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대적했다. 그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는 더러움이 감추어지지만, “참 빛”(요 1:9)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죄와 불의가 드러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

그러나 죄가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은 결코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처럼 자신의 죄가 드러난 사람은 오히려 그분의 은혜를 입어 죄의 정죄와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얽매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의 속박에서 풀어 참된 생명과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분이다.

그럼에도 죄를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자신을 옭아매는 결박자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라고 말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그랬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다. 죄를 인정하고 빛으로 나아오기를 거절했고, 오히려 자신들이 누리던 지위를 지키려고 예수님을 대적하여 제거하려 했다.

하나님은 지극히 크고 높으신 분이시기에 사람이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한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며 그분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도모가 허사임을 아시기에 그들을 비웃으신다. 인간들이 아무리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반역이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것조차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지 못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를 제거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로 높이셨다. 인간의 대적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 된 것이다.

“하늘에 계신 이”라는 말씀도 중요하다. 인간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이것은 단순히 장소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초월성을 보여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대적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거나 변경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에 의해 자신의 뜻을 바꾸시 않고, 오직 자신의 기쁘신 뜻과 계획을 따라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셨고,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또한 바울은 로마서 1장 4절에서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날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메시아 왕이심이 권능으로 드러나고 선포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을 그의 유업으로 주시고, 그의 통치가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 민족만의 왕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에게 통치와 심판의 권세를 주셨다. 철장 앞에서 질그릇이 견딜 수 없듯이, 아무리 강한 세상의 권세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끝까지 대적하여 이길 수는 없다.

따라서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며, 끝까지 자신의 통치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왕이시다.

‘그런즉’으로 시작하는 이 말씀은 앞선 말씀들의 결론이다. 잠언 1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과 그가 세우신 왕을 대적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어리석음에서 돌이켜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교훈을 받을 것을 권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셨기에 더 이상 그분을 대적하지 말고 돌이켜 그 왕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멀리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높으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경외하며 섬기는 가운데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말씀하신다. 왕에게 입맞추는 것은 왕에 대한 존경과 충성과 복종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복종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예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인간이 거부할 수는 있어도 그 왕의 권세를 무너뜨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반역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약속이 주어진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여기서 “복이 있도다”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에 사용된 것과 같은 ‘아쉬레이’((Ashrei)이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시편 2편은 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사람이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시편 1편과 2편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대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신의 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을 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