 사냥꾼이었는데, 이는 힘과 생존 능력을 갖춘 세상의 강한 자, 곧 네피림과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당장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눈앞의 아름다움을 좇다가 영적 정체성을 버린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반면 야곱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여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자 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잇는 통로로서 장자의 명분을 귀히 여겼고, 그것을 얻기를 간절히 원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하시도록 환도뼈가 어긋날 때까지 하나님과 씨름하며 매달렸다.

영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축복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적인 권력과 부와 명예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육신적인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한 분만을 얻기를 사모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1,12)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직전,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전혀 없었고, 그들의 내면은 악으로 충만하여 그 악을 따라 살아갔다. “그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단순히 죄가 많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선을 넘어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말세에도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 나타난다고 성경은 경고한다. 그들은 영적인 문둥병자와 같아서 죄를 지어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반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범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에베소서 4장 19절은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말씀하는데 노아 홍수 직전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했다.

고장 난 물건은 고칠 수 있으면 고쳐 쓰지만, 전혀 수리할 수 없으면 버릴 수밖에 없다. 그 당시 사람들의 악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서 너무도 멀리 벗어나 있었다.

사람이 죄를 감각하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죄를 지어도 아프지 않고, 두려움이 없으며, 돌이킬 마음조차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저주이다. 반대로, 죄를 짓고 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은 양심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이 여전히 열려 있다는 신호이다. 그런 사람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회개에 이를 수 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보시고 한탄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단순히 자신의 일방적인 뜻에 따라 인도하셨다면, 인간의 선택 때문에 한탄하시거나 심판하실 근거가 전혀 없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한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억지로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강제로 인도하셨다면, 인간의 행위에 근거해 근심하거나 한탄하실 이유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한탄하셨다는 사실은 인간의 행위가 실제로 악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서 자유의지는 행사한다는 것은 어떤 유익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올바른 길을 선택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셔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으로 소경인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보여 주신 사랑을 통해 인간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이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는 믿지 않는 죄로 인해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물로 멸망한 것도 같은 원리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마귀의 유혹에 따라 육신의 욕심을 좇으며 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마귀는 사람보다 지혜롭고 강하기 때문에, 마귀에게 사로잡힌 인간은 스스로 그 유혹을 이길 수 없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항상 악을 행했던 것도 그들 안에 마귀를 이길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흐름에 끌려다니며 죄 가운데 살 수밖에 없었다.

능력 없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은혜이다. 노아가 육신을 좇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특별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본질적으로 더 나은 존재인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연약하고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를 입게 된다. 성경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세상의 힘에 무력한 자로 남지 않는다.

노아 역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기에 얼마든지 악을 행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라는 말씀처럼, 노아는 믿음으로 얻은 능력으로 세상을 이겼던 것이다.

또한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5)라고 말씀한다. 결국 세상을 이기는 힘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와 능력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완전한 자는 없다.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성경은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1,2)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노아 역시 홍수가 끝난 후 방주에서 나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것을 보면 그가 행위로는 완전한 자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노아를 의인이라고 말씀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는 말씀처럼 노아 역시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구약 성경에는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아브라함에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고, 그가 그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던 것처럼 노아 역시 의롭게 된 것을 보면 그에게도 복음이 전해졌고, 그가 복음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인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거룩하게 하신 사실을 믿는 사람을 말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영원히 온전(완전)”하게 하셨다.(히 10:14)

성경은 노아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말씀하면서 노아가 하나님을 믿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씀을 통해 그가 세상에 속하여 타락한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거스려 하나님께 순종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는 항상 세상을 쫓아감으로 멸망을 당할 사람들과 분명히 구별되었다.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방주에 들어가기 전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세한 기록이 없다. 더구나 그들의 아내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방주 안에 들어가 물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노아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상에는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이름도 삶도 알지 못하는 많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말할 수 없는 큰 복을 받은 것은 예수님께 속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과 마귀에게 속한 사람, 두 부류밖에 없다. 사람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은 그들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성경은 “악한 일에 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라고 말씀한다. 악한 자들은 죄를 지어도 당장 심판이 임하지 않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하나님께서 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은 교만하여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것에 끝이 있듯이, 악을 행하는 일도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에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실 뿐이다. 그러나 죄가 더 이상 회개할 수 없을 만큼 가득 차게 되면, 마침내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그러했고, 가나안 족속들의 멸망도 그러했다.

