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에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은 언제나 유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도록 예정하셨다. 변개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아무도 바꿀 수 없기에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은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보장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약속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홍수 심판 이후 하나님은 모든 동물을 사람의 손에 맡기셨고, 그 결과 동물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되었다.

처음 하나님께서 짐승을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풀을 먹으며 살았다. 사자 역시 풀을 먹었고, 짐승들은 서로를 해하지 않았으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평화로웠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가 깨어지고 동물들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인간의 범죄 이후의 일이다. 이로써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 변화가 인간의 죄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 또한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죄를 범한 이후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고, 그 결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성경은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사 11:6-7)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처럼, 짐승들이 다시 화목하게 되고 더 이상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회복은 예수님 안에서 가능해진다. 인간 역시 범죄 이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졌던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다시 회복하시는 분이다.

“모든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생명 되는 피째 먹지 것이니라.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모든 산 동물을 먹을 것으로 허락하셨다. 그러나 피째 먹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생명 되는 피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피에 주목하도록 하셨다. 이는 장차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신 것이다.

성경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라고 말씀한다.

이처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며, 그 피가 죄를 속하므로 인간의 죄는 생명으로 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라고 증거한다.

그러나 율법에 따라 속죄 제물로 드려진 동물의 피는 장차 지을 죄까지 온전히 씻을 능력이 없었기에, 사람을 완전하고 영원하게 거룩하게 하지 못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이미 지은 죄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 정결하게 할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히 9:12)를 이루셨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다는 것은 곧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면, 그 생명을 반드시 요구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그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셨는데 만일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도 예수님을 거부하면 예수님의 피흘림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일 3:15)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을 멸시하는 자는 손에 피가 가득한  살인자에 해당한다.  

비록 직접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그 생명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며, 그 결과는 성경이 말하는 ‘둘째 사망’, 곧 영원한 멸망이다.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모든 생물 너희와 함께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노아와 그의 가족 외에 모든 사람이 홍수로 멸망을 당한 것은 그들의 악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물로써 다시는 그들을 멸하지 않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아의 후손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을 따르는 영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홍수로 멸망을 당한 사람들 못지않게 악을 행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이 물로 멸망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죄가 많기 때문에 지옥에 갈까 두려워하지만, 사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사람은 그 약속 안에서 안식하게 된다.

또한 아브라함은 백 세가 되어 자신의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과 같음을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 약속을 믿었기에 자식이 없음으로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불행한 것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의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을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 언약의 증거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다. 혹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잊는다 할지라도, 하늘에 나타난 무지개를 볼 때마다 그 언약을 다시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약속과 그 증거가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안전과 확신이 된다.

유다에게는 엘과 오난과 셀라, 세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엘과 오난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함으로 죽고 셀라만 남게 되었다. 엘의 아내였던 다말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계보 안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유다는 셀라를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 이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동침하게 된다.

그때 다말은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창 38:16)라고 물었고, 유다는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고 약속했다. 다말은 그 약속의 담보로 유다의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요구했고, 유다는 그것들을 주었다. 이 담보물은 유다의 약속에 대한 보증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는 언약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확실한 증거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러므로 마귀가 우리를 정죄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게 된다. 그 약속으로 인해 우리는 마귀의 정죄에서 벗어나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된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때로 그 약속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절대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시기에, 우리가 죄로 인해 심판을 두려워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구름 속의 무지개를 바라보시듯,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우리를 대하시며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다. 구름은 심판을 상징하지만, 그 속에 있는 무지개는 언약과 은혜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심판의 구름이 몰려올 때마다 하나님은 언약의 무지개를 보이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안위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기에, 결코 폐하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기만 하면, 그 약속이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여 우리를 평강 가운데로 인도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땅에 퍼지니라

노아와 그의 아들들의 새로운 삶의 시작은 아담의 시작과는 다르다. 아담은 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으나 결국 타락하였고, 노아의 아들들은 이미 죄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도 처음에는 죄 가운데서 시작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또한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물의 심판 이후,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리라”(눅 1:74–75)는 말씀이 우리에게 성취되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은 노아조차도 인간의 연약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 아버지를 대하는 세 아들의 태도는 서로 달랐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지 않으려 얼굴을 돌리고 옷으로 그의 하체를 덮어 주었지만,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에 나가 형제들에게 알렸다.

