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이 그의 방패라고 말씀하셨다. 방패는 적의 공격을 막아 생명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바로의 군대가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 왔을 때,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가로막아 주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큰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또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세운 거대한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졌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방패가 되어 주심으로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시 18:30)라고 고백했다. 환난의 날에 우리가 여호와께 피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에게 피하는 자들의 방패가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목자가 자기 양들을 보호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세상의 위험과 환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방패가 되시며, 그 품 안에 피하는 자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신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아브람은 점점 노쇠해 가는 사래를 보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잃어 갔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혈통을 이을 자녀가 아닌,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역시 믿음이 약할 때는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앞의 형편을 더 크게 볼 때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보이는 현실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믿음 없는 상태에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의 하나도 어김이 없느니라”(수 23:14)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심으로써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셔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갖도록 인도하신다.
형편만 바라보던 아브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일찍이 씨를 주셨더라면, 아브람은 자기 집에서 길린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더 좋은 것을 얻으면 이전에 붙들고 있던 것을 쉽게 내려놓는다.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삭개오 역시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재물을 소유하는 기쁨보다 크지 않았다면,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예수님에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맛본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세상 기쁨과는 비교가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 기쁨없이는 하나님과의 동행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회당장 야이로는 열두 살 된 외딸이 죽어가자 예수님께 나아가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간구했다. 예수님이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시던 중에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딸이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전했다. 그때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 8:5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슬픔과 절망, 두려움에 빠져들던 야이로의 마음을 바로잡아 주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말씀을 주심으로,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셨다.
성경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바르게 함’은 ‘넘어진 것을 다시 일으켜 곧게 세운다’는 의미로, 잘못된 상태를 바로잡아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마음도 때때로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바로잡아 주셔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마음을 갖게 하신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사람들이 한 맹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대어 고쳐 주시기를 구하였다. 예수님은 그 맹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그의 눈에 침을 바르시고 안수하신 후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다. 그러자 그는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보나이다”(막 8:24)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그의 눈에 안수하시자 그가 밝히 보게 되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당시의 아브람은 그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하나님은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친히 그를 밖으로 이끌어 내시고 하늘의 별들을 보여 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추상적으로 들렸던 약속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상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하신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이해하는 것 같지만 그 의미가 막연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 막연함 속에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여러 사건과 경험, 그리고 삶의 과정을 통해 말씀의 뜻을 더욱 선명하게 깨닫도록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그때 주셨던 말씀이 바로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고 말씀하셨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기억나게 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신다. 우리가 들은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삶 가운데서 그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게 하신다. 마치 예수님의 두 번째 안수를 통해 맹인이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된 것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고 믿게 하신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행 17:25)이라고 말씀한다.
만일 하나님께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기에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모든 것이 풍성한 아버지가 집을 떠난 둘째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아들이 큰 성공을 이루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겠는가?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오직 아들이 살아서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행위나 드리는 제물 자체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다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람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허물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을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공로나 자격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신 후에도 그의 삶에 고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고난과 연단을 겪은 끝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과 함께 기업으로 받게 되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을 바로와 그의 군대가 뒤쫓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친히 바로와 그의 군대를 멸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자신들을 지키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보고 믿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마귀의 권세에서 건져 내신 후에도 때로는 어려운 형편을 허락하신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잘못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 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구원하심으로써, 우리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알고 믿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아브람이 던진 이 질문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거나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그 땅을 소유로 받을 분명한 근거와 확증을 구했던 것이다. 그것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더욱 확고히 다지기를 바랐던 영적 갈망이었다.
구약의 가나안 땅은 장차 성도들이 받게 될 영원한 하늘나라의 유업을 예표한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하늘나라를 약속하셨다. 우리가 이 언약의 근거와 확증을 바르게 알 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는 언약의 근거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확실한 근거가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천국에 들어갈 분명한 확신을 가진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이 확증이 있기에 우리는 마귀의 정죄를 넉넉히 이기고 하나님의 약속 위에 더욱 굳건히 설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근거와 확증을 구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려는 거룩한 영적 갈망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은 하나님께 가나안 땅을 소유로 받게 될 증거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삼 년 된 암소와 암염소,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언급된 동물들은 모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예물로 사용되던 것들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구약의 제사 제도와 희생 제물은 장차 오실 완전한 희생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그림자이자 예표이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증언한다. 본래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로 가득한 인간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단절된 상태였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다시 연결하고 화목하게 할 ‘중보자’가 필요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이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물음에 대답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해 주신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솔개가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 위에 내려앉으려 했던 것처럼,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려 할 때 방해하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말씀을 묵상할 때에도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엉뚱한 생각을 넣기도 한다. 또한 우리의 경험이나 합리적인 생각을 앞세워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떠나도록 미혹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올 때뿐 아니라 광야 생활 가운데서도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음에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실하게 신뢰하지 못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히 3:10-11)
아브람이 솔개를 쫓아낸 것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깨어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그러면 솔개가 물러가듯 마귀도 우리에게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장차 있을 일을 미리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심은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4:29)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 질 때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말씀을 친히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면 할수록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커진다. 그래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큰 안위를 받게 되어, 소망 가운데 인내로서 고난을 견디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믿었더라면 애굽에서 당하는 괴로움 중에서도 자기들을 구원하실 하나님에게 소망을 가졌을 것이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며 내 앞에서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아니한 자들을 내가 그 송아지 같이 되게 하리라”
(렘 34:18-20 요약)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사이로 지나갔다”는 행위 자체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두고 맹세하시는 하나님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IOE0928523578
Db8#vUjhdH3568uU