날이 이르러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그 두려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악을 행한 자들이 지옥의 판결을 받을 때, 그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겠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경은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 4:18)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한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나무로 만든 방주에 역청을 바르면 물이 스며들 수 없다. 역청은 방주를 덮어 홍수의 물이 그 안으로 침범하지 못하게 한다. 심판의 물결이 쏟아져도 방주 안에 있는 생명은 안전하다. 이 역청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표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이 그 집을 넘어가게 하였다. 또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실 때 기생 라합의 집 창에 달린 붉은 줄은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멸망 가운데서 보존하였다. 어린 양의 피와 붉은 줄은 모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징이며, 그분의 피가 죄의 심판에서 사람들을 보호하심을 보여 준다.

방주에 역청을 안팎으로 바르게 하신 것은 의미가 깊다. 이는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죄뿐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숨은 죄까지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임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구원은 외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내면의 죄까지도 완전히 가리시는 은혜이다.

또한 “그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사 40:2)는 말씀처럼, 죄에 대한 형벌은 충분히 치러졌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고, 더 이상 남은 정죄는 없다.

역청이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지켰던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멸망에서 온전히 지키신다. 우리의 안전은 방주의 나무에 있지 않고, 그 위를 덮은 역청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덮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에 있다.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하나님은 방주의 크기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고, 노아는 그 말씀하신 규모 그대로 방주를 만들었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크기와 다른 배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대로 임의로 만든 것임이 분명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도 성경을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예언하셨다. 메시야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야 하며, 베들레헴에서 나셔야 하고, 많은 사람들의 병과 연약함을 고치셔야 한다. 또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고난을 당하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셔야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그러므로 이 예언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경이 증거하는 참된 메시야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예언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다. 이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속하셨다는 선포인 동시에 자신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을 완성하셨다는 승리의 선언이었다.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을 친히 성취하심으로 능력으로 자신이 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의 예언 성취에 근거한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믿음이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구원의 반석 위에 서는 일이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아무리 훌륭한 방주라 할지라도 들어갈 문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을 보호할 수 없는 무익한 구조물에 불과하다. 그와 같이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들어갈 문이 없다면, 예수님 역시 우리와 상관없는 분이 되고 만다. 그러나 방주에 문이 있었듯이, 방주의 참 형상이신 예수님께도 문이 있다.

속죄 제물인 동시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히 방주가 되실 뿐 아니라, 그 방주로 들어가는 문도 되신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요 10:9)라고 말씀하셨다.

방주의 문이 열려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문도 지금은 열려 있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오신 동물들이 모두 들어간 후 하나님께서 그 문을 닫으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문 역시 영원히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 문을 닫으실 때가 온다. 그때에는 들어가고자 해도 들어갈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방주에 문을 두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심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자비로우신 분이시기에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생명을 얻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도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을 닫지 않으신 이유이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아브라함에게는 여종 하갈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 아들 이스마엘과, 사라에게서 약속을 따라 난 아들 이삭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30)고 말씀한다. 오직 이삭처럼 약속을 따라 난 자만이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 있다.

노아가 당시 세상 사람들과 달리 물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도 그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주의 견고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약속이 그를 살렸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모든 사람을 향해 주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믿는 자에게만 효력이 있다.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약속을 받은 자의 안전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거한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으며, 그 약속을 붙드는 자는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 육체를 따라 난 것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영원한 기업을 얻는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은 결국 하나님 자신이다. 만일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생물을 각기 암수 한 쌍씩 모아 그 생명을 보존해야 했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은 단 한 마리의 동물조차 완전히 다스릴 수 없는 한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동물들을 그 종류대로 노아에게 나아오게 하셨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다.