함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아버지와 자신은 다르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성경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로마서 2:1)고 말씀한다.

또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하려 돌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7)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행위로 완전한 자는 아무도 없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기에 성경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32)고 권면한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경외하지 않는 자의 결국은 참으로 다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함은 그 결과로 그의 후손인 가나안까지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는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 셈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은혜를 입었고, 야벳은 창대하게 되어 셈의 장막에 거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악한 일에 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악을 행하는 데 담대하다”(전 8:11)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 마음을 따라 악을 행하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위선을 행하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던 이유도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보며 근신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주목하시고, 그들과 친밀히 교제하시며 그의 언약을 나타내신다.

또한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신다”(시 34:7)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토록 함께한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만일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과 함께 물로 멸망을 당했다면, 그에게 주어진 삼백오십 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그의 날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다. 그가 살아난 이후에 누렸던 모든 시간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 시간이었다.

우리 역시 아담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지 않으셨다면,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시간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당연한 일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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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노아의 아들들은 홍수 이후에 자녀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손들은 홍수 이전의 세상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직 그 시대를 직접 겪었던 노아와 방주에 함께 탔던 가족들의 증언을 통해서만 홍수 전의 세계를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하늘나라를 직접 보고 경험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에 대해 스스로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하늘나라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하늘나라를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요 3:11)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아시며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신 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고 말씀한다. 지금 우리는 제한된 이해 속에 있지만, 그 날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노아는 자신의 헐벗은 모습을 보지 않고 옷을 가져다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던 야벳에게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창 9:27)라고 축복하였다.

‘야벳’이라는 이름은 ‘넓히다, 확장시키다, 번성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노아가 하나님께 구한 대로, 야벳의 후손들은 온 세계로 퍼져 나가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확장과 번성 속에서도 참된 만족은 없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셈의 장막에 거할 때에야 비로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육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우리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없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그 갈증을 채울 수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영원한 생수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야벳의 자손들이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이루며 여러 나라를 이루었지만 그 뿌리가 야벳에게 있듯, 사람의 삶 또한 그 영적 근원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각기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떠난 단절 상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결과 영원하지 않은 것에 가치를 두며 멸망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저마다의 개성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품어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나아간다.

결국 인생의 성패는 외형이 아니라 소속에 있다.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가 삶의 방향과 마지막 목적지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었을 때, 이를 보고 형제들에게 고한 함으로 인해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 이는 함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자손들까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우리 역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저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필요와 갈망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저주 아래 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가 저주 아래 있음을 알게 한다. 또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세대에게는 양심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깨닫게 하셨다.

간음 중에 잡혀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철저히 심판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음은 자신이 저주 아래 있음을 깨닫는 자에게 들려온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성경은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린도전서 4:7)라고 말씀한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께 받은 것을 마치 자기 것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왕위에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게 된 것도, 그가 교만하여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다니엘 4:30)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니므롯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 역시 교만에서 나온 생각이다.

성경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한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니므롯은 도시들과 나라들을 세운 인물이다. 그의 나라 가운데 하나가 바벨이었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이 다른 이들이 이루기 어려운 일을 이루게 되면 마음이 높아지기 쉽다. 그러나 한 번 높아진 마음은 스스로 낮추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며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고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 40:11)

이 말씀은 사람이 스스로 교만을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8:12)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사람이 많은 일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마음이 높아져 하나님을 잃어버린다면 그 모든 수고가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9)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 그 땅에는 많은 가나안 족속들이 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그들을 심판하실 만큼 죄악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들을 멸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돌이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있었으니, 곧 기브온 사람들과 라합이다.

가나안 땅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고 끝까지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다가 멸망을 당하였다. 반면 기브온 사람들과 라합은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다.

비록 그들도 저주 아래 있던 가나안의 자손이었지만,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때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저주하신 목적이 단순한 멸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악에서 떠나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말씀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경계를 정하셨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나안 사람들조차도 그분이 정하신 경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성경은 바다조차 하나님의 정하신 경계 아래 있음을 말씀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렘 5:22)

이처럼 하나님은 자연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한계를 정하신다. 어떤 사람도 그분이 정하신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를 넘어 죄를 행할 수는 없다.

또한 성경은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시 139:5)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그분이 정하신 경계 속에 살아간다. 그러므로 우리의 악함도 무한히 치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제한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설명하시며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종들이 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보고 주인에게 그것을 뽑을지 묻자, 주인은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 이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함께 뽑힐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였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아버지 노아에게 축복을 받은 셈의 자손과 저주를 받은 함의 자손이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식들도 이 세상 가운데 함께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는 것은 자기 백성을 위하심이며, 동시에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추수의 때가 이르면 의인과 죄인의 운명은 분명히 갈라지게 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0-13).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야곱과 에서는 모두 이삭의 아들이었지만 서로 다른 민족을 이루었다. 형 에서는 에돔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동생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성경은 육신적인 에서와 영적인 야곱을 통해 인류의 두 부류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에벨의 두 아들, 벨렉과 욕단 역시 이와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벨렉의 계보는 아브라함으로 이어지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까지 이어지는 믿음의 계보를 이룬다. 반면 욕단의 계보는 하나님과의 약속과는 상관없는, 세상적인 흐름을 이루게 된다.

야곱과 에서가 함께할 수 없었던 것처럼, 벨렉과 욕단 역시 나뉘었다. 이는 의인과 죄인이 함께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고린도후서 6:14-16)

제11장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말과 언어가 다르면 서로의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을 조율하여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품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같은 언어와 말을 사용하면 마음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연합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 중심으로, 마귀의 역사에 따라 이루어질 때 사람은 교만해지고 결국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노아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떠나 바벨탑을 쌓은 것도 바로 이러한 모습이다.

반대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연합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이러한 연합에 대해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사람들은 풍요롭고 부족함이 없는 삶을 원한다. 노아의 후손들 역시 물이 풍부한 비옥한 시날 평지를 만나자 그곳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 부족함이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되면,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을 잊거나 멸시하기 쉽다.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고 그 꼭대기에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한 일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이 지나치게 자만하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때로는 원하지 않는 형편을 허락하신다. 이는 우리를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시려는 사랑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교만하여 당신을 잊은 이스라엘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시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 29:11)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상황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그분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하려는 데 그 뜻이 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죽은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대상 10:13–14)

노아의 자손들 또한 사울과 같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기들의 계획을 따라 성읍과 탑을 건설하였다. 이때 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돌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들의 수고로 만든 벽돌을 사용하였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하며, 자기가 보기에 옳은 대로 행한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권면한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사람들이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 한 모습을 보면,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 세상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도 자기와 비슷할 것이라 여기며, 자기가 듣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도 듣지 못하고, 자기가 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도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하나님을 자기의 한계 안에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린도후서 10:12)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 6:3)라고 권면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지극히 작은 존재를 깨닫고 자연히 겸손하게 된다. 그러나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세아 4:6)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크고 뛰어난 존재인 줄로 착각하여, 결국 교만한 마음으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잠언 4:6-7)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성경은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편 94:9)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침상에서 은밀히 하는 말까지 들으시며,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마음의 중심까지도 다 아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읍과 탑을 쌓는 것을 보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쌓게 만든 그들의 교만한 마음까지 살피셨다. 그래서 친히 내려오셔서 그들의 길을 막으셨다.

하나님께서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면, 사람은 결국 스스로 파멸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던 유다 백성에게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이사야서 30:21)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목자가 양을 인도하듯 바른 길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로 미치리로다”(시편 100:5)라고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양심의 소리를 계속 무시하면 점점 무뎌지고, 마침내는 양심에 화인을 맞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죄의 유혹에 반복해서 끌려가다 보면 사람의 마음은 점점 강퍅해진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히브리서 3:12–13)

또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에베소서 4:17–18)

하나님께서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삶을 경계하시는 이유는, 그러한 삶이 결국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하기 때문이다. 노아 시대에도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악하여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강퍅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물로 심판하셨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성읍과 탑을 쌓던 사람들을 막으신 것은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더욱 강퍅해져 결국 멸망에 이르는 것을 막으시려는 은혜의 개입이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같은 언어와 같은 말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놀라운 일을 보았다면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교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왔어야 했다.