이 원리는 죄의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 스스로 해결하도록 맡기셨다면, 죄 아래 있는 우리는 결코 영원한 멸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기에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거룩함을 입게 되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의 열매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다.

이 은혜는 부모가 어린아이의 더러움을 씻어 주는 모습과도 같다. 아이는 자신의 더러움을 온전히 알지도 못하고, 스스로 깨끗해질 능력도 없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부모의 손길로 인해 아이는 깨끗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에서 깨끗함을 얻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분명한 증거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지 죄를 씻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를 정결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붙드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친히 채우시는 신실한 아버지이시다.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은 동시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겠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온 모든 동물의 먹을 양식을 스스로 준비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아마 자기 가족을 위한 양식을 준비하는 것조차 벅찼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하셨다면, 그 명령 속에는 이미 이루실 능력과 공급의 약속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준비해 나온 양식은 한 달 남짓에 불과했다. 그 음식이 다했을 때, 광야에서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 12:14)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하늘의 만나를 예비해 두셨다. 그들의 생존은 그들의 준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에 달려 있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완고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며, 그분의 전능하심과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이루어 드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경험하는 삶이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마귀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많은 생각을 심어 놓는다. 노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상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일이었기에, 세상 사람들이 품는 의심과 조롱, 현실적인 계산과 두려움이 그의 마음에도 일어났을 것이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울때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 17:8,9)고 외쳤다. 그의 말처럼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마련이다. 이는 단지 전쟁의 원리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로마서 6장 16절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고 말씀한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게 져서 순종하게 되면 생각의 종이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따르기 쉬운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우리의 생각과 길보다 훨씬 높고 크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기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하게 된다.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옳게 보일지라도, 그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할 수 있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처럼 믿음의 사람은 자기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생각보다 더 신뢰할 때 하나님의 명을 온전히 준행할 수 있게 된다.

제7장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성경은 노아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노아는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주를 준비했다. 그는 자신의 단순한 생각이나 감정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확실한 현실로 받아들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히 11:1)라는 말씀처럼, 믿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이미 받은 것처럼 실제로 여기며, 확신하는 것이다. 노아에게 하나님의 경고는 먼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긴 세월 동안 흔들림 없이 방주를 지을 수 있었다.

마침내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는 생명의 말씀을 주셨는데 이 말씀은 그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었다. 성경은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고 말씀하는데 노아의 믿음이 그와 그의 가족을 구원에 이르게 하였다. 믿음은 결국 순종으로 나타나며, 그 순종은 생명으로 이어진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뿐 아니라 부정한 짐승도 함께 들어갔다. 아무리 정결한 짐승이라 할지라도 방주 밖에 있으면 멸망을 피할 수 없었고, 아무리 부정한 짐승이라도 방주 안에 들어오면 생명을 얻었다. 생명을 좌우한 것은 ‘정결함의 정도’가 아니라 ‘방주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였다. 방주 안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역사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의롭다 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의 부정함이 구원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7–8).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다. 방주 안에 들어간 자가 살았듯이, 사랑의 법이 역사하는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산다. 그 안에서는 우리의 어떤 허물과 연약도 더 이상 정죄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사랑은 심판을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홍수 전의 칠 일은 마치 태풍 전야의 고요함과도 같다. 아무런 경고 없이 찾아온 고요함은 평안으로 느껴지지만, 거대한 폭풍을 앞둔 고요함은 두려움 속에서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십 주야 동안 비를 내려 모든 생명을 쓸어버리실 것을 이미 경고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오히려 더욱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였다.