그러나 신약에 이르러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오순절 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자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각기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각 나라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이들이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각각 자기의 언어로 듣고 크게 놀라며 소동이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제자들이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고 사도들의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다윗이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라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목적은 단순히 놀라움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돌이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데 있다.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하나님께서 성읍과 탑을 건설하던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온 지면에 흩으신 후, 성경은 곧바로 셈의 족보를 이어서 기록한다. 이는 세상이 아무리 흩어지고 혼란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믿음의 계보는 결코 끊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선지자 엘리야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광야로 도망하며 깊은 낙심에 빠졌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만이 홀로 남아 신앙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입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믿음을 지키는 남은 자들을 보존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셈의 족보가 이어졌듯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남겨 두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엘리야처럼 ‘나만 남았다’고 느낄 때에도,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믿음을 지키는 이들이 존재한다.

성경은 이러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성경은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다른 신들, 곧 우상을 섬겼다고 말씀한다. 데라 아래에서 태어난 아브람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환경과 영향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인간적인 조건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영향 아래 있는 세상 속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세상의 가치관과 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게 된 것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선물을 받은 사람이 그 선물을 준 이에게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시 95:1-2)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모압에 거하던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후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두 며느리의 선택이 갈린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지만, 오르바는 모압에 남았다. 이후 성경은 룻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하지만, 오르바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갈대아 우르라는 우상 숭배의 땅에서도 두 사람의 길은 나뉜다. 하란은 그곳에서 생을 마쳤고 그의 삶은 짧게 언급될 뿐이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땅을 떠났고 그의 삶은 성경 전반에 걸쳐 자세히 기록된다.

이 차이는 단순한 기록의 분량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방향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 1:6)는 말씀처럼 악인의 길은 한때 형통해 보일 수 있으나 결국 사라지고,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아시고 함께하시며 끝까지 책임지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권면한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언 23:17,18)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여자가 어떤 남자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방향과 운명이 크게 달라진다. 사래는 아브라함과 결혼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었지만, 밀가는 나홀과 함께 하란에 머물게 되었다.

또한 모압 여인 룻은 남편 말론이 죽은 후 보아스와 재혼하여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은혜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신부로 부름받아 그분과 한 몸이 되는 은혜를 입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기업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5,6)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된 것은 우리의 공로나 자격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연합은 우리의 연약함이나 환경으로 끊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에 영원한 감사와 평안을 누리게 된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성경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에 대하여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로 시작한다. 이는 단순한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시기 전에 사래의 불임을 언급하신 것은, 앞으로 태어날 이삭이 인간적인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주어지는 생명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창조의 역사가 흑암 속에서 시작되었듯, 우리 역시 죄로 말미암아 사망 아래 놓인 존재로 출발한다. 사래가 스스로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생명을 주셨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되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듯, 우리의 철저한 무능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온전히 나타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고 말씀한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데라는 그의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하란에 이르러 그곳에 정착하였고, 결국 그곳에서 죽었다. 데라는 자기 보기에 좋은 곳을 만나자 그곳에 머물러 버린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육신이 편안히 안식할 수 있는 형편을 만나면, 하나님의 뜻을 뒤로한 채 그 형편에 안주하기를 바란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중에도 애굽에 있을 때 값없이 먹던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기억하며 그리워했던 것을 보면, 사람이 얼마나 육신의 만족을 우선시하는지를 알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고 말씀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계획대로 살도록 그대로 두신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육신의 안일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육신의 안일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제12장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성경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이사야서 51:2)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고향 갈대아 우르에 그대로 두신 채로도 얼마든지 축복하실 수 있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뿐 아니라 친척과 아버지의 집까지 떠나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남아 있으면 온전히 하나님을 의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을 끊으신다.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시편 105:16)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붙잡고 있는 근거를 흔드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신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은 결국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예레미야서 2:13)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빼앗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내려 먹이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의지의 대상을 제거하신 후 오히려 하나님의 것으로 풍족하게 채우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으로,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와 같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셨다. 아브람이 그 복을 누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바로의 군대로 인해 홍해 앞에 갇혔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 14:16)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이 되었다.

성경은 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잡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모든 믿는 자의 표본이 되었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복음을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기에 그는 ‘복의 근원’이 되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8,9).

그러나 아브라함은 행위로 보았을 때 결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아내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며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입었다.