하나님은 물로 심판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칠 일이라는 유예의 시간을 주셨다. 그 시간은 멸망을 확정짓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돌이킬 기회를 허락하신 자비의 시간이었다.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하나님이 이끄신 동물들은 방주로 들어갔지만, 사람들은 그 귀중한 시간을 놓쳐 버렸다. 수많은 동물들이 짝을 지어 방주로 들어가는 기적 같은 장면을 보았으면서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의 눈이 가려지고 마음이 심판에 합당할 만큼 강퍅해졌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장차 임할 심판에 대해 경고하시며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보이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외면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6-30)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과 시대를 분별할 영적 지각이 없다는 것이다. 피부가 썩어 들어가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문둥병자처럼, 그들은 죄에 무감각하다.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자신을 방탕에 내어 맡기고, 모든 더러운 일을 탐욕으로 행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4-36)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 일차적인 이유는 “홍수를 피하여”였다. 방주 밖은 밝고 아름다우며 상쾌한 공기가 있는 곳이었지만, 방주 안은 많은 동물들의 소리와 냄새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방주 밖이 훨씬 좋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방주 안은 홍수의 심판을 피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이사야 53:2)라고 말씀한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예수님 안에는 육체의 쾌락이나 화려함이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에 충분한 구원이 있다.

방주가 그 안에 있는 생명들을 홍수의 심판에서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듯이, 예수님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참된 방패가 되신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를 가리켜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편 18:2)라고 노래했다.

또한 성경은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편 2:12)라고 말씀한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매가 떠올라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욥 39:26–27)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동물을 우리의 뜻대로 이끌 만한 지혜도 능력도 없다.

노아 역시 파리 한 마리조차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다. 그런 노아에게 동물들이 암수 둘씩 나아와 방주로 들어온 것은 분명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이었다. 노아는 방주 안으로 들어오는 짐승들을 보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살아 계심에 감격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스스로 이룰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당신이 하신 말씀을 친히 이루실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말씀을 이루심으로 당신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을 믿는 자를 위로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10:11)고 말씀한다.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은 세상을 완전히 멸할 만큼 충분한 물을 이미 준비해 두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엄청난 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 또한 사람들이 쉽게 알지 못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하나님은 멸망받을 자들에게는 하늘의 창문을 열어 땅이 잠길 때까지 비를 내리셨다. 그러나 복을 받을 자들에게는 “하늘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엄청난 축복과 저주 사이의 차이는 단 한 걸음에 불과하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축복의 하늘 문이 열리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하늘 창문들이 열린다.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방주 안에는 모든 동물이 암수 둘씩 들어갔다. 방주는 짝을 이루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며, 또한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들만 들어가는 곳이었다.

성경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씀한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자이기에 방주 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는 말씀처럼, 죄로 인해 죽었던 자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을 얻어 살아나게 된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구원받은 성도를 신부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은 우리는 신랑이신 예수님과 짝을 이루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 4:9,10)는 말씀은 홀로된 자의 불행을 잘 보여 준다.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하늘에서 무섭게 쏟아지는 빗방울 하나도, 땅에서 엄청나게 솟아나는 물 한 방울도 하나님이 닫으신 문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방주 안은 참으로 안전하고 고요한 곳이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 안전한 것도 이와 같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한일서 5:18)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친히 그를 지키시기 때문에 마귀가 그를 해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에게는 어떤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잠언 12:21)고 말씀한다.

마귀가 구원받은 사람을 둘째 사망으로 끌고 갈 수 없는 것도 예수님이 그를 지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한 번 얻은 생명은 영원한 것이기에 ‘영생’이라고 한다. 예수님도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라고 말씀하셨다.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방주는 스스로 땅에서 분리될 수 없었다. 그러나 물이 많아지자 물이 방주와 땅을 갈라 놓았고, 방주는 땅에서 떠올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도 스스로 육신의 정욕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육신의 정욕은 너무나 강해서 언제나 사람을 그 욕망을 따라 살게 만든다. 육신과 싸워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8,19).

그러나 물이 많아짐으로 방주가 땅에서 떠올라 자유로워진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쌓여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되면 우리는 육신의 정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육을 이기기 위해 육과 싸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한다.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불어난 물은 낮은 산뿐 아니라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모두 덮어 버렸다. 천하의 그 어떤 것도 물을 이기고 “내가 여기 있노라”라고 말할 수 없었다.