이와 같이 우리 또한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없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받은 동일한 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 그의 행위가 온전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 아브라함을 옳다 여기고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반대로 그의 행위만을 보고 그의 믿음을 업신여기며 정죄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과 롯은 함께 길을 떠났지만, 그 출발의 기준은 달랐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은 삼촌 아브람을 따라갔다. 이 차이는 결국 두 사람의 전혀 다른 결말로 이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기에, 말씀을 따르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말씀을 이루실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반면, 상황에 따라 변하는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없기에 결국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된다.

아브람과 롯의 소유가 많아져 더 이상 함께 거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의 중심은 분명히 드러났다. 아브람은 롯에게 “우리는 한 친족이라 서로 다투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했다.

그때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다. 그 땅이 물이 넉넉하고 비옥해 보이자, 그는 요단 온 지역을 택하여 동쪽으로 옮겨갔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믿었기에 어디에 있든지 복을 받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롯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의지했기에, 눈에 보기에 좋은 곳을 선택했다.

결국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았다. 반면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속에서 겨우 구원을 얻어 떠나야 했고, 이후 그의 가정에서는 암몬과 모압이 태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비극적인 결과가 이어졌다.

성경은 말씀한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언 16:20)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익숙한 곳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반면,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으나 도중에 하란에 머물다 생을 마감했다.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아버지 데라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쫓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고말씀한다. 하나님의 뜻은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기의 열심과 의지로 천국에 가려다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쫓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따랐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아브라함이 누렸던 복을 우리도 함께 누리게 된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람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선포된 순간, 비록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 거주하고 있었을지라도 그 땅의 실질적인 주인은 더 이상 그들이 아니라 아브람의 자손들이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누구에게 주시든지, 그 순간 그것은 그에게 속하게 된다. 가나안 사람들이 여전히 그 땅에서 주인처럼 살아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이상 그 땅의 소유권은 이미 아브람의 자손들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이와 같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가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제 그는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할 수 없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로새서 1:13)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로 옮기셨기 때문이다.

마귀는 여전히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를 지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선포하신 약속 위에 서 있는 존재이다. 비록 아직 모든 것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소속과 주권은 이미 분명히 결정되어 있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브람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과 ‘폐허, 무너짐’을 뜻하는 아이 사이에 장막을 쳤다. 이 모습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서 있는 우리의 영적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아브람이 그 사이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불렀듯이, 우리 역시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시선은 보이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는 말씀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우리는 영원한 본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기에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간다. 외국인과 나그네는 돌아갈 곳이 있기에 잠시 머무는 곳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이 땅에 마음을 두지 않기에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람이 거하는 땅에 기근이 임하자 그는 애굽으로 내려갔다. 이 장면은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으러 왔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 대왕이 베들레헴과 그 지경의 사내아이들을 죽이려 하자,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아브람은 기근이라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간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헤롯의 칼날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요셉 가족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두 사건은 같은 ‘애굽으로 내려감’이라 할지라도 그 성격은 분명히 다르다. 아브람의 경우는 환경을 따라 선택한 이동의 모습이라면, 요셉의 가족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보호와 인도의 길이었다.

하나님은 기근을 통해 믿음을 시험하기도 하시고,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하시며,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마음을 끊어 내기도 하신다. 또한 기근과 같은 어려움을 통해, 아기 예수를 보호하신 것처럼 우리를 더 안전한 자리로 인도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려움을 허락하시든지,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람과 함께하셨던 것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사실이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아람 왕이 선지자 엘리사를 잡으려고 군대를 보내 성을 에워쌌을 때, 그의 사환 게하시는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했다. 그러자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고 말하며 그의 눈을 열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여시자,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반면 아브람은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리따운 아내 사래로 인해 애굽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두려워했다. 이처럼 우리도 두려운 상황을 만날 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 자신의 한계 안에서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성경은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시 34:7)라고 말씀한다. 수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둘러 보호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주위에도 여호와의 천사가 둘러 진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참으로 해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람은 아내 사래가 애굽의 바로에게 끌려가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누이라고 말해 달라고 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어떻게든 지키려 한다.

야곱도 형 에서의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가로챈 일로 인해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 하자 하란에 있는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하였다. 그리고 20년 후 다시 벧엘로 돌아오는 길에 에서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형이 여전히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가족들을 앞세우고도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한 채,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축복을 받기 전까지 그는 두려움 속에서 얍복강을 건너지 못했다.

다윗 역시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그를 피해 이스라엘 경내를 떠나 도망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모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처럼 사람은 죽음 앞에서 연약할 수밖에 없다. 우리 역시 생명의 위협 앞에 서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생명이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 주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바로의 손에서, 야곱을 에서의 손에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지키신 것처럼 우리의 생명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신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사래가 사랑하는 남편 아브람을 두고 바로의 궁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참으로 슬프고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서 애굽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권세를, 바로는 그 중심에 있는 사단, 마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 점에서 사래가 바로의 궁으로 끌려 들어가는 모습은, 마치 성도가 마귀의 속임에 빠져 그 권세 아래 놓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사래가 바로의 궁에 들어갔다고 해서 아브람과의 부부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성도가 연약함 가운데 잠시 미혹되어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한 번 예수 그리스도와 맺어진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마귀의 역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분명하게 경고한다. 마귀는 잔인하며, 사람을 속여 결국 고통과 파멸로 끌고 가려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며, 마귀의 간계를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1-13)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아브람이 바로에게서 받은 재물은 아내 사래를 바로에게 넘겨준 대가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재물이 아브람에게 무슨 기쁨이 되었겠는가. 그는 오히려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마귀가 주는 부귀영화를 얻는다 해도 마음에 참된 만족이 없는 것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권세 아래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사래를 다시 되찾게 될 때에 비로소 사래와 함게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 안에서 참된 즐거움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역시 때때로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할 때가 있다. 육신의 정욕은 처음에는 달콤하게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우리 마음을 찌르고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게 될 때, 우리 안에는 하늘의 평강이 회복된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천하만국을 보여 주며 자기에게 절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눅 4:8)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기쁨과 영광은 세상이 주는 부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과 함께 겸손히 동행하는데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다윗이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그는 그 뒤를 따라가 그것을 치고 새끼를 그 입에서 건져 내었다. 어린 양이 스스로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다윗이 대신 싸워 구해 냄으로써 그 양은 사자의 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어린 양 같은 사래도 자기 힘으로는 사자 같은 바로의 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래는 그의 손아귀에서 놓임을 받게 되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6-8)

사냥꾼의 올무에 걸린 새는 올무가 끊어지지 않는 한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다. 이처럼 사람도 마귀의 올무에 걸리면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올무를 끊으시는 분이다. 우리가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마귀의 올무를 끊으셨기 때문이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숨기기도 하고,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하기도 한다. 아브람 역시 두려움 때문에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하였고, 그 결과 사래는 원치 않는 바로의 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이 연약할지라도 당신의 언약을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래를 바로의 손에서 이끌어 내셨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자 바로는 결국 사래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이는 후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할 때,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바로가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하나님은 하와를 유혹한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대로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 그 결과 마귀는 자기 권세 아래 붙들고 있던 자들을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게 되었다.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은 결국 그곳에서 떠나게 되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사람에게 잠시 안식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두려움과 근심과 고통을 안겨 준다. 아브람 역시 애굽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고, 그로 인해 큰 수치와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이는 세상이 결코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말씀한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금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결국 그것이 그의 영혼을 찌르고 괴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말씀하신다. 거룩은 단지 외적인 경건함만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여 자주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을 의지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던 것처럼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어 거룩한 길을 걷게 하신다.

제13장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아브람은 애굽에서 나올 때 가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단지 재물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에서도 더욱 부요해졌을 것이다.

아브람은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 전까지는 아내를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죽음의 두려움 앞에 서자,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바로의 궁으로 보내는 모습을 통해, 그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비굴한 존재인지를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비록 자신은 연약하고 비굴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지키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도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18-20)

우리 역시 때때로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악함과 이기심을 발견하고 당황할 때가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도우셨고, 시편 기자의 기도에 귀 기울이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와 인자를 베푸신다.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은 가나안에 처음 들어왔을 때 벧엘과 아이 사이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애굽에서의 실패와 고난을 겪은 뒤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동일하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처음 하나님을 부를 때와, 애굽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을 경험한 후 다시 하나님을 부를 때의 마음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사람의 마음이 고난 받기 전과 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난은 당시에는 괴롭고 견디기 힘들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 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배우게 된다. 또한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던 마음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길도 배우게 된다.