사람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한 마음이 역사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쉽게 무시한다. 그러나 아무리 교만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스스로를 낮출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9)라는 말씀처럼,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더럽고 악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여 교만한 입을 막게 한다.

성경은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복된 사람은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듯 아름다운 향기를 풍긴다.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모든 생물은 물에 의해 쓸어버림을 당하였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어지럽히던 사람들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다.

“거기 죄인 전혀 없으니 거룩한 자뿐이라 주님 주신 면류관 쓰고 거룩한 길 다니리”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천국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씻음 받은 거룩한 자들만 있다. 죄인들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더 이상 그들을 볼 수 없다.

성경은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벧후 3:10-11)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신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2-6).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물이 온 천하를 덮었으므로 물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목적지도 없이 그저 물 위에 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졌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주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그 분주함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귐이 소홀해지기 쉽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분주한 것조차도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방해하기도 한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을 때 그는 준비할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었다. 이를 본 마르다는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라고 말씀하셨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분주하게 살아가던 모세도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로 인도하셔서 40년 동안 양을 치게 하셨다. 모세는 그곳에서 애굽 왕궁에서 자신만만했던 허상의 자기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때로 노아를 아무것도 없는 물 위를 떠다니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모든 것에서 떠나게 하시기도 한다. 그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가 조용히 하나님과 사귀며 하나님을 깊이 배우게 하신다.

제8장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모든 동물들은 오랫동안 방주 안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이 물을 거두어 주시지 않으시면 그들은 스스로 방주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셨고, 그들을 방주 밖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물을 점점 줄이기 시작하셨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듣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라고 크게 외쳤다. 만일 예수님이 그를 돌아보지 않으셨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눈을 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불러 세우셔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눅 18:41)라고 물으셨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눅 18:41)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한 번 돌아보아 주심으로 고통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다.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게 포위되어 극심한 기근으로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돌아보심으로 양식이 풍족해졌다. 또한 자식을 낳지 못해 괴로워하던 한나를 기억해 주심으로 그녀는 선지자 사무엘을 낳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시는 날, 우리는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고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높일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이 열리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심판이 끝나자 하나님은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을 닫으셨다. 산불이 한 번 지나간 자리에서는 이미 탄 초목이 다시 타지 않는 것처럼, 이미 심판을 받은 죄에는 다시 심판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을 닫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예수님께 내리시고, 우리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거두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진노를 끝내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후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표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님께 우리 죄에 대한 심판을 내리신 후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사탄의 정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 안에서 목적지도 없이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떠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정확하게 아라랏 산으로 인도하여 머물게 하셨다.

목자가 양 떼를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걸음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염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신실하게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고 계신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시 37:23)라고 말씀한다.

또한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라고 말씀한다. 소경과 같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걸음을 주장하면 결국 실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밝히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친히 인도하신다.

우리가 가장 안전하고 복된 길을 걷는 이유는 우리의 걸음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물밖에 보이지 않던 방주 밖으로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증거이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그 엄청난 물이 줄어들게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분명한 표시였다.

다윗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시 40:2)에 빠졌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어려운 형편에 처할 때가 있다. 그런데 전혀 소망이 보이지 않던 상황 속에서 조금이라도 소망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또한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라는 말씀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마음이 육신을 따르는 데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자라 간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방주 밖으로 나간 까마귀가 다시 방주로 돌아온 것은 땅이 아직 마르지 않아 내려앉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귀는 마치 세상에 마음 둘 곳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인다. 사람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세상이 주는 만족은 잠시뿐이며, 곧 다시 목마르게 된다. 그러나 그 목마름으로 인해 고통하는 사람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신 예수님을 찾게 된다. 목마른 자가 복된 것은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라고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죽어 지옥에 간 부자와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세상에 빠져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여김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은 사람과 세상적인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심령이 가난함으로 하나님을 찾은 사람의 결국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준다.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방주로 돌아온 비둘기를 노아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께로 돌아오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모두 받아 주신다. 하나님은 마치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탕진한 아들이 모든 것을 잃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부둥켜안고 기쁨으로 맞이한 아버지와 같으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당신께 은혜를 구하러 오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신 적이 없었다. 오히려 당신을 찾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먼저 찾아가 은혜의 손길을 내미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 65:1–2).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우리 주위에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 노아가 비둘기가 입에 물고 온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보고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던 것처럼,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얼음이 녹고 꽃이 피는 것을 보면 봄이 왔음을 알 수 있고, 낙엽이 지는 것을 보면 가을이 왔음을 알 수 있다. 어두운 동쪽 하늘이 점점 밝아지면 해가 떠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여인의 배가 점점 불러 오르면 임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면, 그분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분명히 알 수 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씻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방주 밖의 환경이 비둘기가 살아가기에 충분했음을 의미한다. 비둘기가 스스로 준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가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는 환경을 마련해 두셨던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사울에게 쫓기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뿐 아니라 함께한 육백 명의 사람들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을 보았기에 그는 담대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또한 “자녀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 12:14)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두신다.

이는 마치 요셉이 앞으로 닥칠 칠 년의 흉년을 대비하여 풍년의 때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식을 저장해 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까지도 이미 예비하시는 분이시다.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땅 위에서 물이 걷힌 후, 노아가 방주의 덮개를 열고 바라본 세상은 홍수 이전과는 여러 면에서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 역시 구원받기 전과 후에 바라보는 세계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경험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십자가가 단지 교회의 상징으로만 보였지만, 영접한 후에는 우리의 죄값이 영원히 치러진 거룩한 구원의 표로 보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심판에서 자유하게 된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또한 구원받기 전에는 육신의 만족을 위해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살았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새로운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이전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무관심했으나, 이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긍휼한 마음을 품게 된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홍수가 시작된 지 일 년 열흘이 지나서야 땅이 완전히 말랐다. 사십 일 동안 비가 내렸고, 땅을 덮었던 물이 줄어들어 완전히 마르기까지는 삼백칠십 일이 걸렸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하루 만에도 물을 모두 거두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가 가까워졌을 때 이렇게 말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신 7:22).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한 번에 쫓아내지 않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배려하신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도 때로는 기도에 즉시 응답하시지만, 어떤 때는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더디 하시는 것은 결코 무관심이나 거절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때는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선하고 복된 때이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하나님은 땅이 물에 잠겨 있을 때에는 노아에게 방주 밖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땅이 완전히 마른 후에야 비로소 나오라고 명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아무 준비 없이 무작정 순종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발을 내딛어도 아무 문제가 없도록 모든 것을 미리 예비하시고, 그 후에 말씀을 따라 행하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우리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더 안전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오히려 어려움이나 실패를 겪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갖는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잠 28:26)라고 말씀한다.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따를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라고 권면한다.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를 때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지키시는 참된 안전 가운데 거하게 된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에 들어갈 때도 함께 들어갔고, 나올 때도 함께 나왔다. 그들은 노아와 함께함으로 물의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고, 그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는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부활하였기에 성경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고 말씀한다.

더 나아가, 성경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였으며,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자신을 위한 먹을 것이나 쉴 곳을 마련하기보다, 가장 먼저 제단을 쌓았다. 이를 통해 심판 가운데서 자신과 가족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그의 감사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노아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방주를 준비함으로 물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멸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성경은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롬 4:16)라고 말씀한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만일 상속자의 자격이 우리의 행위에서 비롯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대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후사가 되게 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죄 가운데 있는 우리는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를 그 어떤 귀한 것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송한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노아와 그의 가족은 물로써 모든 사람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직접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육신을 따라 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심판이 사람의 근본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 이후에도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러한 악한 본성을 가진 우리를 고치려고 하지 않으셨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다. 그리고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주셔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옛 본성 자체를 문제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주신 새 생명을 따라 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옛 사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을 보신다.

이러한 이유로 영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육신의 기준이나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성경은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라고 말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