고난이 유익한 이유는 우리 영혼을 낮추고 연단하여 더욱 겸손하고 강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두 번째로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 때에는, 처음과는 다른 깊은 감사와 은혜의 마음이 그의 심령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을 것이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롯의 아버지 하란은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가진 것 없던 롯에게 아브람은 의지할 만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는 아브람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함께 머물렀고, 이후 가나안 땅에도 함께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소유가 많아지자 결국 아브람과 함께 거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역시 마음의 소유가 많아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만큼 무익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물은 빈 그릇에 담을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비워진 마음에 임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라고 말씀한다. 은과 금이 풀무불 속에서 불순물이 제거되어 순결하게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의 헛되고 불필요한 것들을 ‘고난의 풀무불’(사 48:10)로 태우시며 우리를 정결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성경은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라고 말씀한다.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던 것도 결국 각자의 욕심 때문이었다. 욕심과 욕심이 만나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구원받은 우리 안에도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함께 있어 늘 서로 싸운다. 그래서 성경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라고 말씀한다.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함께 거할 수 없었던 것처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또한 서로 함께할 수 없다. 결국 사람은 어느 한쪽을 따라 행하게 된다.

아브람에게 복된 장래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육체를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 안에서 복된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자기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각자의 소유 때문에 다투는 모습을 보며 마음에 큰 고통을 느꼈다. 그는 재물보다 화평을 더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다투지 않고 화목하기를 원하여, 조카 롯에게 좋은 것을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하였다.

성경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화평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은 아브람에게 합당하게 적용될 수 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

성경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를 내어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담을 허무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아브람이 롯을 사랑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마땅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라고 말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고 말했을 때, 롯은 요단 온 지역을 택하였다. 그가 보기에 그 땅은 물이 풍부하고 아름다우며 풍요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아름다움 뒤에 감추어진 죄악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겉으로는 에덴동산처럼 좋아 보였지만, 그 중심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롯과 달리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보신다. 특히 사람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진 것까지도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7)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 그러므로 거짓은 언제나 추하고 두려운 모습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름답고 선하며 친절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 7:15)고 경고하셨다.

롯처럼 지혜와 분별이 부족한 우리가 자신의 눈과 판단만을 의지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사람의 눈은 겉모습은 볼 수 있지만 그 속까지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고 말씀한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에 머물렀지만, 롯은 자기 보기에 좋은 곳을 따라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국은 너무나 달랐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주를 지은 노아와, 설마 홍수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노아를 비웃던 사람들의 결국이 달랐던 것과 같다.

사람이 자기 판단을 따라 행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기보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할 때 참된 복과 안전을 누릴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평안을 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계획과 욕심을 따라 행하려 할 때에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결국 우리에게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가 자기 고집대로 위험한 길로 가려 할 때, 부모가 그 손을 붙들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아이는 당장 자신이 원하는 길이 좋아 보일 수 있지만, 부모는 그 끝에 있는 위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를 아시기에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고 말씀한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아브람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롯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르는 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에게도 두 부류의 사람을 상징하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자식없자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반면 이삭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창 21:10)고 말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일로 인해 매우 근심하였지만, 하나님은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창 21:12)고 말씀하셨다. 이는 육체로 난 자가 약속으로 난 자와 함께 기업을 얻을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자기의 육체와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 오직 인간의 노력이나 혈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0-13)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사도 바울은 육적으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참된 자손은 혈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7)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믿는 모든 자의 조상”(롬 4:11)으로 세우셨다. 이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늘나라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게 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통해,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얼마나 넓고 은혜롭게 여셨는지를 알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따라 구원하셨다면 구원을 얻을 육체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어떤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하셨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아무도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처럼 견고한 집을 짓고 살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지 거두어 옮길 수 있는 장막에 거하며 순례자의 삶을 살았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9-10)

아브람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보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장차 없어질 것들을 위해 마음과 시간과 힘을 쏟는다. 그들은 눈앞의 유익과 보이는 것에 붙들려 살아간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며, 영원한 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